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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괴’ 기시의 도발...84세 이승만의 마지막 독립투쟁은...

뉴데일리

‘한 번 나라를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힘드는 지 아느냐“반세기가 넘는 항일 독립운동 끝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뼈아픈 고백이다.망국 40년만에 ’다시 찾은 나라‘는 그러나 한반도 남쪽 반토막뿐, 조국의 북반부는 새로운 적(敵) 소련 공산독재가 점령한 기형아가 되고 말았다. 이럴 줄 알고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태평양전쟁 중 미국정부에 그토록 요구하지 않았던가. ”일본이 패망해 물러가면 소련 공산군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니, 하루속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한반도를 맡겨야한다“ 이렇게 간청했지만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자칭 ’친구‘ 스탈린과의 ’얄타 밀약‘에 매달려 해방3년을 허송세월 끌려가기만 했다. 결국 이승만의 ”유엔에 맡기자“는 제안에 미국이 호응함으로써 가까스로 대한민국이 탄생, 마침내 이승만은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구원하는데 성공했다. 지미(知美) 전략가 이승만의 용미(用美) 병법이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북쪽에도 적! 남쪽에도 적! 역사적 침략의 적군들에게 포위된 대한민국은 ’고립무원의 섬나라‘나 마찬가지 형국이다.그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수호 전략은 ’반공반일‘(反共反日)이 되었다. 앞에서 반복 설명한 이승만의 ’반공전략‘을 되풀이 할 필요는 없겠다. 여기서는 수백년 천적(天敵) 일본으로부터 다시 찾은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는 ’반일전략‘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훑어보기로 하자.

◆건국 초기 ’대마도 반환‘ 요구와 일본 봉쇄

20대 청년시절부터 일본과 싸운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하자 ‘실지회복’(失地灰復)부터 요구하였다.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 사흘 후 18일에 던진 ‘대마도 반환’ 카드가 그것이다.◉대마도 반환요구=“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상도(上島)와 하도(下島)의 2개섬으로 되어 한일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것인데 수백년간 일본이 탈취 점령해왔다. 이 밖에도 우리정부는 일제의 40년간 한국통치기간중 가져간 예술품, 역사기록 전부의 반환을 요구할 것이며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내 일본인 재산을 한국정부에 귀속케하는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8월20일자).이듬해 1949년 1월 7일 이승만은 내외기자단과 회견하고 남북통일, 대일배상문제 등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정부는 유엔이 승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중 양국이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니 이제는 우리도 대일강화회의에 당당히 참석해야 할 것이다. 맥아더 장군 방문시에 이 문제에 합의하였다. 정한경 박사를 대사격으로 보내어 우선 배상문제를 협의하게 한 것이니 지금 제국호텔에 체류중이나 관사가 결정되면 대사관을 설치할 것이다.대일 배상청구에 있어서 어느 때부터 기산할것인가하는 문제는, 욕심대로 하면 임진란시부터 기산해야 할것이나 적어도 40년전부터는 기산해야 할 것인데, 그러나 대마도만은 별도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가 우리의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전 일인들이 그 섬을 침입하였을 때 도민들은 의병을 일으켜서 일인들과 싸웠던 것이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마도 여러 곳에 비석들을 건립하였는데 일인들이 이 비석들을 뽑아다가 동경박물관에 둔 것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그리고 일본의 군용물은 연합국 각국에서 서로 가져갔지만 일본 군벌에게 최대 피해를 받은 것은 우리인데 해방후 3년간 우리의 국권이 회복 못되고 국제정세가 그리하야 우리 차지가 없었음은 유감사다.”이승만의 대마도 반환요구는 선전용이 아니었다. 그해 9월엔 대마도에 대한 ‘속령’을 선포하고 기회있을 때마다 수십차례나 반환을 되폴이 요구하였는데 북한의 6.25남침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일성이 이승만의 국토회복 노력을 무산시키고 일본을 도와준 꼴이다.

◉사상최초 해양주권선 ‘평화선’ 선포=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19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명한 ‘평화선’을 선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52년 4월엔 일본이 독립하므로, 미국이 일본의 해상활동을 단속했던 ‘맥아더라인’도 없어지기 때문에 그에 앞서 이승만은 역사상 최초로 한국의 영해 주권선을 설정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 등이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안한다. “이 선은 한일양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뿐, 미국 선박의 항해 자유는 보장된다”고 했다. 즉 일본의 무차별 어로행위와 군사적 도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이승만 라인’이라며 언론과 일본국민들까지 반발했지만 이승만은 ‘독도 영유권’까지 확보, 선을 넘는 일본 선박들을 모조리 나포하라 명령했다.이 ‘평화선’은 건국후 한일회담에서는 물론, 1965년 박정희정부가 ‘국교정상화’ 협상을 타결할때까지 훌륭한 ‘협상 지렛대’로 활용되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외교의 신’ 이승만의 명품이다.

