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들 숙청하고 임금 갖고 논 무속환관
용산 둘러싼 ‘누군가’ 의혹 속히 정리돼야
노신(老臣) 강유의 최후
강유(蜀漢‧생몰연도 서기 202~264년)는 촉한(蜀漢)의 대장군이다. 본시 조위(曹魏) 영토인 양주(涼州)에서 말단 문관으로 일했으나 제갈량(諸葛亮)의 1차 북벌을 계기로 이직했다. 제갈량으로부터 비로소 능력을 인정받은 강유는 제갈량 사후 전군(全軍)을 통솔했다.
강유는 비록 일부 실책들도 있었지만, 내정의 장완(蔣琬)‧비의(費禕)‧진지(陳祗) 등과 보조 맞추며 촉을 방어했다. 244년 조위의 대규모 침공이 발발하자 이를 막아낸 왕평(王平)과 함께 위군(魏軍) 본대를 요격했다. 강유는 제갈량처럼 수차례 북벌에 나서기도 했다. 마치 제갈량‧사마의(司馬懿) 라이벌매치처럼 강유‧등애(鄧艾)의 일진일퇴(一進一退)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강유의 활약상은 ‘내부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제동 걸리곤 했다. ‘누군가’는 그럴듯한 달콤한 말과 아부로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눈‧귀를 흐리게 했다. 강유는 누차 유선에게 ‘누군가’를 멀리할 것을 주청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결국 촉한은 ‘누군가’의 몇마디 망발(妄發) 때문에 실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만다.
방어에 주로 치중했던 조위는 권신(權臣)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 형제 집권으로 내부 권력암투가 정리되자 263년 무렵 공세로 전환했다. 사마소는 등애‧종회(鍾會)로 정촉군(征蜀軍)을 꾸려 촉을 치게 했다.
강유는 천혜요새인 검각(劍閣)을 굳게 지키면서 종회의 대군을 막아냈다. 촉 땅인 사천분지(四川盆地)는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이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절벽에 낸 길인 잔도(棧道)를 지나 검각 등 여러 관문을 거쳐야 한다. 강유 같은 명장이 검각 등 거점을 철통방어한다면 나는 새가 아닌 이상 통과하기 어렵다.
결국 등애는 결사대를 이끌고 절벽을 굴러 입촉(入蜀)한다는 단순무식한 계획에 착수해 거짓말처럼 성공했다. 등애가 촉한 수도 성도(成都) 코앞에 나타났다는 급보를 접한 강유는 검각수비를 포기하고 회군했다.
서부전선의 강유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의 염우(閻宇), 오(吳)나라의 지원군까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기에 성도방어전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등애의 군세(軍勢)는 지치고 다친 소수에 불과했다. 강유가 촉 땅 사람만 아는 샛길로 별동대를 보내 잔도를 끊어버리고, 수성(守城)에 집중하면서, 청야(淸野)작전을 실시한다면 종회의 대군은 사천분지에 고립된 채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정세가 급변하는 그 사이 후주 유선은 ‘내부 누군가’의 사이비적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현혹돼 세월아 내월아 하고 있었다. 유선은 막상 위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부추김에 제 한 목숨 살리고자 전후사정도 알아보지 않은 채 덜컥 등애에게 항복해버렸다.
선주(先主) 유비(劉備) 때부터 시작된 400년 한나라 재건의 꿈은 ‘누군가’의 농간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촉한 문무백관들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서 통곡해야만 했다. 노신(老臣) 강유는 끝까지 촉한 재건을 도모하다가 적병 대여섯명을 베어 죽이는 분전(奮戰) 끝에 처참히 참살됐다.
신예(新銳) 나헌의 변심
나헌(羅憲‧서기 ?~270년)도 촉한의 장수다. 어려서부터 학문으로 이름 떨친 그는 태자사인(太子舍人‧태자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시관) 등을 역임하며 촉한 부흥을 이끌었다. 외교관으로서 동맹국 오나라에 파견됐을 때는 손권(孫權) 등으로부터 동량지재(棟梁之材)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진지 사후 ‘내부 누군가’가 득세하기 시작하자 강유와 마찬가지로 해당 인물과 대립했다. 상당수 백관들은 ‘누군가’를 욕하면서도 눈치 봤지만 나헌은 결코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전횡 일삼던 ‘누군가’는 나헌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외지 태수(太守)로 좌천시켜버렸다. 나헌은 도독(都督) 염우 휘하에서 동부전선을 지켰다.
