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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파라오 아케나톤의 이야기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前 광역단체장, 역사의 평가 두렵지 않나

 

고대이집트(Ancient Egypt)는 ‘기원전 6000년경’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문명(文明)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에 태동했다.

 

선(先)왕조 시대 이집트는 나일강(Nile R.) 중류의 상이집트(Upper Egypt), 하류의 하이집트(Lower Egypt)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던 게 기원전 3150년 무렵 제1왕조 초대 파라오(Pharaoh‧왕) 나르메르(Narmer)에 의해 통일됐다. 통일 이집트왕조는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사망 시기인 기원전 30년까지 약 3000년 간 존속했다.

 

고대이집트가 주목받는 건 호랑이 끽연하던 시절임에도 파피루스(Papyrus) 등에 상세히 기록된 역사 때문이다. 당대 사관(史官)들은 문헌(文獻)상 확인되는 세계 최초의 근로자 파업,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 “단순암기에만 능하다” 등 당대 정치‧사회‧문화의 세세한 것 하나하나를 후대에 남기려 노력했다. 일반 이집트인들도 피라미드(Pyramid) 등의 안 보이는 구석구석에 ‘일은 힘든데 봉급은 쥐꼬리’ ‘어제 과음하고 피라미드 공사장 땡땡이쳤다’ 식의 익살스런 낙서들을 알게 모르게 남겼다.

 

고대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면 단연 이집트 신(新)왕국 18왕조의 12대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un‧생몰연도 기원전 1341~기원전 1323)이다. 그는 인신공양(人身御供)으로 악명 높았던 동아시아 상(商‧은)나라와 동시대 사람이며 전설상의 사건처럼 여겨지는 트로이전쟁(Trojan War)보다도 약 200년 앞서 태어났다.

 

이 소년 황제는 생전엔 그저 별 볼일 없는 흔한 ‘파라오1’이었다. 허나 사후(死後)에 그 묘지가 거의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발견돼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1874~1939)는 귀족이자 거부(巨富)였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1866~1923)의 후원을 받아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발굴에 나섰다. 수년의 시간이 흐른 1922년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자 허버트는 지원을 끊으려 했다. 카터는 “딱 한 번만” 사정하며 마지막 조사에 나섰는데 그 때 기적처럼 발견된 게 투탕카멘의 묘지였다.

 

세기(世紀)의 발견 앞에 영국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허버트는 카터와 함께 투탕카멘묘의 첫 입장객이 됐다. 두 사람은 무덤 안을 가득 메운 엄청난 보물들에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은 수천년 전 숨진 소년 황제의 생전 외모를 그대로 담고 있어 허버트‧카터의 넋을 앗아갔다. 허버트는 투탕카멘의 미라(Mummy)와 부장품(副葬品)들을 영국으로 반출하려 했으나 이집트 당국에 의해 저지됐다. 투탕카멘은 2024년 지금도 왕가의 계곡에 머물며 자신을 보러 온 전세계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투탕카멘의 후광(後光)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투탕카멘의 생부(生父)였던 18왕조 10대 파라오 아케나톤(Akhenaten‧?~기원전 1336)이다. 그의 존재는 1907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된 신원(身元)을 알 수 없는 미라 KV55가 2010년 DNA 검사 및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아케나톤임이 확인되면서 입증됐다.

 

이집트 카이로 남쪽 약 300㎞ 지점에서 발견된 점토판문서 아마르나문서(Amarna tablets) 등에 의하면 아케나톤은 역사상 최초의 일신교(一神敎) 주창자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기존의 다신교(多神敎)를 폐지하고 태양신 아톤(Aton)만을 숭배하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도입했다.

 

현대 학계는 아케나톤의 개혁을 두고 무슨 거창한 대의(大義)가 목적인 게 아닌 사관 역할도 겸했던 신관(神官)들 힘을 줄여 자신의 독재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보고 있다. 흔히 헐리웃영화의 영향으로 고대이집트는 파라오가 절대권력이었던 국가로 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술한 세계 최초의 근로자 파업이 기원전 1152년 발생하기도 했고 람세스3세(Ramses Ⅲ)는 이를 유혈(流血)진압하는 대신 밀린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평화롭게 해결했다. 상술한 대로 이집트 시민들이 무려 임금의 무덤인 피라미드에 낙서를 하고 당국은 이를 그냥 묵인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느슨하고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아케나톤은 “이런 구습(舊習)의 애완견들” 꾸짖듯 신관들을 억압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에 별 쓸데없는 이유로 거위 그림이나 어머니 등의 단어를 금지시키는 등 ‘똥군기 교육’ 즉 공포정치를 일삼았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아케나톤은 외세(外勢)에는 “평화 평화” 외치며 겁먹은 개처럼 철저히 비굴하게 굴었다. 소아시아에서 발흥(發興)한 신흥세력 히타이트(Hittite)가 무서운 기세로 정복전쟁에 나서자 이집트의 많은 속국(屬國)들은 동요했다. 실례로 소국 비블로스(Byblos)는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자 아케나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도와 달라 호소했다.

 

하지만 아케나톤은 “더러운 평화가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는 식으로 고개 돌렸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이 몸집이 커진 히타이트는 약 100년 동안 이집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19~20세기 이집트 연구가 상당수는 아케나톤에 대해 “명장(名將) 몇 명이면 해결될 일을 평화에 집착하다가 일을 망쳐 후세에 큰 혼란을 남긴 자”로 평가했다고 한다.

 

방구석 여포로 군림하던 아케나톤은 결국 사후에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이라는 중형에 처해졌다. 아들 투탕카멘이 새 파라오가 된 이후 이집트 조야(朝野)는 대대로 아케나톤을 자국 역사에서 지워나갔다.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릉(王陵)에서 아케나톤의 이름을 파내는 건 물론 역대 파라오가 기록된 왕명록(王名錄)에서도 아케나톤을 없던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아케나톤의 시신이 ‘미라 KV55’로 명명(命名)됐다가 2010년에야 신원이 확인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북(對北)송금’ 혐의로 기소된 전직 광역단체장이 최근 “언론은 검찰의 애완견”이라 맹비난했다고 한다. 해당 인사가 소속된 정당은 ‘판사 탄핵’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독재자 예행연습(나경원)” 등 비판이 속출한다. 황금의 문명을 이룩했던 화려한 고대이집트에서 아케나톤은 역적 중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소외당했으며 그 평가는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대판 사관들을 애완견에 빗댄 전직 광역단체장을 향후 수천년 역사가 어찌 평가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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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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