◉남북의 침략 막은 한미동맹=더 근본적으로 일본의 침략위협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이승만의 ‘신의 한수’는 말할 것도 없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다. “이 조약은 북으로부터의 침략은 물론, 남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내는 보루이다”지정학적 전략가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체결할 때 미국측에게 토로한 고백이다.“미국에 대한 우리 한국의 확고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bisection)에서 보듯이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게 배신당했다. 지금의 사태진전은 또 다른 배신(sellout:팔아넘기기)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일방적인 휴전강요를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영장(the death warrant of KOREA)로 규정한 이승만은 항거불능의 사형선고(a death sentence without pretest)라며 결사적으로 항거했다.이승만의 ‘미국 불신론’은 ‘일본 불신론’에 못지않았으며 이에 필수적 대응책이 한미동맹이다. “한국은 오늘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한미방위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위하여 한미동맹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궁극적인 지배라는 야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이승만, 브릭스 주한미대사와 대화, 1953.6.17)특히 역사적으로 친일적인 미국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에서처럼 또다시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끝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관철하고야 만다. 한미동맹에 의거한 미군의 항구적인 한국주둔이야말로 중공-소련-북한의 공산침략을 차단하고 일본의 뿌리깊은 한반도지배 야욕을 뿌리부터 포기시키는 일거양득의 병법 아니런가.

◆일본의 새로운 도발 ‘재일한인교포 북송’ 조봉암과 진보당을 제거한 그해 1959년 1월 이번엔 도쿄에서 폭탄선언이 터진다.일본 외상 후지야마(藤山愛一郞)가 정부결정이라며 “재일한국인으로서 북한에 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렇게하도록 허가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거주지선택의 자유에 입각한 인도적 이유에서 취해졌다“는 주장으로 포장한 술수였다. 한국정부는 즉각 ”강력 반대“를 천명하고 평화선 해결을 위한 ’흥정‘이라며 한일관계에 중대파국을 초래할 것이란 경고를 발하였다.

★미국 주선으로 한일회담...’구보다 망언‘ 등 결렬 거듭

그동안 주일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를 통하여 잠정무역협정 등 당면문제를 해결해오던 한일양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1951년 10월20일 처음 직접교섭을 시작, 도쿄에서 첫 회담을 열었다. 한국측이 요구한 주요 의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재일한인의 법적지위=2차대전중 일본의 강제이주 징용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수는 약 2백만명, 종전후 대거 귀국하고도 약 60만명이 남았다. 일본은 1951년11월 신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재일한국인들은 한국국적을 갖게 하여 제한을 가하였다. 한국은 식민사적 경위를 감안, 일반 외국인과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으므로 재일한인의 기득권을 인정하여 영주권이 부여되어야 하고 재산상의 기득권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2) 선박=일본정부는 SCAP 지령과 미국정법령에 의해서 1945년 8월9일 현재 한국수역에 있던 선박을 한국에 반환하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이와 관계없는 ‘한국에 대여한 5척의 선박’ 및 ‘한국에 억류당한 일 어선’ 등의 문제를 의제로 삼으려했고, 급기야는 상선 15척 (5,610총톤), 어선9척(336 총톤) 대여선박 5척을 “한국의 해운발전을 위하여 증여”하겠다는 등 부당한 주장을 반복한다.(3) 재산청구권=한국은 일본이 빼앗아간 국보 고서적 지도원판 금괴 은괴 등의 반환과 한인소유의 일본유가증권 지불, 그리고 피고용자에 대한 미불임금의 지불 등을 요구하였다. 반면 일본은 식민지시대 재한 일본인들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 즉 ‘역청구권’을 들고나왔다.(4) 어업=한국의 수자원 보호와 어로분쟁의 방지 및 5열의 침투와 밀수 방지 등을 위해 국무원 고시 제14호로서 발표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고수. 일본측은 공해자유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고 불법적으로 평화선을 침범 어로를 강행하는 등 의도적인 분쟁을 계속일으킨다. (5) 기본관계의 수립==한-일간의 신국교 수립을 위하여 소위 한일합병조약의 무효화 등 기본조약을 추진하자고 교섭하였으나, 일본 측은 장래의 통상항해문제의 규정과, 합병조약의 ‘장래에의 무효’를 주장으로써 회담은 교착상태에 머물렀다.

