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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명 덕에 배부르다는 이들

오주한

아수라장‧난장 與, 李 없었다면 진작에 급변사태

韓 과오 李 되풀이하는 사이 與 정신줄 붙들어야

 

하극상으로 일어서다

 

한(韓)나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난립한 국가 중 하나다.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나라를 세운 한씨(韓氏) 가문은 본시 주(周)나라의 제후국 진(晉)나라를 섬기던 경대부(卿大夫) 계층이었다. 주나라 봉건(封建)시스템은 주천자(周天子‧왕)가 여러 제후국(공작‧후작 등) 거느리고, 제후들은 다시 경대부를 신하로 부리며 영지(領地)를 하사하는 구조다.

 

허나 기원전 5세기경 한씨는 또 다른 경대부인 조씨(趙氏)‧위씨(魏氏)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중항씨(中行氏) 등 타 경대부들을 정리하고 진나라 땅을 나눠 갖는다.

 

세 사람의 영수(領袖)였던 진나라 공족(公族)은 곡옥(曲沃) 등 두 개 ‘마을’만 다스리는 초라한 신세가 됐다. 열공(烈公) 희지(姬止) 등 후대 진 공족들은 한 때 수하였던 한‧위‧조 세 가문에 ‘문안인사’ 드리러 다니는 비참함을 겪었다. 유공(幽公) 희류(姬柳)는 첩과 놀아나던 중 아예 위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주천자는 제후국에서의 이러한 하극상(下剋上)을 위엄으로 꾸짖고 병마(兵馬)로서 벌 줄 책임이 있었다. 허나 주 왕실은 이미 춘추시대(春秋時代) 때부터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들도 진나라처럼 낙양(洛陽) 등만 다스리는 도시국가로 전락해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었다. 주나라는 춘추시대 직전에 이민족 서융(西戎‧견융) 하나 당해내지 못해 천도(遷都)함으로써 ‘종이호랑이’라는 점을 만천하에 광고했다.

 

결국 주천자가 삼진(三晉) 분할을 무기력하게 승인함에 따라 한나라는 미승인국 때를 벗고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하나로 우뚝 선다.

 

천하가 완벽히 무주공산(無主空山)임을 목격하고 힘이 곧 시대의 미덕(美德)임을 자각한 각지 제후들은, 춘추시대 때는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유지하던 패자(霸者)에 의한 존왕양이(尊王攘夷‧천자를 받들고 외세를 물리친다) 이데올로기를 쓰레기통에 완전히 구겨 넣고서, 굶주린 이리떼마냥 서로를 잡아먹는 전국시대를 개막한다.

 

제대로 임자 만난 논두렁건달

 

제후국이라 쓰고 독립국이라 읽게 된 한나라도 “경축 전국시대” 외치며 천하쟁탈 장도(壯途)에 올랐다. 당초 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나라가 과거 속했던 진나라는 말 그대로 중원(中原)에 알박기했었다. 따라서 나라는 부강(富強)했으며, 이 국력 일부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한나라 파워도 무시 못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375년 중원에 위치했던 소국(小國) 정(鄭)나라를 쳐서 무너뜨리고 호화찬란한 정나라 수도 신정(新鄭)으로 천도했다. 기원전 355년에는 법가(法家) 사상가인 신불해(申不害‧생몰연도 ?~기원전 337)를 기용해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했다. 군대도 10만 단위로 소집해 전원 무장시키고 밥 지어 먹일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난세에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 한나라는 곧 서쪽의 강국 진(秦)나라와 충돌하게 됐다. 그리고 한나라에겐 절망적이게도 진나라엔 희대(稀代)의 명장 백기(白起‧?~기원전 257)가 있었다.

 

백기는 말 그대로 ‘무패(無敗)의 용사’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등에 의하면 백기는 패배라곤 모르는 사나이였음은 물론,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도합 ‘수십만~100만 이상’의 목숨을 취했다. 백기의 제물 중에는 한나라도 당연히 포함됐다.

 

학살왕 백기의 범죄행각 규모는 설왕설래(說往說來) 오가지만, 기원전 319년 진나라는 백기 앞세워 한나라를 공격해 그 병사 ‘15만’을 참살(斬殺)했다. 위기 느낀 ‘삼진 브라더스’ 중 두 나라 즉 한‧위는 모처럼 연합해 이듬해에 진나라와 한판 붙었다. 한‧위가 동원한 병력은 24만이었다. 그러나 호기롭게 무용(武勇) 뽐내던 이들도 백기의 한주먹에 깨강정이 됐다.

