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김정은‧여정 남매, 덜떨어진 짓 삼가길
1983년 2월25일 수원비행장에 한 대의 낯선 전투기가 착륙했다. 도저히 대한민국 활주로에 내릴 물건이 아닌 이 항공기는 미국산도 아니요 유럽산도 아닌 소련산 미그(MiG)-19였다. 캐노피(canopy)를 열고 내린 사람은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 중 엘리트로 꼽히는 공군장교 이웅평(생몰연도 1954~2002)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적성국(敵性國)이었던 대한민국 공군 관계자들을 본 그는 “할 말이 많다. 총 쏘지 말라”며 망명의사를 밝혔다.
이웅평은 진술에서 탈북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1983년 2월25일 당시 한반도 이남에서는 한미(韓美)연합훈련인 팀스피릿(Team Spirit‧실시기간 1976~1993)이 전개되고 있었다. 해당 훈련이 실시될 때마다 북한은 비상이 걸려 가뜩이나 부실한 경제력에 맞대응 훈련을 하느라 등골이 휘곤 했다.
이웅평도 상부지시에 따라 훈련을 위해 25일 오전 10시30분께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에서 이륙했다. 원래는 여러 대로 구성된 편대(編隊)가 조를 이뤄 비행하는 게 원칙이었다. 4대가 함께 날아가는 과정에서 대열을 이탈하면 동료들에 의해 재깍 발각돼 격추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이웅평 탈북 당일에는 편대장과 이웅평 둘만 하늘을 날게 됐다. 이웅평은 25일을 탈북 디데이로 잡았다.
편대장이 앞서고 이웅평이 뒤를 따르던 도중 이웅평은 돌연 기수(機首)를 틀어 급강하했다. 최대한 지면(地面)에 바짝 붙어 피탐(避探) 확률을 대폭 줄이기 위함이었다. 뒤늦게 사각지대(死角地帶)의 편대원이 사라진 걸 알아챈 편대장은 이웅평에게 위치를 물었다. 이웅평은 “완전하다(이상없다)”고 답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웅평은 전투기가 견딜 수 있는 한계점까지 속도를 끌어올려 전속(全速)으로 남쪽을 향해 달렸다. 비로소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그는 대한민국 공군 F-5 전투기들이 요격을 위해 접근하자 주익(主翼)을 흔들어 귀순의지를 나타냈다. 활주로에 안착한 이웅평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국군 장병들에게 상술했듯 “쏘지 말라. 할 말이 많다!”고 외쳤다.
이웅평의 탈북은 북한에게 치명타였다. 공군 파일럿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자국의 주요 군사기밀을 상당수 알고 있다. 이웅평도 북한군 전쟁계획‧전술‧암호 등을 우리 측에 모조리 진술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군(軍) 체계를 완전히 뒤엎어 수정하느라 체제가 결딴 날 뻔했다. 1980년대는 북한 경제가 하향선을 그리던 시기였다. 주저앉고 또 주저앉던 북한은 결국 1990년대 중후반기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를 맞고 만다.
우리 당국은 그 보답으로 이웅평에게 무려 15억6천만원에 달하는 보로금(報勞金)을 지급했다. 1983년 당시 서울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 30평대 분양가가 약 4천만원이었다고 한다. 귀순 당해 4월14일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대적인 귀순환영대회도 열렸다.
그런데 이웅평이 1983년 3월4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탈북동기가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사회 전체의 시선을 끌었다.
기자회견 증언에 따르면 이웅평은 어느 날 함경북도 경흥군 바닷가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우연찮게 주웠다. 바로 한국 S사의 라면봉지였다. 라면이 생소했던 이웅평은 비닐 겉면을 살피다가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판매‧유통과정에서 변질‧훼손된 제품은 판매점 또는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이웅평이 나고 자라면서 배운 ‘남조선’은 악덕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무산계급(無産階級)을 무자비하게 착취‧약탈하는 지옥 같은 사회였다. 그런 그에게 ‘인민(人民)의 편의를 우선시한다는’ 라면봉지 구절은 현실에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되고도 남았다.
점차 ‘남조선’에 호기심을 느낀 이웅평은 몰래 남한의 대북(對北) 라디오방송을 청취하는 등 정보를 수집해나갔다. 마침내 “남한은 우리보다 잘 살고 자유롭다. 나는 평생 김일성에게 속고 살았다”고 확신한 그는 1983년 2월25일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기에 이르렀다.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린 이웅평은 처음에는 민주주의‧자본주의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군 소령으로 막 근무할 무렵 동료 파일럿들이 사과를 깎은 뒤 껍질을 신문 위에 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껍질이 떨어진 신문 1면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얼굴이 실려 있었다. 비록 사진일지라도 ‘경애하는 령도자’ 용안(龍顔)을 더럽힌다는 건 북한에선 일가(一家)가 멸족(滅族)당할 중죄였다. 대경실색(大驚失色)한 이웅평은 동료들을 크게 나무랐으나 이내 남한에선 ‘그래도 아무 죄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북한이 최근 휴전선을 따라 장벽을 건설 중이라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우리 정부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에 따른 인민군 장병 탈북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잘 알려졌다시피 대북방송에는 라면봉지보다 더 큰 진실의 힘이 담겨 있다.
‘자유(自由)에 대한 갈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건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Berlin Wall) 붕괴, 1983년 2월25일 이웅평 대위 귀순사건이 여실히 보여준다. 김정은‧김여정 남매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이미 전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더 이상 쓸데없고 무의미하며 덜떨어진 짓 하지 말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권(自由權)을 이제라도 보장하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인터넷 시대로 무너질 줄 알았는데 참 오래도 갑니다.
알고 보니 이북엔 인터넷이 안 들어가더군요.. 인트라넷만 있을 뿐.. 금일도 한 탈북민단체 인터뷰 요청해서 승락받고 내일 리포트 작성하려 합니다만... 묵묵히 헌신하시는 분들... 안타깝습니다. 언제쯤 저 붉은 땅이 태극기로 휘날릴 수 있을지.
선생님 말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참 오래도 갑니다. 저 대북정보질 할 땐 무단히도 참 그렇게 통일 발판 마련 시도가 있었는데.. 김정일이 저리 편히 갈 줄은.
스타링크에 기대를 겁니다.
저도 안 그래도 엊그제부터 스타링크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째 통하는 게 있네요 선생님과. 스타링크가 별도 단말기 수신기가 아닌 기존 폰으로도 서비스 받을 수 있는지, 또 북한에 보편화된 이북산이든 이집트산이든 중국산이든 폰들이 그 서비스에 부응할 기능을 갖추고 있는지, (예산은 뭐 다른 데서 댄다고는 합니다만) 그거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거만 되면 김정은이는 끝이지요.
막을수록 뚫고 싶은 게 인간 본성이라 분명히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골칫거리가 될 겁니다.
중러가 위성요격미사일 스타링크에 쐈다간 전쟁하자는 거니 그러진 못 할테고.. 다 같이 죽자는 소리밖에 안 되니. 9.11테러 때 전세계가 어찌 움직였는지 알 테니. 뭔가 대응을 한다면 전자전으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워싱턴과 머스크씨가 알아서 대응 잘 하겠죠. 우리가 뭐 개입할 수도 없고. 물론 우리도 우방이니 정보 달라할 건 하고 협조할 건 적극 하고요. 남 얘기가 아니니. 여긴 우리 땅이니. 고견 감사합니다.
정람 생명력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