◉‘구보다 망언’=결렬-휴회를 거듭하던 회담은 1953년 10월 재개되었는데 3차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久保田貫一)가 ‘망언’을 터트려 4년간이나 파탄을 맞는다. 구보타는 10월15일 재산청구권위원회에서 일본의 재산권을 들고 나와 한국측 홍진기 대표와 심한 언쟁을 벌인다. 홍 대표는 "한국내 일본의 재산은 미 군정의 법령 33호에 의해 이미 접수되어 끝난 문제다. 본래대로 하자면 한국은 36년간의 일본지배하에서 한국민족이 받은 피해-예를들면 애국자의 투옥 학살, 한국인의 기본적 인권 박탈, 식량의 강제 공출, 노동력의 착취 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한국측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순수한 법률적 청구권만을 제출했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일본은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그러자 구보타는 "일본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고, 철도를 건설한 것, 수력발전전소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며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자극하고 나섰다. 홍대표는 “일본이 점령안했으면 한국인의 손으로 근대화했을 것”이라고 맞섰다. 한국 대표단은 구보타 발언이 회담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망언’(妄言)으로 규정, 다른 분과위원회 출석을 거부한데 이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해명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4년간 ‘잊혀진 회담’이 된다.

★‘요괴’ 기시(岸信介)의 등장...‘교포 북송’으로 역습

이승만은 한일회담보다 남북통일을 위한 전쟁이 급하다, 미국이 강요하는 휴전을 결사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외친다. 이대로 분단된채 전쟁이 멈추면 통일의 기회는 사라지므로 양면작전을 펼친다. 통일전쟁과 한미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아이젠하워는 ‘조약을 맺을 테니 휴전부터 동의하라’고 압박한다. 이승만은 “휴전과 조약은 별개의 문제”라며 밀어붙였고, ‘반공포로석방’이란 극약 카드를 던진 이승만 앞에 미국이 굴복하여 마침내 한미동맹이 이루어진다.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8월8일 경무대서 가조인된 한미조약은 10월1일 워싱턴서 정식 조인되었다. 이듬해 7월 미국에 공식초청된 이승만은 백악관에서 이이젠하워와 담판을 벌인다. ‘일본과 수교하라“는 아이젠하워에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엔 불가능“하다며 유명한 입씨름을 남긴다. 퇴장하는 아이젠하워에게 ”저런 고얀 X“을 외치며 자리를 박찬 이승만이다. 그해 끈질긴 협상 끝에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은 앞(연재 96~101)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A급 전범의 ’반전 카드‘=1957년 2월 일본 수상이 바뀌었다. 한반도와 대륙침략 및 미-일전쟁의 A급 전범(戰犯)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가 일약 전후 일본의 총리가 된 것이다. 태평양전잰을 일으킨 도죠(東條) 내각의 상공상(商工相)이던 그는 스가모형무소에 갇혀 전범재판을 받은 극우 25명중 한명인데 어떻게 출세하였을까. 전후에 공개된 일본의 기록들은 미국의 힘을 꼽는다. 한국전쟁을 휴전시킨 미국은 일본 보수세력을 키워 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키우자고 작정한 것, 수감중인 기시에게 미국 CIA가 거액의 정치자금부터 제공했다고 한다. (허문도 [죄많은 일본] 조선뉴스프레스, 2018)냉전시대의 새로운 지형을 간파한 기시의 변신은 빨랐다. 증거불퉁분이란 이유로 석방된 그는 1급 ’친미주의자‘이다. 눈앞에는 분단된 식민지 한반도가 놓여있고 등위엔 미국의 ’일본우선주의‘가 든든하다.일본 수상 기시는 명치유신의 정한론(征韓論) 실전경험을 ’전후 한반도 경영론’으로 업그레이시켜 펼쳐낸다. 우선 교착된 한일회담의 장애물 ‘구보다 망언’을 취소시키고 그동안 고집했던 한국내 일본재산 청구권문제를 과감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한일우호관계 회복을 위해 이승만에게 특사를 보내겠다, 정상회담을 열자는 등 추파공세를 벌인다.동시에 북한 김일성을 유혹한다. 자민당은 물론 사회당 공산당 정치꾼을 앞세워 ‘북한지원’이란 카드를 던진다. 환호한 김일성은 재일한국인들의 북한 송환을 요구한다.쾌재를 부른 기시는 일본 언론을 통하여 여론화하는 한편, 국제적십자자를 움직여 ‘인도주의’로 위장하고 미국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댄다. 이렇게 표면화시킨 것이 후지야마 외상의 ‘재일한인의 북송 선언’이었다. 기시의 놀라운 변신은 일본내 평자들로부터 가히 ‘쇼와(昭和)의 요괴’(妖怪)급이란 평까지 얻을 정도였다.