종회‧등애의 남진(南進)이 시작되고 수도가 위태롭게 되자 염우는 대군을 이끌고 성도로 향했다. 나헌은 수천 병력과 함께 동부전선에 잔류했다. 그는 지원군을 끌고 오던 오장(吳將) 정봉(丁奉)에게 치중(輜重)을 보급하는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촉한은 ‘누군가’의 사탕발림‧부추김 앞에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구원대상이 사라지자 오나라 정책은 이제는 조위의 땅이 된 사천분지를 병합해 남북조(南北朝)시대를 연다는 천하이분지계(天下二分之計)로 급전환됐다.
나헌이 촉한에 미련이 있었다면 응당 정봉과 손잡고서 성도를 탈환하려 했을 것이다. 후주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한 뒤 멀쩡히 살아 있는 상태였다. 굳이 유선이 아니더라도 상당수 황족(皇族)이 여기저기 흩어진 상황이었다. 촉 땅의 민심도 한나라에 호의적이었다. 유선의 다섯 번째 아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이 백기투항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자결하자 많은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따라서 나헌은 원수 조위를 무찌른 뒤, 실낱같은 희망이라 하더라도, 구면(舊面)인 손권과의 협상을 통해 촉한 재건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필사적으로 설득한다면 적어도 오나라의 속국(屬國)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헌은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나다 망국을 자초한 촉한이 원망스럽기라도 한 듯, 오나라와의 대결을 택했다.
나헌은 “이미 한(漢)이 망했으니 오(吳)도 오래 버틸 순 없다”며 성문을 걸어 잠갔다. 나아가 ‘사마소’에게 파발을 띄워 원군(援軍)을 청했다. 나헌은 수천 병력만 이끌고 오장 보협(步協)의 대군을 야전(野戰)에서 격파했다. 오나라 최후의 명장 육항(陸抗)이 3만 병마(兵馬)를 끌고 왔지만 나헌은 이마저도 버텨냈다.
나헌은 서진(西晉)에서 중용되면서 촉 땅의 여러 인재들을 사마염(司馬炎)에게 추천했다. 그 중에는 훗날 정사(正史)삼국지를 집필하게 되는 진수(陳壽‧233~297년)도 포함됐다. ‘누군가의 농간’만 없었더라면 모두 사직(社稷)의 기둥이 되었을 인물들이었다.
배경엔 바로 ‘이 사람’
‘누군가’의 정체는 바로 어딘가 허전한 곳을 재물‧권세로 채우려 했던 환관 황호(黃皓‧?~?)다. 정사삼국지에 의하면 황호는 아첨에 기막히게 능했으며 그에 걸맞게 안 좋은 쪽으로만 기민했다. 그는 장완‧비의‧동윤(董允)‧진지 등의 치세에는 후주 유선에게 알랑방귀만 뀔 뿐 숨죽이고 살았다. 하지만 능신(能臣)들이 모두 사라지자 마각(馬脚)을 드러내 정사(政事)에 깊이 관여했다.
황제의 총애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에 강유‧나헌 등 소수를 제외하고선 누구도 황호를 건드리지 못했다. 황호는 자신에게 넙죽 엎드리는 간신들은 중용하고 충신들은 배척해 조정을 제 사람들로 채웠다. 심지어 황제(皇弟‧천자의 동생) 유영(劉永)이 자신을 꾸짖자 형제사이를 이간질해 유선이 유영을 10여년 간 멀리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황호는 강유도 누차 제거하려 했지만 강유는 군권(軍權)을 쥐고 있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황호의 ‘뻘짓’은 종회‧등애의 침입 때 클라이맥스를 이뤘다. 그는 위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강유‧나헌 등의 권한이 커질 것을 염려했다. 예나 지금이나 외침(外侵)이 있을 땐 무신(武臣)의 발언권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에 황호는 ‘무당’과 만나 푸닥거리한 뒤 “사마소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괘를 받았다며 유선에게 보고했다. 강유가 유선에게 올린 방어전략대강(大綱)은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렸다. 유선은 무당점괘를 철석같이 믿고서 풍악이나 울려댔다. 그러던 어느날 위장(魏將) 등애가 수도 외곽에 출현하자 적군 병력이 얼마인지, 상태는 어떠한지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다. 황호는 이러한 유선을 부추겨 항복토록 했다.
