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버리 中 단원들 수용하려다 軍 반발에 철회
‘대구전쟁’처럼 안방 내어주면 뒷감당 어려워
“너희 대구는 곧 우리 대구”
여기 천하의 대영제국(British Empire)을, 비록 영국이 털 빠진 갈비사자였다 할지라도, 당당히 이긴 소국(小國)이 있다. 아이슬란드다.
아이슬란드는 이름 그대로 국토 상당수가 얼음으로 뒤덮인 빙도(冰島)다. 당초 무인도였으나 서기 9세기 무렵 바이킹(Viking‧비킹)인 잉골프 아르나르손(Ingolf Arnarson)에 의해 개척됐다.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북유럽에 절망한 바이킹들은, 약탈을 위해 혹은 신세계를 찾아 바다로 나아가던 중이었다.
이후 10세기경 정착민 부락 간 평의회(評議會)‧의회 격인 알팅그(Althing)가 출현하고, 동토(凍土)의 첫 국가인 아이슬란드자유국(Icelandic Commonwealth)이 건국됐다. 약 300년간 존속한 자유국은 13세기 노레그(Noreg‧노르웨이)왕국에 의해 합병되면서 사라졌다.
14세기 말 다시 덴마크왕국 지배를 받은 아이슬란드는 1904년에 이르러서야 자치를 인정받았다. 공화국(共和國)으로서 완전히 독립한 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덴마크가 나치독일에 점령당했던 1944년이었다.
주권(主權)을 쟁취했다곤 하나, 2023년 기준으로도 인구가 약 37만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는 독자행동에 제약이 많았다. 관광업 등이 뜨기 전까지 아이슬란드 주력산업은 대구(大口‧Cod)잡이 등 어업이었다. 부국(富國)과는 거리 멀었기에, 국방도 2006년까지 미국에 의존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아이슬란드는 서유럽 연안국들 횡포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국이 그러했다.
대구는 제2차 세계대전 겪으면서 많은 영국인들 주식(主食)이자 소울푸드(Soul Food)로 자리매김했다. 튀긴 감자와 튀긴 대구를 신문지에 싸서 먹는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는, 지금도 노년층에겐 어려웠던 시절 허기진 배를 달래준 추억의 음식이다. 수년 전 영국정부가 잉크 등이 스민 신문지가 유해(有害)하다며 전용포장지에 피쉬 앤 칩스를 담아 먹도록 반강제(強制)했다가, 거센 항의에 직면해 타협에 나선 것으로도 알려진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2차 대전 때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영국에서 대구 인기가 어떠했을진 짐작 가능하다. 자연히 영국어선들은 넘쳐나는 자국수요를 감당키 위해 ‘대구밭’인 아이슬란드 근해(近海)로 몰려갔다. 대구는 누구 응원할 겨를도 없이 영국‧아이슬란드 그물에 정신없이 낚여 올려졌다.
그러던 중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은 1945년 “미국 주변 대륙붕(大陸棚) 자원은 모두 미국에 속한다”는 선언을 내놨다. 이전에는 대륙붕 소유권에 관한 명확한 정의(定義)가 없었다. 세계 각 국은 미국을 따라 했으며, 아이슬란드도 기다렸다는 듯 어업전관수역(Fishery Zone)을 12해리(약 22㎞)로 늘리겠다고 1958년 전격 선언했다.
“우리가 나치와 싸울 때 아이슬란드 너희는 관망만 하면서 재난을 부추기지 않았나. 그러니 어장(漁場) 좀 빌리자”는 식이던 영국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이슬란드정부에 항의서한 보낸 영국은 자국 어업선단을 호위할 구축함 등 거함(巨艦) 수십 척을 파견했다. 아이슬란드도 ‘경비정 6척’을 보내 용맹히 맞섰다.
이른바 대구전쟁(Cod War)의 개막이었다. 전세계가 세 쪼가리 나 핵전쟁 하니 마니 다투고 말렸던 콜드워(Cold War‧냉전)로 잘못 읽으면 안 된다. ‘코드워’다.
‘눈물의 동고(同苦)쇼’ 끝 승리한 아이슬란드
1차 대구전쟁(1958년 9월1일~11월12일)은 영국의 양보로 끝났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명색이 대영제국인데 ‘저 섬동네 쪼끄만 코흘리개들’ 두들겨 팼다간 국제적 위신(威信)이 설 리 없었다. 영국은 다만 “아이슬란드가 어업수역 추가확장하면 그 땐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보자”는 단서(但書)를 달았다.
허나 아이슬란드는 멈추지 않았다. 1972년 정권교체 성공한 아이슬란드 연립정부(聯立政府)는, “이 도둑놈들아, 우리 대구 내놔라” 외치며 어업수역을 50해리(약 93㎞)로 대폭 확대한다고 선언했다. 알고 보니 그곳까지 자국 대륙붕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영국은 벌컥 화내며 갖은 협박 가했다. 본격적 냉전이었기에 “아이슬란드 건드리면 소련만 좋아한다”는 미국 경고 때문에 처음부터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북미대륙‧유럽대륙 사이에 위치한 아이슬란드는 2006년까지 미군 주둔에서도 보듯 군사적 요충지다. 만약 이곳에 소련군이 진주(進駐)하게 되면 미국‧캐나다‧서유럽은 각각 좌우로 소련 중장거리탄도미사일 공격망에 포위되는 형세가 됐을 터였다.