◆이승만 격분 ”배상은커녕 공산 노예로 추방, 방관 않겠다“

일본의 표리부동한 술책에 대하여 격분한 이승만은 AFP통신과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외교적 표현으로 농축된 이승만의 대일관계 인식을 요지로 읽어보자.“한국 동포들을 북한으로 송환하려는 일본의 처사에 대하여 자유세계의 우방들이 이를 용인하리라고는 생각지않는다. 우리는 일본이 이들 한국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사취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우방의 지원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들에 대한 부당한 조치를 방관하지는 않겠다. 일본이 한국인들을 공산주의 노예상태로 몰아넣으려고 위협하고 있으며 이전의합의사항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조치를 위협함을 계기로 한일회담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이 그들도 승인하지 않고 있는 침략적이며 불법적인 정권이 장악한 지역으로 송치하려는 한국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 대부분은 일본이 전쟁중 강제노동자로서 끌려간 사람들이다. 도합 2백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일본 및 그밖의 다른 점령지역으로 강제동원되었던 것이며, 그중 많은 사람들의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일본은 지금까지 이들 한국인들을 노예와 같이 가축처럼 취급하여 왔으면서 이제 와서는 10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을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으로 보내는 동기가 인도주의에 있다고 운위하고 있다. 일본은 재일교포를 취급함에 있어서 인도주의를 표시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한 한국동포들에 대하여 일본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지난 수년간 일부 불법입국자들을 포함 1천5백 내지 2천명의 한국인들은 재판에 회부됨도 없이 집단수용소에 투옥당하였다. 다수는 수개년간 감옥에서 보내고 다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대우를 받아 옥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엔 부녀자들도 포함되어 있다.이와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의 죄과가 갑자기 인도주의라고 하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우리는 이와같이 학대 받은 동포들이 한 푼의 배상도 없이 제거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진의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이 가져간 한국의 문화재 고서 금화 선박 및 기타 재산을 일본이 반환할 것으로 믿는다. 현재로서는 평화선 및 어로문제에 관하여 양보할 계획은 없다평화선에 대하여 말할 것 같으면 이 선은 양국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어로자원을 동등하게 분할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일본이 과거 40년간 이 수역의 어로권을 독점하였으며 수세기 동안 한국의 해안선에까지 진출하여 착취하였다는 사실을 참작하건대, 우리측의 조치에는 공정이상의 너그러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에 있어서와 다름없이 평화유지 또는 수역의 동등분할 등의 문제는 아랑곳없이 모든 것을 독점하려 들고 있다. 유감된 일이나 우리는 아직껏 일본을 신임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신해야할 이유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할 처지에 있다.이것은 과거의 복잡한 문제들과 관계없이 현사태를 평가한 것이다. (중략)...일본이 한국의 독립-주권을 존중하고 한국을 모든 관점에서 평등한 것으로 간주해야됨을 표시할 때까지 보다 완전한 해결책을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일본이 재일교포의 신분협정에 관하여 우리와 협의하고 그 협정체결에 도달하는 것과 한국재산의 반환, 그리고 양국의 공동이익을 보호할 동해 어로협정을 일본이 수락함으로써 분쟁 유발없이 이익을 나눌수 있을 때까지 평화(평화선)를 보존해야하는 전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후략)” ([조선일보] 1959년 2월10일자)

◉숨가쁜 ‘북송반대’ 캠페인=한국정부는 연일 각의를 열고 긴급대첵 수립에 분주하다. 국회는 북송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고 북송반대 전국위원회가 결성되어 서울운동장을 비롯한 전국에서 국민 궐기대회가 열린다. 최규하-이범석 등은 제네바로 긴급 파견되어 국제적십자위원회(이하 ‘국적’)가 북송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제네바에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국적의 ‘불관여’ 보장을 얻고자 미국이 개입해달라는 로비도 펼친다. 한편, 일본적십자와 북한적십자도 제네바에서 비밀접촉을 서둘러 ‘인도주의에 입각한 북송’의 구색맞추기에 들어간다. 국적 위원장도 제3자의 입장을 공표하고 시치미를 뗀다.문제는 미국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한 다울링 대사는 “거주이전의 선택의 자유”를 내세워 ‘평화적 해결’을 주문하고 나섰다. 급기야 미국이 일본 편에 선 것이었다. 즉, 재일한국인들이 공산북한이나 마찬가지로 남한으로도 귀환할 자유선택권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국적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미국은 강경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국군에 대하여 “작전권은 유엔군에 있다”며 제동을 걸기까지 적극적으로 한국의 저항을 묶으며 일본을 도왔다.마침내 밀약에 합의한 일본-북한은 적십자위원회를 내세워 8월13일 인도 칼카타에서 ‘북송협정’에 조인하게 된다.