 

삼진 브라더스 아우들이 일방적으로 얻어터지자 급기야 맏형 조나라가 팔 걷어붙였다.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長平大戰)에 조나라가 동원한 병력은 호왈(號曰) ‘45만’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수십만 장정(壯丁)이 한 사람씩 침만 뱉어도 진군(秦軍)은 수몰(水沒)될 판이었다.

 

하지만 백기는 조군(趙軍) 대장이 백전노장(百戰老將) 염파(廉頗)에서 풋사과 조괄(趙括)로 바뀐 틈을 타 조군을 대파했다. 조군 45만 중 생존자는 심부름 겸 군심(軍心)위로 겸 종군(從軍)했던 15세 이하 동자(童子) 200여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혀 죽었다. 전치 몇 주 진단받고 병원 링거 맞던 한‧위 브라더스는 이 긴급속보에 “망했다” 좌절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말아잡숫기 전까진”

 

한‧위‧조 세 하룻강아지는 용병(用兵)의 달인 백기의 호랑이울음에 깨갱했다. 특히 한나라는 백기(白旗) 내걸고서 진나라 속국(屬國) 처지가 됐다. 실례로 진소양왕(秦昭壤王)이 눈을 감자 타국들은 경대부 계층을 조문(弔問) 보냈다. 반면 한나라는 임금이 직접 문상해 영정(影幀) 앞에 분향(焚香)했다. 한나라는 바야흐로 칠웅 중 최약체로 전락했다.

 

“이판사판” 이를 간 한나라는 머리 숙이는 한편 진나라 삶아먹을 방책을 은밀히 연구했다. 머리 쥐어짜낸 결과 나온 게 “고급간자(間者‧간첩)를 진나라에 파견해 진왕 영정(嬴政‧기원전 259~기원전 210) 즉 훗날의 시황제(始皇帝)를 꾀어 그들 국력을 급속도로 소진시킨다”였다.

 

발탁된 고급간자는 정국(鄭國)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에서 그 이름 알아주는 한나라의 유명 운하(運河)기술자였다.

 

정국은 하고 많은 변명 중 하필 “내가 성추행범이요. 궁녀(宮女) 희롱하다 쫓겨났소” 선전하며 진나라로 향했다. 진나라는 외국인을 적극 등용해 국력을 확장 중이었다. 초(楚)나라 출신 이사(李斯)의 “태산(泰山)은 한 줌 흙더미도 사양 않기에 높음을 이루고, 하해(河海)는 하잘것없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기에 깊이를 이룬다”는 간축객서(諫逐客書)도 이 시기에 나왔다.

 

자연히 인재에 목말라하던 영정은 자칭 성범죄자라는 정국을, 오늘날 같으면 엄벌 처해야 마땅하나, 맨발로 뛰쳐나오다시피 하며 반겼다. 정국은 물길을 끌어오는 관개(灌漑)시설 즉 정국거(鄭國渠)를 만들면 관중(關中) 일대를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 호언(豪言)했다.

 

정국의 목적은 실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인 대규모 수리(水利)시설 세워 진나라 등골을 빼먹는다는 것이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지 영정은 “옳소” 외치며 그 즉시 국고(國庫)를 털었다. 정국은 “이제야 ‘진나라 원쑤놈들’ ‘진제(秦帝) 제국주의자들’ ‘천하의 개쌍놈들’ 귀싸대기를 로동혁명으로 올려칠 수 있겠구나” 쾌재 불렀다.

 

돈과 사람과 물자 갈아 넣는 대역사(大役事) 끝에 정국거가 차차 완성되자 정말로 진나라엔 일대광풍(一帶狂風) 몰아닥쳤다. 진나라 백성들은 “아아 이젠 움직일 기력도 없어” “아아 이대로 이별하고 싶진 않아” 부르짖었다. 음흉한 미소 띤 정국은 굶주린 배 부여잡고 속칭 노가다 시달리다 널브러져 있을 사람들 구경 위해 거리로 나갔다.