이를 알고서 2차 대구전쟁(1972년 9월~1973년 11월) 일으킨 아이슬란드는 공세(攻勢)로 전환했다. 아이슬란드 경비정들은 영국‧서독 어선들에게 달려가 어망(漁網)을 마구 자르고 실탄으로 위협사격했다. “오냐오냐 했더니 할아비 수염 뽑네” 눈 돌아간 영국은 ‘냉전이고 나발이고’ 또다시 대규모 함대 파견했다. 이번에도 아이슬란드는 경비정 수 척과 정찰기 1대 등 ‘엄청난 전력(戰力)’으로 맞섰다.
1차전 때와는 달리 2차전에선 포격전(砲擊戰)도 벌어졌다. 고기 씨를 말리는 영국 저인망(底引網)어선에 정선(停船)명령 내렸던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영국어선이 불응 후 도주하자 탄두(彈頭) 비운 함포를 사격해 명중시켰다. 설상가상 영국선박과 충돌한 아이슬란드 경비정에서 한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일촉즉발(一觸卽發) 사태도 빚어졌다.
2차전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적극적 중재로 또다시 영국 측 패배로 끝났다. 허나 이미 양 측 감정의 골은 깊어진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휴전협정으로부터 불과 2년 뒤, 아이슬란드는 자국 배타적경제수역(EEZ)을 200해리(약 370㎞)로 선포하고서 3차 대구전쟁(1975년 11월~1976년 6월)을 일으켰다.
1975년 12월 다수의 영국선박들은 아이슬란드 경비정을 들이받는 20세기판 충각(衝角)전술에 나섰다. 이듬해 1월에도 영국 호위함 한 척이 질량을 이용해 아이슬란드 경비정을 아작냈다. 경비정이 박살난 당월(當月) 아이슬란드는 “미국이 무기를 팔지 않으면 소련에 손 내밀겠다”는 충격선언을 했다. 1976년 5월엔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영국어선에 포격을 가하고, 영국이 미사일순양함에 출격대기 명령을 내렸다.
아이슬란드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주효(奏效)했다. 유럽연합(EU) 전신(前身)인 유럽공동체(EC), 미 의회는 잇달아 “EEZ는 200해리”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 내부에서도 “대구 좀 더 잡자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꾸짖음이 이어졌다. 결국 영국정부는 “그래 우리가 대구 안 먹고 말지” 손들고 한 때 단절됐던 아이슬란드와의 국교(國交)를 1976년 6월 정상화했다.
그렇게 약 20년 동안 싸웠다 멈췄다 반복한 대구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안방사수로 끝났다. 대구들도 이 역사적 화해에 감동의 눈물콧물 흘리며 박수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中人 다 나쁜 건 아니지만, 상당수 中人은 공산당원
새만금 잼버리(Jamboree) 파행으로 졸지에 난민신세 된 각 국 스카우트대원들이 조선팔도 여기저기에 분산수용되고 있다.
그런데 10일 눈을 의심케하는 언론보도 하나가 나왔다. 정부당국이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사관학교’ 기숙사에 ‘중국대표단’ 600명을 수용하려다가, 군(軍)의 강력반발로 철회했다는 소식이다. 군은 “엄연한 군사시설보호구역인 육사에 중국국적 민간인 출입을 허용하는 건 재고(再顧)해야 한다”는 입장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숙사엔 체코‧베네수엘라 대표단이 들어오는 것으로 결정 났다고 한다.
중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경계해야 하는 건 아니다. 허나 중국인 상당수가 ‘중국공산당 당원’인 것도 사실이다. ‘중국 비밀경찰’ 존재 의혹이 공론화(公論化)된 게 불과 지난해다.
중국 대외공작이 얼마나 치밀한지 필자는 잘 안다. 필자는 지난 2011년 청와대에 중국 국가안전부(MSS) 관련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해당 자료는 이후 ‘중국 공산당의 탈북자 스파이 포섭 증거, 本誌 최초 입수’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렸으며, 지금도 인터넷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에게 육사시설을 내어주기로 했었다는 믿지 못할 보도가 나온 것이다.
대구전쟁에서 보듯, 한 번 안방 핵심시설을 내어주면 그 후유증은 수십년을 간다. 각종 정보가 MSS 등에 흘러들어갈 위험이 다분함은 물론, 중국은 향후에도 “한 번 빌린 거 또 빌리자”는 식으로 우리를 괴롭할 수 있다. 이는 아이슬란드처럼 나토 탈퇴 경고, 벼랑 끝 전술 등 ‘눈물의 동고(同苦‧국민이 괴로움을 같이 함)쇼’ 해야 겨우 해결될까 말까다.
속된 말로 ‘싸지르는 건’ 높으신 분들이지만 그 여파를 감당하고 치워야 하는 건 국민이다. 정신 차리길 바란다. 대구가 “저 아이큐 낮은 놈들” “신문지에 싸먹을 놈들” 비웃는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중국 육사 입소는 사실과 다른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사실 공산권으로서 따로 유사행사 치르는 중국이 잼버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웬만하면 안 낚이려고 늘 팩트체크 신경쓰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낚였습니다. 혼선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마 수용안하면 중공이 경제보복(예를들면 한국발 식재료 금수 조치 같은) 등의 제재를 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염려가 됩니다.
중국 육사 입소는 사실과 다른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사실 공산권으로서 따로 유사행사 치르는 중국이 잼버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웬만하면 안 낚이려고 늘 팩트체크 신경쓰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낚였습니다. 혼선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이 이번 행사에 참석을 했다는 것은 분명 무슨 흑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깜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