★이승만 “한국시민을 한국 승인없이는 못 보낸다”숨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강력한 입장을 천명한다. 7월26일엔 일본정부가 “국제적십자 위원회의 승인 없이도 북송 가능‘ 방침을 공개하고 븍한과 협정을 체결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일본에 있는 거류민은 한국의 시민이므로 대한민국의 승인 없이는 어느 곳으로든지 보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 국민은 일본의 노예도 북한의 노예도 될수 없다”고 못을 박은 대통령은 “북한 괴뢰는 재일교포를 받아들여 노예노동과 병력증강에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일본의 태도가 “자유대한을 파괴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호감을 사기위해 가급적 많은 재일교포의 송환하려한다”며 정면 규탄한다. “일찍이 유엔에서 공포한 바와같이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단 하나의 주권국가인 것이다. 칼캇타에서 조인한다는 것은 일본정부가 아니고 일본적십자사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동포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며 도 일본과 자유세계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일본에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일본은 얼마든지 여기서 빠져나갈 방책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일본인들이 성의를 가지고 우리와 회담을 한다면 공정히 해결이 될 기회가 될 것인데, 그리 아니한다면 우리는 한국의 이익과 우리 교포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경무대로 소집된 육군참모총장, 육군 제1-2사령관들을 비롯, 각군단장과 장성급 23명을 앞에두고 이승만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일동포를 살려내야 한다”고 다짐한다.“우리 국군은 처음 공산군과 싸웠을때보다 강해졌으며 이는 우리의 국력과 용기와 애국심을 나타낸 결정이며 지금 우리는 능력과 결심이 있으므로 남에게 고개를 숙일 때는 아니디”라고 투지를 촉구하였다. ([조선일보]1959년 7월31일자)

◉재일교포들 ‘사기 강제추방’ 고발=도쿄의 한국대표부에는 교포들이 ”서명을 강요당했다“ ”속아서 끌려갈 수 없으니 구출해달라“는 등의 폭로문과 증언들이 쏟아졌다.17일 외무부에서는 재일교포의 강제북송은 일본측이 주장하듯이 ”인도주의, 자유의사,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허울 좋은 말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일본에 있는 북한공작원들의 공갈 협박, 간계에 속아서 소위 북송희망자 명단에 서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성명헸단 교포들도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구원의 손길을 호소해 오고 있다고 증거들을 제시하였다.▲박중선씨의 서(요지)==어느날 이웃에 사는 분이 와서 외인등록증을 좀 보자고 하며 일본국회에다가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하니 서명운동에 적극협력하는 의미에서 서명을 해달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수차 부탁이 있어서 그까짓것 서명 좀 하면 어떻겠느냐 생각하고 서명하였던 것이다.(6.21일자)▲정수근씨=조총련(친북단체) 간부들의 권고로 서명하였으나 그후 자세히 살펴보니 조총 간부들은 한사람도 가는 사람이 없고 알고보니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6.21일자)▲김영기씨=미지의 남자가 방문하여 서명을 강요하므로 거절키 난처하여 응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조총련의 북한귀국서명 간계에 농락당하였다.▲김진홍씨=근처에 있는 조총련 간부가 와서 민생보호를 위한것이라면서 서명하라기에 하였더니 그것이 아니고 북한 가는 명단이었다.(6.15일자)