 

정국 눈앞엔 참혹(?)한 광경 펼쳐졌다. 백성들은 너도나도 부른 배 부여잡고 드러누워 “아아 배 터져서 죽을 것 같아” “소화가 안 돼 걸을 힘이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일부는 너무 밥을 잘 먹은 나머지 이 쑤시며 식후(食後) 자판기커피 마셔댔다. 고급레스토랑 찾아 스테이크 썰다가 미처 고기반찬 다 못 먹고서 코앞의 잔반(殘飯)과 작별해야 하는 아이, 이러한 자식을 지켜보는 어미는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한 식탐(食貪)에 다 같이 울부짖었다. 이보다도 더 배부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무속‧처가’ 與, 李라는 요행수만 바라지 말아야

 

후두부(後頭部) 얼얼해진 정국은 이 쑤시는 사람들 사이로 개나리스텝 밟으며 도주하다가 붙잡혔다. 그 때 이미 진나라는 정국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영정 앞에 끌려간 정국은 “그래 나 간첩이다” “네놈들 모가지 따러 왔수다” 실토한 뒤 “그래도 정국거가 있으면 진나라엔 큰 이익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럴싸한데” 생각한 영정은 정국의 목을 어깨 위에 붙여 놨다.

 

이미 효험(效驗) 보였던 정국거는 완성 후 정말로 진나라 국력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황무지에서 옥토(沃土)로 변한 관중은 통일전쟁 과정에서 진나라 민병(民兵) 먹여 살리는 밥줄로 기능했다. 진나라 멸망 후 한(漢)나라를 세우는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이 상전옥답(上田沃畓) 확보함에 따라 강력한 패왕(霸王) 항우(項羽)와 장기전 벌여 승리할 수 있었다.

 

한나라의 야심찬 카드 역효과 배경엔 그들 조정의 무지(無知)가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일설에 따르면 한나라의 주식(主食)은 좁쌀(조)이었다. 조는 쌀‧밀 등에 비해 농수(農水)가 상대적으로 덜 필요해 밭에서도 키울 수 있다고 한다. 허나 진나라 주식은 밀 등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한나라는 “쟤네도 우리처럼 조밥 먹겠지” 지레짐작하며 좁쌀농사에 크게 필요 없는 대규모 관개수로(灌漑水路) 만들게 해 진나라 살림 말아먹으려다, 도리어 진나라 밀싹만 우람하게 키워준 꼴이 된 것이었다. 한나라는 결국 기원전 230년 진나라에 의해 전국칠웅 중 첫 타자로 아웃되는 대기록 세우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단식(斷食) 등을 통해 대여(對與)투쟁에 나서고 있다. 허나 일본 후쿠시마(福島)원전 방류수(원전수)로 인해 우리 국민 다 죽는다는 취지의 민주당 주장 무색하게, 단식 전 전남 목포의 한 횟집에서 해산물로 식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필자가 앞선 칼럼에서 예상했던 대로, 이 대표는 단식 도중 몸을 돌려 무언가를 신속히 입에 털어 넣는 장면 포착돼 물의 빚기도 했다. 환갑(還甲)인 이 대표의 상시복용 의약품일 수도 있지만, 여권(與圈)에선 모 전직 영부인의 ‘진주반지 돌리기’ 스킬이 연상된다는 지적 쏟아진다. 이 대표는 11일에는 국방장관 탄핵 카드도 꺼내들었다.

 

이러한 행보에 국민의힘 일각에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전 미국 대통령이 했다는 발언 인용한 “저 XXX는 우리의 XXX”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예전 같았으면 정치권이 뒤집어지고도 남았을 굵직한 의혹들이 여당을 뒤덮고 있음에도 여야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하는 건, ‘이재명의 힘’ 덕분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내놓는 카드들이 그 때마다 역효과 내며 마치 정국거마냥 여당 치부(恥部)를 덮어주는 건 주지(周知)의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 ‘손바닥 왕(王)자’ ‘처가 비리 의혹’ 등 현 당정대(黨政大) 손을 들어준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여야의 도긴개긴 지지율 차이는 내년 총선 직전에 언제든 확 찢어져 벌어질 수 있다. 한나라의 정국거 실패는 진나라에게 그야말로 요행수(僥倖數)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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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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