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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이거 무슨 사극 찍나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멀쩡한 공화국서 사극 찍다 몰락했던 원세개

21세기 대한민국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생몰연도 1859~1916)는 청말민초(淸末民初) 시기의 군벌이었다. 공화정(共和政)인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대 대총통으로서 무난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나 시대착오적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꿈꾸다 자멸한 졸장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위안스카이의 오만함과 그의 눈귀를 가린 인(人)의 장막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말기 허난성(河南省)의 지주집안에서 태어났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과거시험에 두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양부(養父)에 의해 낙하산으로 명신(名臣)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측근 휘하에 들어갔다. 1882년에는 조선(朝鮮)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벌어지자 한성부(漢城府)에 주둔했다.

 

위안스카이는 특유의 아부 능력과 통수 남발로 서태후(西太后)의 신임을 얻었다. 여러 황족(皇族)들은 이 간신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서태후가 사망하자마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섭정(攝政)이 된 순친왕(醇親王)은 위안스카이를 내쫓았다.

 

그러나 될 놈은 뭘 해도 됐다. 1911년 군주제를 뒤엎고 공화제를 세우기 위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했다. 청조(淸朝)는 어쩔 수 없이 군재(軍才)만큼은 그럭저럭 쓸 만했던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들였다. 위안스카이는 혁명진압을 위한 병권(兵權)을 한 손에 쥐게 됐다.

 

그러나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배신을 숨 쉬듯 일삼던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조정에서 자신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진군(進軍)을 멈춘 채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 쑨원(孫文‧손문)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곤 “내게 총통 자리를 넘겨라. 그러면 칼자루를 거꾸로 쥐겠다” 요구했다. 혁명군은 무력에서 열세였기에 쑨원은 공화정 유지 등 몇몇 조건만 내걸고 수용했다.

 

초대 대총통에 취임하자마자 위안스카이는 본색(本色) 드러냈다. 국민당원들을 속속 체포하는가 하면 요인(要人)들도 대거 숙청했다. 1914년엔 끝내 중화민국 의회 해산까지 단행했다. 또 새 법률을 공포(公布)해 자신의 종신임기는 물론 지위세습까지 관철시켰다.

 

막 나가던 위안스카이도 내심 민심(民心)의 눈치를 최소한도로 보긴 했다. 순천시보(順天時報)라는 신문을 매일 한 기사도 빼놓지 않고 읽은 게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대륙의 대다수 언론사는 독재자 눈치를 보느라 ‘원비어천가’를 늘어놨다. 단 하나 순천시보만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논조로 위안스카이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러한 위안스카이가 공화정이라는 현실세계를 새까맣게 망각하고서 자신을 무소불위(無所不爲) ‘천자(天子)’로 착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측근의 장난질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장남 위안커딩(袁克定)은 ‘황태자(皇太子)’가 되고 싶다는 되도 않은 욕망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다. 그는 부친이 즉위를 망설이자 전무후무한 일을 벌였다. 바로 ‘위안스카이 한 사람만을 위한 순천시보 발행’이었다.

 

여느 때처럼 어느 날 순천시보를 펼쳐든 위안스카이는 놀라 자빠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식은땀 흐를 정도로 날카롭게 자신을 꾸짖던 신문이 갑자기 “만인(萬人)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원한다” “위안스카이는 일세(一世)의 영웅” 등 찬양가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 눈을 의심하는 것도 잠시, 위안스카이는 순천시보에 전화 거는 등 전후사정 알아보지도 않은 채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기뻐 날뛰었다. 그러면서 “내 그럴 줄 알았다. 짐(朕)은 과연 진명천자(眞命天子)였다. 면류관(冕旒冠)을 대령하라” 호령했다. 위안스카이는 1915년 중화민국을 폐하고 중화제국(中華帝國‧존속기간 1915~1916) 건국을 선포했다. 홍헌(洪憲)이라는 그럴싸한 연호(年號)도 마련했다.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만백성이 새 황제의 등장을 환영하기는커녕 침 뱉고 비토했다. 분노한 쑨원은 “역적 토벌”을 외치며 군벌(軍閥)들 궐기를 촉구했다. 많은 군벌들도 이에 호응해 24시간 줄 테니 옥좌(玉座)에서 내려오라는 최후통첩 날렸다. “무슨 소리. 민심은 내 편이다” 위안스카이가 간단히 무시함에 따라 대륙에선 호국전쟁(護國戰爭)이 전격 발발했다.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의 진실’을 알아차린 건 전쟁 와중이었다. 하루는 한 하녀가 위안스카이의 딸에게 간식을 사다줬다. 그런데 그 간식을 포장한 종이가 바로 ‘진짜 순천시보’였다. 그 진짜 순천시보는 원비어천가 대신 “역적을 처단하자” 주장했다.

 

위안스카이는 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읽었던 신문 발행인‧편집인‧취재기자가 모두 장남임을 알아챘다. 뒷목 잡은 위안스카이는 아들을 불러 호되게 질책하고 심지어 채찍으로 후려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실 사태의 근본원인은 위안스카이 자신의 시대역행적 욕망이었기에 누구 탓 할 것도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점차 궁지에 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즉위를 부추기던 측근들마저도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하나 둘 등 돌렸다. 망연자실해진 위안스카이는 1916년 제제(帝制)를 취소하고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복귀했다. 모두는 “총통 자격도 없다” 하야를 요구했다. 위안스타이는 홧병 끝에 허망하게 사망했다.

 

집권여당 수장에 대한 ‘누군가’의 눈을 의심케 하는 요구가 정치권을 뒤집어 놨다. ‘누군가’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측근을 보내 대놓고 여당 컨트롤타워에게 ‘사퇴’를 압박했다고 한다. 이 같은 당무(黨務)개입은 탄핵(彈劾)행위가 될 소지가 적지 않다.

 

그간 ‘누군가’의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이 한 둘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처럼 “어명(御命)이오. 영의정은 당장 사약 받으시오” 외치듯 자기 무덤 파는 짓을 아무렇잖게 하는 것을 두고, 즉 자신이 마치 ‘전제군주’인 걸로 착각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점을 두고 많은 추측이 쏟아진다. 신자들 모아 시대착오적 가르침을 지혜랍시고 설파(說破)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세력, 그리고 이들과 결탁해 군부(君婦)를 꿈꾸는 최측근 인사가 안 그래도 뒤틀린 권력욕에 사로잡힌 ‘누군가’의 눈귀를 가리고서 조종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 및 약속대련인지 갈등 표면화인지 알 순 없으나, 분명한 건 집권여당 및 지지층 내에서 “총선 망치려 작정했나”라는 분노가 폭발 중이라는 점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지치고 넋이 나가는 건 밑바닥 당원과 국민일 뿐이다. 사극 찍기 전에 위안스카이가 어떻게 몰락했는지나 좀 읽어보길 바란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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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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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1.22

    누누히 말씀드렸지만, 제 입장은 옛 고사들에서 교훈을 얻고 그걸 현 시대에 대입해 활용하자는 겁니다. 옛날 임금신하처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무슨 이런 상식적인 것까지 설명해야 되는 좌우막론 하향평준화 현상이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