◆북한과 손잡는 기시(岸)의 술수...그 역사적 뿌리

그러면 일본수상 기시는 왜 재일한국교포들을 기어이 북한에 보내려 하는가. 그 역사적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너무나 길고도 깊이 박힌 뿌리가 나온다.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뻗어나와 명치유신 직후 일어난 정한론(征韓論)이 일으킨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탄의 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 정한론은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 뿌린 ‘조선침략사상’이다.1853년 잠자는 일본을 일깨운 미국의 ‘흑선’(黑船) 페리함대가 다음 해 다시 도쿄만에 닻을 내리고 에도막부(江戶幕府)에 국교를 요구하였을 때였다, 24세 요시다 쇼인은 깊은 밤 함대에 숨어들어 밀항하려다가 붙잡힌다. 고향 조슈번(長州藩)의 하기(萩)에서 자택유폐 생활중 그는 숙부가 개설했던 사설학원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청년들에게 1년남짓 시국교육을 하게된다. 조그만 다다미방에서 자신의 포부를 설파하는 그 테마가 ‘조선 침략’이었다. 왜 조선침략인가. 그것은 일본 고대사를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나왔다. AD660년 나당(羅唐)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기록한 책은 [백제서기]의 역사를 일본열도를 무대로 번안한 것, ‘일본’을 건국(AD670)한 백제왕실은 빼앗긴 조국의 역사를 ‘일본’을 주체삼아 ‘신라 정복사’로 뒤바꾸며 두고두고 분칠을 더한 책이다. 거기에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과 ‘임라(任羅)일본부’가 등장, 복수의 가면극이 실감을 더한다. 즉, 반도의 신라, 백제, 고구려는 일본의 번국(蕃國:야만극)으로 일본에 대대로 조공을 바쳤다는 식이다. 이에 심취한 청년 요시다 쇼인에게 이 가공의 드라마가 ‘조선정복’이란 침략의식으로 뿌리내리고 말았다. ”조선은 우리의 신속(臣屬)이었거늘 교만하므로 다시 조공을 바치게 하여 일본 신주(神州)의 성시(盛時)를 회복하라“ 한반도 정복의 꿈을 기록한 ‘유수록’(幽囚錄)에서 쇼인은 강대국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극복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명치유신의 이데올로기로 제공한 선각자로 떠받들어진다.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거느리고 러시아에 잃은 바는 토지에서 선만(鮮滿:조선만주)로 벌충하라“ 그 뜻을 실천한 제자들이 누구인가? 29세로 요절한 스승의 뜻을 받든 명치유신의 주역들이다.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한일합병을 감행한 총리 가쓰라 타로(桂太郞), 조선을 을사조약으로 삼킨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주권선-이익선을 주창하며 만주 중국까지 정복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민비 암살을 지휘한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미우라(三浦梧樓)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조슈벌(長州閥)-오늘의 야마구치(山口縣) 출신들이다. 한마디로 요시다 쇼인의 제자 80여명이 ‘침략 교주’의 신도들이라 할까. 그야말로 야마구치는 3국시대 이래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다.재일동포 북한추방의 주역 기시 노부스케는? 역시 야마구치 출생으로 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도 노벨상 총리, 최근 암살당한 수상 아베 신조(安部晉三)가 기시의 외손자이다.

◉한반도 분할통치 전략=시대는 변해도 이들의 조선침략과 한반도 경영관은 변하지 않았다. 남북을 분단해준 미국과 소련이 얼마나 고마운가. 통일된 한반도 파워는 일본의 최대위협이다. 이제 통째로 먹지는 못해도 남북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만이 일본의 국가목표가 되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많다. 우선 기시의 재일한국인 북한 추방이 좋은 보기 아닌가.1957년 기시를 부른 아이젠하워는 골프 라운딩을 즐기고 뉴욕 양키즈 프로야구 시구도 한다.휴전을 반대하고 한미동맹을 강요한 이승만에게 넌더리를 낸 아이젠하워는 기시를 얼싸안았고 기시는 그런 아이젠하워와 밀착하여 미일동맹을 쌍무조약으로 업그레이드 시킨다. 김일성과 내통하여 북한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며 일본사회의 ‘애물덩어리 조센징’(朝鮮人)을 ‘청소’할 기회를 잡았다. 일본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야카이모노(厄介者) 치우기‘였다, 꿩먹고 알먹기-곤궁한 북한을 지원해주며 골치 아픈 민족주의자 이승만에게 주먹을 날려 한국을 약화시키는 술책이었다. 일본의 한반도 ’분할 통치‘ 욕구도 그 역사가 끈질기게 길다. ▶제1탄은 1894년 7월 22일 청일전쟁 전야, 영국이 일본에 요구한 것--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하는 청과 일본 양국이 한성(서울)을 중립지대로 하여 일본군은 부산, 청군은 평양을 거점으로 제안한 것을 일본이 거부한다. ▶두 번째 1896년 5월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러시아 외상에게 39도선을 분할할 것을 제안했지만 러시아가 불응한다. ▶세 번째는 1903년 전운이 임박하자 러시아가 일본에게 39도선 분할을 제의했으나, 단칼에 거부한 일본이 벼르고 벼르던 러일전쟁을 감행한다. 이 모든 협상의 주역들이 야마구치 출신들이다.

