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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칼] 밑밥 깔리는 22대 총선?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칼’럼

‘강서보선 安 책임’ ‘中北 총선개입설’ 등 난무

변명말고 최종책임자가 짐 져야 반면교사 가능

 

‘38분 전쟁’

 

전쟁은 ‘자국 의사(意思)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해 국가 간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에 수행되는 조직적 투쟁’으로 정의(定義)된다. 설득이 아닌 강요이기에 전쟁에 돌입한 집단들은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임한다.

 

가장 중시한 건 단연 유‧무형 전력(戰力)이다. 손자(孫子)의 가르침처럼 집단들은 일단은 피아(彼我) 전력을 살펴 자신의 승률을 따진다. 싸워볼만 하다는 판단이 서면 최적의 감독‧선수, 최적의 무기를 전장(戰場)에 쏟아 붓는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박 터지는 전쟁은 때로는 ‘수백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영국‧네덜란드가 1651~1986년 사이 335년 동안 맞붙은, 실제 교전은 없었지만, ‘335년 전쟁(Three Hundred and Thirty Five Years' War)’이 그것이다.

 

반면 “네 꼬락서니를 알라”던 소크라테스(Socrates) 정신을 무시해 ‘단 38분’만에 끝난 전쟁도 있다. 1896년 8월27일 오전 9시2분~9시40분 사이 진행된 영국‧잔지바르 전쟁(Anglo-Zanzibar War)이 주인공이다.

 

마치 “이 술이 식기 전에” 관우(關羽)에게 목 바쳐 누상촌 돗자리파 재회‧회식 보장한 화웅(華雄)처럼, 자신의 전력 제대로 안 살피고 최악의 감독‧선수 등 택한 잔지바르는 병영 아침식사에 걸리는 시간도 채 안 돼 장렬히 거꾸러져 영국군의 따신 밥을 보증했다.

 

“우린 이미 죽어있다”

 

록그룹 퀸(Queen)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고향 잔지바르와 영국이 대결한 이 LTE급 초고속 전쟁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96년 8월 하마드 빈 수와이니(Hamad bin Thuwaini) 잔지바르 술탄이 사망했다. 새 술탄은 그의 조카 칼리드 빈 바르가쉬(Khalid bin Barghash)가 됐다. 바르가쉬는 삼촌과 달리 노예무역을 찬성하는 한편 영국을 적대시했다.

 

이에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마드(Hamoud bin Mohammed) 지지를 선언했다. “물러나라”는 최후통첩 받은 바르가쉬는 군대를 소집했다. 바르가쉬가 싸움 걸려 한다는 소식 접한 영국 측도 “그래?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며 함대를 동원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바르가쉬는 자결주의(自決主義) 외치는 독립투사로 칭송받을 만하다. 그런데 바르가쉬가 전면전(全面戰) 위해 모은 군함은 HMS글래스고(HMS Glasgow) ‘1척’이었다.

 

해당 함이 무장이라도 빵빵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글래스고는 순양함 따위가 아니라 영국 프리깃함(Frigate)이었던 걸 잔지바르 측이 사들여 왕실요트로 사용하던 중이었다. 거기에다 구닥다리 대포 2문 붙이고서 바르가쉬는 “가랏 무적함대” 의기양양했던 것이다.

 

반면 영국은 때마침 크리켓(Cricket) 친선경기 위해 인근 해역에 집결했던 순양함 3척, 포함(Gunboat) 2척을 긁어모았다. 잔지바르 지상군 약 3000명을 대적할 영국해병 900명도 차출했다. 이 정도 전력차면 당연히 우리 한국 독립군처럼 게릴라전(Guerrilla)에 주력해야 했다. 허나 잔지바르는 어리석은 바르가쉬와 그 충견(忠犬)들 탓에 바야흐로 38분만에 온 나라 기둥뿌리가 초전박살 날 준비를 완벽히 갖췄다.

 

“이건 다 늬들 탓”

 

헌데 “이번 전쟁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바로미터 전쟁” 외치며 먼저 싸움 걸고 요트에 대포 매다는 등 으쌰으쌰하던 바르가쉬는 한 가지 특기(特記)할 행동을 했다.

 

당장이라도 영국군 엉덩이를 걷어차 버릴 듯하던 바르가쉬는 돌연 잔지바르 주재 미국 대표부(代表部)에 사람 보내 “우리 좀 말려주쇼” “영국애들 설마 우리 같은 꼬마들 진짜 패려는 건 아니지?” “아아 평화롭고파” 읊어댔다.

 

이를 두고 정말로 잔지바르‧영국 사이를 중재(仲裁)해달라는 의도였다는 설도 있지만, 동시에 99.99% 확률이던 패전(敗戰) 책임을 미국에 덮어씌우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평화의 비둘기 바르가쉬님은 싸우지 않으려 했는데 혹은 열심히 싸웠는데, 저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중재 거부하고 영국과 한통속 돼 뒤에서 야합해 우리가 이렇게 진 거다”는 식으로 말이다.

 

바르가쉬는 이렇게 열심히 ‘밑밥’을 투척한 뒤 비로소 영국에 선전포고(宣戰布告)했다. 전쟁경과는 안 봐도 비디오다. 개전(開戰) 2분 뒤 쏟아진 영국 함포세례에 글래스고는 광속격침 됐다. 잔지바르군 사상자는 약 500명에 달했으나 영국군 피해는 ‘0명’이었다.

 

소속집단을 한 큐에 말아먹은 바르가쉬는 왕궁 뒤덮은 아군 시신들 밟고서 독일영사관으로 달아났다. 그는 1927년까지 탄자니아 대도시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등을 오가며 저 혼자 잘 먹고 매우 잘 살았다. 온 재산전력 시원히 말아먹은 잔지바르는 1963년 독립 때까지 찍소리도 못하고 영국식민지가 돼야 했다.

 

필자가 앞선 칼럼에서 예상한 대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국민의힘 김기현 지도부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 여권 일각에선 요설(妖說)들이 나온다. 보선패배 책임은 김기현 대표가 아닌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등이었던 안철수 의원과 나경원 전 원내대표, 심지어 오세훈 서울시장 등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내년 총선과 관련해서도 중국‧북한의 한국 선거개입 가능성 등이 제기된다.

 

필자도 중북(中北)에 의한 한국 여론조작설을 완전히 부인하진 않는다. 안 의원 등에게 보선패배 책임이 다소 있을 수 있다. 허나 보선‧총선 패배는 오로지 이들 때문이라는 식의 태도는 지양(止揚)돼야 한다. 만약 최악 결과 나온다면 최종책임자가 모든 짐을 짊어짐으로써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남는 건 바르가쉬식(式) 폭주에 따른 집단의 총체적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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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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