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에 전직 대통령 자제들과 4.19 주역들이 동참한다는 뉴스가 격세지감이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로 핵 무장한 북한의 도발에 자동 개입하게 되는 유엔사령부의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종북 주사파계열 반국가세력을 제외한 대다수 선량한 국민은 건전한 상식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애국심도 머리가 비어있으면 반국가세력의 선전 선동에 당하게 된다. 광우병, 세월호, 사드, 박근혜 탄핵, 그리고 작금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그렇다. 이승만 홀대의 이유 역시 반국가세력의 선전 선동에 있다. 한국전 발발과 종전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직후 유엔군 파병 결의를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대외적인 이유는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패퇴 후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대신 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대만의 안보리 참석을 이유로 계속 안보리에 불참해왔다.
그러나 비밀 해제된 스탈린 서신에 의하면 소련이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 중공의 모택동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유도하여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공의 힘을 동시에 빼고 모택동을 계속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미국이 유럽에 추가 전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하는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유럽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전을 제한전으로 결정하고 맥아더의 만주 폭격과 중공 해안 봉쇄, 그리고 장개석의 60만 대만군의 한국전 참전과 중국 본토 게릴라전 전개를 포함한 중공과의 전면전 요청을 거부하고 맥아더 해임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맥아더 해임 후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낸다.
“...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귀하의 계획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귀하의 이름은 세계 역사상 이 시기의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입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이 중공과의 전면전을 통해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중국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절호의 기회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추후엔 소련과 중공의 국력이 커져 종국에는 미국과 자유주의국가들이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소련이 1949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으나 개발 초기 단계이며 충분한 실전용 핵무기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극동으로의 유일한 보급로인 시베리아 철도를 공습으로 파괴하면 소련의 한국전 참전이 불가하며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련의 군수 지원 없이는 한국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 맥아더의 판단이다.
따라서 소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중국 본토 보급기지와 보급로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고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중국 해안을 봉쇄하면 중공의 해외로부터의 보급마저 차단이 되어 모택동은 오래 버틸 수 없으며 장개석의 60만 병력을 한국 및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면 미군의 추가 육군 파병 없이 해군과 공군력만으로 모택동 공산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맥아더의 전략이다.
또한 한국전을 통해 북한과 중국 공산당을 괴멸하지 않고 미국이 물러나게 되면 다음 차례는 유럽이 될 것이며 소련과 중국의 세계 공산화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확히 이승만의 전략과 상응한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2차 대전 이후 반전 분위기에 편승한 트루먼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제안을 거부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세계와 중국, 러시아의 신냉전 구도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타나는 한국전 종전 70주년 현시점의 국제정세에서 볼 때 이승만과 맥아더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0년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하고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참전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몰아낸 후 더 이상 북진을 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미국도 어쩔 수 없이 북진에 동참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말 중국 국경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한다. 그러나 곧바로 인해전술을 앞세운 백만 병력의 중국군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된다.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만주 폭격 계획을 거부한다.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 후 38선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은 교착 상태에 접어든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미국 내 반전 분위기를 타고 미국은 휴전 협상을 모색하나 이승만은 북진 통일론은 주장하며 미국과 중국, 북한의 휴전협정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고 휴전협정 서명을 거부하며 휴전을 하면 북한과 중공은 힘을 길러 다시 남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국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 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원하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홍용표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 신동아 2006.8.14.)
1953년 7월 27일 이승만의 반대 속에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과 중공군 사이에 한국전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북한과 중공의 재침을 우려한 이승만의 거듭된 요청으로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며 다음 해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국빈 방문 중 미국 의회에서 상하 양원 합동 연설을 한다.
이승만은 북한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휴전선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미국이 휴전협정을 폐기하고 한국과 대만의 장개석 정부를 도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 본토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위협에 계속 시달리게 될 것이며 핵무기 개발을 완성한 소련은 결국 미국 본토를 침략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70년 전 이승만의 미 의회 연설은 미국의 2차 대전과 연이은 한국전 참전으로 인한 피로감에서 나온 당시 미국의 반전 분위기에 묻혀 무시되었으나 역사는 이승만의 예지가 옳았음을 보여준다.
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연설뿐 아니라 전국 순회 연설을 통해 트루먼과 미 국무부 관리들의 유럽 중시로 인한 한국전의 소극적 대처는 결국 소련과 중공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길러 미국에 도전할 시간을 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다음은 돈 하원의원이 맥아더 해임 후 하원 감사장을 수여하는 결의안에 대한 제안 설명 내용이다.
“만약 한국전쟁 초기에 맥아더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였더라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한국전쟁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허용했더라면 적들은 이미 괴멸되고 세계의 세력 균형은 자유 진영에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북한 괴뢰군의 공격과 그 후 중공의 참전은 미국이 얄타와 포츠담에서 저지른 과오를 시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핵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유감스럽게 그리고 슬픈 마음으로 지적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중공과 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중공은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원자 무기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는 워싱턴에 있는 정책 입안자들이 아시아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진격 신호를 내릴 수 있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이미 1951년에 깨끗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위대한 장군은 평화를 확보하고 자유세계의 우세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워싱턴과 런던과 유엔에 있는 많은 인사들이 판단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서명 당사자인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Mark Clark) 대장은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미국 정부의 휴전을 비판한다.