이승만의 운명일까. 그가 태어난 1875년엔 일본이 미국의 페리함대의 개국요구를 흉내낸 운양호 사건이 터졌다. 강화도 진지를 박살낸 그 운양호가 바로 조슈벌이 건조한 군함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승만은 탄생부터 대통령을 사퇴할 때까지 조슈벌 정한론자들과 싸운 셈이다.

◆한일회담과 북송선 저지 실패

살벌한 북풍이 몰아치는 동해바다, 일본 니이카나 항을 출발하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퍼진다.1959년 12월14일 소련선박 두 척이 북송동포 제1진 975명을 싣고 떠나는 소리는 한반도 지배론자 기시와 북한 김일성의 야합이 환호하는 소리로 들렸다. 재일친북단체 조총련을 시켜 한일회담을 파괴하고 전쟁으로 소진된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공산당의 ’귀국운동‘은 이승만의 완강한 저지작전을 뚫었다. 당시 미국 등 세계는 한일간의 군사충돌에 긴장상태다.북송을 ’준(準)선전포고‘로 간주한다며 1년동안 몸부림친 이승만, 한국군은 비상경계태세로 돌입하고 ”소련 선박을 격침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대비하였지만 묘책이 있을리 없다. “자네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일은 벌여놓으면 해결할 길이 열리는 법이야” 이승만은 특유의 ’벼랑끝 전술‘을 이번에도 구사하려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작전은 일본의 북송센터 폭파와 니이가타행 열차와 철도 파괴공작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밀파된 비밀공작원이 폭약을 준비하면서 친구에게 누설하는 바람에 일본신문이 대서특필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어쩌겠는가. ’외교의 신‘이라는 이승만도 이번에는 미국이 한몸처럼 감싸는 일본의 ’남북한 장난‘을 더 이상 막을 수는 없는 노릇, 동해바다를 오가는 북송선을 구경할 수 밖에 없다. 그날부터 재일교포북송은 1984년까지 무려 25년간 186차례에 걸쳐 9만3,339명의 동포를 북한 노예지옥으로 강제 추방한다. 일본의 연구자들 평가대로 북한의 “지상낙원”이란 속임수를 역이용한 ’요괴‘ 기시의 간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또 하나의 조선침략이었다. (기쿠지 요시아키 [북조선 귀국사업], 이종원 [동아시아의 냉전과 한미일관계] 동경대출판회, 1996 등)청년시절부터 일본과 싸운 이승만에게 독립후 끝없는 한일회담과 북송저지 투쟁은 제2의 독립투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을 탄생시킨 북송=한반도 분리주의자 기시 수상이 북한을 도와준 또 하나의 결정적 사례를 본다. 바로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를 북송시켜준 일이다. 오사카에서 출생한 고용희(高容姬,1952~2004)는 9살 때 아버지 고경택을 따라 북송선을 탄다.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후 만수대예솔단원이 되어 뛰어난 예능활약으로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는다. 1974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은 호화파티를 즐기는 기쁨조 가운데 고영희에게 홀딱 빠진다. 결국 고영희와 동거, 아들 김정철 김정은과 딸 김여정을 낳는다. 첫째 부인 성혜림과 김정남을 둔 김정일에게 고용희는 원산특각(별장)에 ’숨겨둔 여자‘였다. 아버지 김일성이 북송교포를 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 김씨왕조의 ’백두혈통‘ 때문이다. 원산에서 김정은을 낳은 고용희는 유방암으로 51세때 프랑스 병원에서 숨진다. 뒷날 김씨왕조 3대왕이 된 김정은도 김일성을 닮았대서 그 흉내를 내면서도 김일성과 손잡은 사진 한 장 자랑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등 선전물에서도 어머니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숨겼다. 출신성분이 무서운 계급독재의 지옥, 아들이 없는 김정은의 미래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쨌거나 고용희를 북송시킨 기시는 김씨왕통을 이어주기까지 북한을 도와준 셈이다.