유선은 아들의 자결소식에도 무덤덤하게 백기를 내걸었다. 유선은 사마소가 마련한 연회에서도 웃고 마시고 손뼉 칠 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마소는 “저 따위가 황제이니 설령 제갈량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촉은 망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보다 못한 구신(舊臣)이 울 것을 조언하자 유선은 다음 연회에선 울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즙’ 짜내려 해도 나오지 않아 우는 시늉만 했다. 이 개그콘서트를 본 사마소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던가요”라고 넌지시 물었다. 화들짝 놀란 유선은 “말씀하신 그대롭니다”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황호의 장난감으로서 변인지 된장인지 가릴 줄 몰랐던 유선은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 말 그대로 안락하게 반은 유폐됐다. 반면 그의 후궁 이소의(李昭儀‧?~264)는 “이러한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극단적 선택을 했다.
당초 등애는 황호가 위험분자인 점을 꿰뚫어보고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간교한 황호는 등애 측근들에게 산더미 같은 뇌물을 먹여 사면을 이끌어냈다. 이후 행적기록은 없지만 그간 실컷 갖고 논 유선을 내버린 채 은거(隱居)해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황호에게 이용당하다 팽 된 유선의 교훈
‘용산’을 둘러싸고 ‘고속도로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한 고속도로 개통사업이 용산 내 고위급인사 A씨 특혜를 위한 것 아니었냐는 의혹이다. 논란이 일자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은 6일 당정(黨政)협의회 후 사업 전면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이를 기화(奇貨)로 당정대를 압박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일각의 화살은 원 장관 등 당정 인사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6일 한 라디오방송에서 “의혹이 사실이라면 원 장관은 옷 벗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야당에선 A씨 논란을 두고 ‘누군가에 의한 농단’ 의혹도 고개 들고 있다. 흰 옷에 긴 수염 등 외모로 알려진 ‘누군가’는 공교롭게도 지난달 9일 A씨가 충남 서천군을 방문한 이튿날 서천을 찾아 군수(郡守) 등 영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군수는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며 만남 자체는 인정했다. 야당 일각에선 ‘누군가’가 심지어 여당 공천(公薦)에도 관여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A씨와 ‘누군가’의 관계 의혹, A씨와 ‘누군가’에 의한 고속도로 의혹 등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허나 이러한 오해가 지속될수록 강유처럼 외적(外賊)에 의해 해를 당하는 인재, 나헌처럼 현 당대 지도부에 등 돌리는 인재, 진수처럼 폐당(廢黨)의 한을 품고 떠도는 인재가 속출할 수 있다.
필자는 비슷한 일을 실제 겪기도 했다. 필자가 한 때 몸담았던 모 일간지는 당초 사주(社主)를 중심으로 무난히 경영됐다. 필자가 이끈 정치사회부와 산업부‧부동산부‧경제부‧국제부 등 모든 부서는 사명(社命) 아래 일심단결(一心团结)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 신도 등이 쏟아져 들어와 분위기를 극도로 해치기 시작했다. 결국 사주가 쫓겨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필자를 포함한 상당수 구(舊) 직원들도 견디다 못해 지난해 무렵 퇴사 또는 이직하고 말았다.
국민의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닌 당원‧지지자의 공동자산(資産)이다. 바라건대 현 당정대 지도부는 소탐대실(小貪大失) 자세로 불필요한 의혹‧논란을 자초해 공동자산 소멸을 야기하지 말길 바란다. 또 바라건대 ‘누군가’에 의한 농단 하에 벌어진 강유‧나헌 등의 희생‧변심(變心)의 결말을 결단코 잊지 말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공감합니다..
삼국지 유비 왈 "조조와 반대로 하면 된다" 했건만..이짖명 문제인 쌍두로 삽질하는 이 좋은 때에 왜 이리 여권마저 어수선한지 안타깝습니다.
이거니 저거니 사고를 많이치는 거니
누구라 말은 안 하겠지만..몇년 권력 도취돼 소탐대실 해 후일 땅 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마저 사라져버린 욕망의 화신들이 홍수 나듯 범람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라떼는 라떼는 이러고 싶지 않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당이 조속히 정상화되리라 믿고 싶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