“미국과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중공군이 1950년 11월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 취해졌어야만 했다. 세계전쟁으로의 확산 위험을 무릅쓰고 중공군에게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핵심 시설을 공격하겠다고 경고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단호한 결의만 있었다면 중공군을 응징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은데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실망했다. 휴전협정이 마무리되고 협정에 조인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다. 당분간 살인 행위가 중지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한반도에서 공산 침략자들을 완전히 패퇴시킨다는 결정을 한 경우보다 더 값비싼 피의 희생을 훗날에 우리 국민이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 (James Van Fleet) 미8군 사령관은 1951년 4월 부임 후 두 차례의 북한군과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수십만의 사상자와 함께 퇴각하는 적을 궤멸시키기 위해 북진을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된다. 시사 주간지 TIME은 밴 플리트를 1951년 5월 14일 자 표지 인물로 다룬다. 밴 플리트는 퇴임 후 1953년 5월 11일과 18일 주간 화보지 라이프(LIFE)에 기고한 ‘한국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Korea: From a Man Now Free to Speak)’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재임 시 못한 말을 쏟아낸다.
“1951년 봄 내가 제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에 부임한 후 6주일은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였으며 한국전쟁 중에 최고로 우리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 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개입해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전투는 정체 상태가 되었으며 길고 지루한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1951년 5월 이후 우리 정부의 정책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한반도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서글픈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왜 우리는 중공군보다도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휴전을 택했는가. 완전히 적을 섬멸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전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극성스레 고집하는가...우리는 침략자들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이 우리 손자들을 전투와 그로 인한 패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승리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은 항상 희생이 따르는 것이며 질질 끄는 것보다는 빨리 끝낼수록 더 낫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려 후퇴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는 패배자가 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현표 역 마거리트 히긴스 Margerite Higgins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War in Korea>)
밴 플리트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다.
“2년 동안 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일주일에 한 번씩 전선을 시찰하고 군 훈련소를 방문했다. 추운 겨울에 지프차로 이동하면서 내가 죄송하다고 하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늘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승만 박사는 일제 때 지어진 부산의 허름한 집에 살며 개인의 안락을 위해서는 절대로 국고를 낭비하지 않았다. 한국 관리들이 대통령 전용기 구입을 건의하자 그는 그런 돈이 있으면 적에게 퍼부을 포탄이나 사라고 호통쳤다. 지난 9년간 여러 나라 지도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승만 박사가 단연 최고였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침탈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삶을 누리다가 이승만 정부에서 민주주의를 처음 경험했다. 그러나 미국을 증오하고 부자와 토지 소유자들을 살해하여 전리품을 함께 나눠 갖자고 종용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에게 공산주의 위협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용기와 인내심을 고취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충분한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한국 국민과 사회적 규율이 부족했던 한국을 공산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의 6.25 남침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지원도 있었으나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에서 보듯이 미국의 지원은 필요조건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선 부패하고 무능한 장개석과 고 딘 디엠 정권에 대다수 국민이 등을 돌렸으나 대한민국 국민은 이승만 정부를 믿고 따랐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공산 군대에 수세에 몰리면서 패배한 후 미국에서 대통령과 고위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얘기는 중국과 베트남엔 왜 이승만 같은 인물이 없느냐는 것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력과 12년 집권은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찾아온 극심한 미소 냉전 대립의 시기에 공산주의들의 적화 야욕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을 지켜온 공로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승만에 대한 친일이니 독재자라는 평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나 그들의 추종자들이 할 수 있는 평가다.
부산정치파동과 계엄령을 통한 이승만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대한 김일영의 평가다.
“북진 통일론을 일본을 중심에 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재분단을 겨냥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약소국 지도자 이승만의 견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직선제 개헌론은 단순히 집권 연장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미국과 이승만 사이에서 야당 세력은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비호하에 이승만에게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의사에 반해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지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 쟁취를 위한 내각제 개헌이었으며 이러한 국내 정치를 전쟁 정책과 어떻게 연결시켜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내 정치와 전쟁 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안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정치를 전쟁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유일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지향 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3.15 부정 선거는 부통령에 출마한 자유당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 장면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서 당시 최인규 내무부 장관과 함께 저지른 것이며 이승만이 부정 선거와 관련이 있다거나 심지어 인지했다는 증언이나 증거조차 없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의 경쟁자인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선거 기간 중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 방문 중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은 결과적으로 경쟁자 없는 단독 출마를 하게 되어 부정 선거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이 하야한 이유는 이기붕의 부정 선거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총체적 지휘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며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 항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하며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 위에 박정희 정권이 등장해서 전 세계가 놀라는 대한민국의 고도의 산업화를 이룬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중국 공산주의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몰락하고 등장한 등소평이 벤치마킹한 사람이 박정희이며 등소평은 중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룬 공로로 기억되며 현재의 중국 번영의 일등 공신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넘어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7/02/2023070200020.html
내각제, 제정당연석회의를 위한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