◆각자도생의 격랑에 표류하는 나라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가장 큰 행운은 불세출의 건국혁명가 이승만에 이어 불세출의 산업혁명가 박정희가 곧바로 바톤 터치를 했다는 사실이다. 세계 학계에서 말하는 건국기(Cycle of Nation-Building)는 통칭 30년, 이승만 12년에 박정희 18년이 ’단절없는 국가 형성기‘였다.’반일 독립운동‘ 1세대가 사라진 자리, 박정희는 전략을 급선회, 식민지배의 반성을 모르는 일본의 멱살을 잡고 일본의 힘을 이용한 국가경제 재건의 문을 열었다. 한국을 버리려는 미국의 다리를 잡고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건국과 호국, 전후 재건에 성공한 이승만이 깔아준 근대화의 철길을 단숨에 달린 박정희의 선진화 열차였다.축복 받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동안 일본의 역대정권들은 ’남북한 동시수교‘ 운운 통일을 방해하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미국은 ’America First’를 외치는 트럼프 패권주의 부활, 세계가 각자도생에 동분서주한다.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맞서 대한민국을 흡수하려는 ‘한국공정’이 완성단계로 치닫고 있다.한국의 정치꾼들은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친북-친중-친러-친일의 사대주의 난장판이 되었다.현직 대통령을 불법 감금한 무정부상태, 탄행 홍수-내란몰이에 국가자살 직전상황 아닌가.또 다시 일본과 한몸된 미국이 시진핑에 끌려가는 한국을 버린다 해도 누구를 원망하랴.이승만의 글로벌 리더십, 박정희의 핵개발을 그리워만 하고 있을 참인가.

★일본 왕의 고백...한일관계 정상화에 새로운 실마리일본 국민들에게 집단체면처럼 중독된 한국 멸시관을 뒤집을 수 있는 일본인의 발언이 몇 차례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일본국민의 우상 일본 왕이 공개석상에서 밝힌 육성이었다.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방문한 자리였다. 9월6일 저녁 궁중 만찬에서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는 만찬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돌이켜보면 귀국과 우리나라와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인국(隣國)으로서 그 사이에는 옛날부터 여러가지 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가 있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기원 6~7세기의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고, 재차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88올림픽 후 소련이 무너지던 무렵, 1990년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궁중만찬에서 새로 즉위한 일본 왕 아키히토(明仁)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한국과 상당한 인연이 있다고 느낀다. 저의 가계를 보면 모계(母系)에 한국계 인물이 있다”면서 그는 아악(雅樂)을 감상하자고 했다. 그 일본 궁중 아악은 다름 아닌 신라계 아악이었고 일본 왕도 그걸 알기에 권한 것이 분명하다.▶10년이 흐른 뒤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개막을 앞둔 2001년 아키히토가 더욱 깊은 이야기를 공개한다.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로 도읍을 옮기고 헤이안초(平安朝)를 열었던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寜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있는 것에 대해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

히로히토의 발언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일보]는 6,7세기의 한일고대사의 진실을 재조명하는 특집을 꾸미고, ‘해양왕국 비류백제’의 일본 국가형성 과정을 몇 년간 연재하며 동시에 소설가 최인호(崔仁浩)가 이를 ‘잃어버린 왕국’이란 소설로 연재함으로써 한일고대사 선풍을 일으켰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무슨 까닭인지 한일양국에서 간단한 보도로 그치고 말았다. ◉일본왕의 발언 이유는?=양국 언론도 학계도 무심했던 아키히토의 발언에 주목해야한다.명치유신이래 일본 관학(官學)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앞에서 소개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등을 내세워 “조선반도는 일본이 지배한 야만국”이란 국민교육을 통하여 한국멸시 ‘조센징’을 이데올로기화 했던 사실은 체험한 대로이다. 그러나 일본 패망후 일본학계가 뒤늦게나마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허구’임을 증명해냄으로써 바로잡히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해마다 펴내는 역사 교과서는 왜곡된 고대사로 한국멸시관을 이어나갔다. 아키히토는 이 같은 현실이 많이 불편하였을까. 전쟁중 신(神)에서 종전후 인간으로 격하된지라 비로소 왕실의 역사에 진실의 눈을 뜬 것일까. 천년을 두고 맺어진 한국과의 혈연적 인연을 지울 수도 끊을 수도 없다면 조작된 왕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황거(皇居)에 쌓여있는 고대사 기록물들을 원상복구하고 일본정부의 역사교육관을 현대적 국민의식에 맞게 고치지않으면 안된다...이것이 일본왕의 남모르는 고민이 아닐까. “역사를 바로 세워야 국가관계도 정상화된다” 이 포인트가 한일양국의 양식이 바라는 희망의 빛으로 다가온다.한국이 나서야 하리라고 본다. 한바탕 역사전쟁을 일으켜 양국의 맹목적 반일혐한(反日嫌韓)의 고질적 중독을 씻어내고 대등한 지성국가의 역사 이성을 회복하는 운동을 시작하였으면 좋겠다. 일본 왕을 초청하면 어떨까. 일본 왕의 힘으로 일본을 개조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 실마리를 잡아야한다. 각자도생의 신(新) 약육강식의 세계, 한미일 동맹에 새로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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