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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생매장 피하려다 운석 헤딩한 순장조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용산‧내각 새 요직에 여러 인사 하마평

만약 잘못이 있다면 유종의 미 거둬야

 

순장(殉葬)은 지배계급 사망 시 그를 따르던 이들을 자발 또는 강제로 생매장하던 풍습이다. 서구권에서는 바이킹(Viking‧비킹)이 순장 풍습을 가졌으며 동양에서도 순장은 각 국에서 행해졌다.

 

순장은 선사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인들은 진지하게 사후(死後)세계를 믿었기에 저승에서도 사자(死者)를 수발 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동아시아에서 순장 기록이 처음 나타난 건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의 상(商‧은)나라 때다. 갑골문(甲骨文) 등에 의하면 상족(商族)은 아이들까지도 산 채로 또는 숨을 끊어서 함께 묻었다.

 

기원전 1046년 건국된 주(周)나라 대에 들어 순장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점차 형성됐다. 특히 유가(儒家)는 무고한 인명을 해치는 순장을 매우 증오했다. 주나라에서는 사람 대신 용(俑)이라는 인형을 쓰는 현상이 등장했다. 훗날 진(秦)나라의 병마용(兵馬俑)도 그 연장선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을 파묻는 풍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목공(秦穆公‧생몰연도 ?~기원전 621)을 따라 죽은 사람은 무려 177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당대의 군자(君子)들은 “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나 맹주(盟主)는 되지 못했다. 백성을 버리고 어진 신하를 순장했기 때문이다”며 혀를 찼다.

 

순장은 춘추전국(春秋戰國)‧진‧한(漢)‧삼국(三國)‧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등을 거쳐 서기 6세기 수(隋)나라에 접어들어서야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자취 감췄다. 춘추전국~위진남북조 사이에도 순장은 종종 행해졌으나 고대처럼 주술적 의미는 아니었다. 순장은 정적(政敵)을 제거하거나 선황(先皇) 재임기간에 국정(國政)파탄 책임이 있는 자를 처벌하는 의미로 행해졌다.

 

잠깐 사라졌다가 거란(契丹) 등의 제국 형성 시기에 재등장한 순장도 마찬가지의 목적이 다분했다. 대표적 사례가 서기 916년 요(遼)나라를 건국한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황후 술률씨(述律氏‧879~953)의 순장 파티였다.

 

교육부 산하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 동북아역사넷의 중국정사외국전(中國正史外國傳)에 의하면 야율아보기는 926년 조락(殂落)했다. 제위(帝位)는 술률씨의 아들인 태종(太宗)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이어받았다.

 

술률씨는 제장(諸將)들의 처를 불러 “나는 지금 과부가 됐는데 그대들이 어찌 지아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꾸짖었다. 그리곤 장수 100여명을 죽인 뒤 “지하에서 선제(先帝)를 모실 수 있을 것이다” 차갑게 말했다. 이후에도 술률씨는 잘못이 드러난 이가 있으면 목엽산(木葉山)으로 보내 야율아보기의 묘수(墓隧)에서 제거한 뒤 “지하에서 선제를 뵙게 해주겠다” 을러댔다.

 

순장 리스트에는 조사온(趙思溫‧?~939)이란 이도 포함됐다. 그는 한족(漢族) 출신으로서 본시 연(燕)나라 소속이었다. 이후 후당(後唐)에 투항했다가 다시 요나라에 항복해 야율아보기 휘하에서 복무했다. 거란의 발해(渤海) 정복에서도 앞장서서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했다.

 

조사온은 목엽산행(行) 편도 티켓이 배달되자 가지 않기 위해 기둥 붙잡고 버티면서 발버둥 쳤다. 술률씨는 “그대는 선제의 친신(親信)을 얻었는데 어찌 뵈러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조롱했다. 주변에 의해 기둥을 쥔 손가락이 하나 둘 펴지기 시작한 조사온은 돌연 “(선제와) 친하기로는 후(后‧술률씨)만한 분이 없는데 어찌 먼저 가지 않으시오?!” 따졌다.

 

논파할 수 없는 돌발질문에 술률씨는 일순간 당황했으나 이판사판 아사리판이었기에 다음과 같은 폭탄발언을 했다. “나도 당연히 지하에서 선제를 모시고 싶으나 아아 어찌하랴 내겐 돌봐야 할 자식이 있는 것을. 너는 그냥 이 길로 안녕히 가고 나는 대신 내 팔을 잘라 선제께 바치리라” 그리곤 정말로 식칼을 꺼내 제 한쪽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조정대신들이 하도 간곡히 간언해 조사온은 결국 풀려났다. 아마 조사온 선에서 순장 릴레이를 끊어야 자신들도 내일 뜨는 해를 기약할 수 있었기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명확치 않으나 엄한 손목만 날린 술률씨는 룰루랄라 달아나는 조사온을 보면서 이를 갈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사온의 고 투 헬 익스프레스는 천명(天命)이었던 것일까. 원(元)나라의 재상 탈탈(脫脫) 등이 저술한 요사(遼史)에 의하면 조사온은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날 대기권을 뚫고 날아든 ‘운석’에 맞아, 로또 당첨 확률보다도 더 희박하다는 그 운석 헤딩으로, 비명 지를 새도 없이 깨꼬닥했다. “별이 뜰에 떨어졌고 죽었다”는 문구를 두고 죽음의 징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란 풀이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 운석과의 원치 않는 뽀뽀 후 급사(急死)했다는 해석도 힘을 얻고 있다.

 

22대 총선에서의 집권여당 참패 책임을 지고 대통령실‧내각 고위인사들이 사의를 표명했다. 아직 현 정부 임기가 3년가량 남았기에 ‘순장조’라는 표현에 어폐(語弊)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사실상 식물 상태가 된 정부의 새 요직을 책임질 여러 인사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미 현 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내며 속칭 ‘단물’ 다 빨아먹었던 해당 인물들이 순장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VIP 보좌 등에서 과오가 있었다면 그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잘못이 있다면 미흡했던 국정(國政) 책임을 VIP에게 다 덮어씌우는 대신 남은 정부 임기 동안 순장조로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게 도리 아닐까 소견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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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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