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기선제압’ 한니발과 윙드후사르
軍 시가행진, 北‧中 등 콧대 눌러놓는 계기 되길
한니발 바르카, 코끼리와 로마정복에 나서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생몰연도 기원전 247~183 또는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Carthago)의 전설적 명장(名將)이다.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에 앞서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코끼리까지 대동하고 이동한 건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니발의 부친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도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다. 하밀카르는 광물이 풍부한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 스페인의 톨레도(Toledo)는 질 좋은 철광석 산지(産地)였다. 톨레도검(劍)은 훗날 중남미를 정복한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의 주력무기로 기능했다. 1992년 올림픽 개최로 잘 알려진 바르셀로나(Barcelona) 지명이 ‘바르카’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평정 도중 전사했다. 부친의 뒤를 이은 한니발은 이베리아산(産) 무기를 기반으로 기원전 218년 로마정복을 위해 출정했다. 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의 발발이었다.
한니발의 병력은 보병 9만명, 기병 1만2000명, 그리고 37마리의 ‘군상(軍象‧전투코끼리)’ 등으로 구성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유럽의 지붕’ 알프스산맥은 산 정상에 만년설(萬年雪)이 있을 정도로 높고 험준하다. 최고봉인 몽블랑(Mont Blanc)산은 해발 4808m다. 군량‧병장기 수레만 이끌고도 건너기 힘든 이 산을 한니발은 평균체중(수컷 기준) 6톤의 아프리카코끼리를 데리고 넘은 것이었다.
사실 전투코끼리는 막상 전장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코끼리는 의외로 겁이 많기에 화전(火箭) 등 약간의 심리적 충격만 가해도 길길이 날뛰기 십상이다. 이렇게 통제에서 벗어난 코끼리는 아군 진영을 짓밟으며 쑥대밭으로 만들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성전(攻城戰)에서 큰 효력을 발휘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두께 수십㎝~수m의 성벽‧성문에 전력으로 헤딩 시 유기체(有機體)인 코끼리의 대두는 박 터지 듯 깨지고 만다. 죽지 않는다 해도 평생 돌봐야 할 심각한 중증환자가 되고 만다.
때문에 군상병과(兵科)의 장병들은 언제든 코끼리 급소를 찔러 절명(絕命)시킬 수 있도록 짧은 창을 휴대했다고 한다. 게다가 코끼리는 엄청난 덩치에 걸맞게 엄청난 양의 식량을 축냈다. 아프리카코끼리의 하루 식사량은 150~400㎏이라고 한다. 식성도 까다롭기에 마초(馬草)와는 별도의 사료도 준비해야 한다. 괜히 코끼리보다 훨씬 다루기 쉬운 말(馬)이 전쟁의 동반자가 된 게 아니다.
실은 카르타고 전략무기였던 애물단지 코끼리
한니발은 이렇듯 애물단지인 코끼리를 앞에서 머리 끌고 뒤에서 엉덩이 밀며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알프스를 넘었다. 그나마 그 과정에서 코끼리는 태반이 얼어 죽는 등 폐사(斃死)했다. 등산 내내 코끼리 엉덩이만 보며 진땀 흘렸던 카르타고 병사들이 얼마나 허무했을지는 안 봐도 느껴진다. 사기저하는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로마에는 최강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기원전 235~183년)가 버티고 있었다. 로마 중갑보병 레기온(Legion)의 팔랑크스(Phalanx) 또는 테스투도(Testudo‧거북대형)는 당대 무적(無敵)이었다. 화살비를 튕겨내며 적진에 근접한 로마군은 수백~수천명이 한 몸처럼 창을 내질렀다. 각종 영화에서 로마병사들이 전후좌우와 상부를 방패의 성벽으로 둘러싸고 전진하는 진형이 바로 테스투도다. 그리스식 팔랑크스 대형의 모습은 2007년작 헐리웃 영화 ‘300’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영화처럼 헐벗고 싸우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원정군이라는 리스크를 극복하고 놀라운 전공(戰功)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자마자 잇달아 승전(勝戰)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로마군은 나가 싸우는 대신 자국 내 곡식창고를 불사르고 우물을 메운 뒤 버티면서 카르타고 측 보급이 다하길 기다렸다. 수만명을 매 끼 챙겨먹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따라서 주효한 전략이었지만 로마시민들은 자국 군대에게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결국 로마군은 기원전 216년 8월 칸나에(Cannae)전투에서 한니발과 대치했다. 이 대결에서 한니발은 보란 듯 두 배에 가까운 로마군을 완벽히 포위‧섬멸했다. 중앙의 경‧중보병으로 로마군을 막는 사이 좌우 양익(兩翼) 기병이 적군을 포위한 한니발의 작전은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 전술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고 있다. 해당 전술은 ‘아무리 강한 쇠도 모루에 대고 망치로 두들기면 결국엔 구부러지기 마련이다’는 개념이다.
카르타고‧로마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는 사이 우리의 전투코끼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마지막 한 마리 남은 코끼리는 푸짐하게 양식을 축내고 역시 푸짐한 배변을 하며 전투하지 않는 전투코끼리로서 한니발의 ‘자가용’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니발은 왜 이 애물단지를 로마군에 떠넘겨 군량을 고갈시키거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기록에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로 ‘코끼리의 덩치’ 그 자체를 로마군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 아니었을까 하는 분석이 있다.
로마가 국가차원에서 북아프리카에 본격 진출해 지중해의 제국(帝國)으로 발돋움한 시기는 스키피오 때인 것으로 알려진다. 스키피오는 손빈(孫臏)의 위위구조(圍魏救趙‧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한다)처럼 한니발을 놔두고 카르타고 본토를 치는 ‘빈집털이’에 나서서 끝내 성공시켰다.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카르타고 등 정복 이전의 로마인들에게 코끼리는 대중적이지 않은 동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코끼리 외양만 놓고 보면 괴물도 저런 괴물이 없다. 큰 머리에 길고 날카로운 두 개의 상아(象牙), 천적이라곤 없는 생태계 최상위 맹수다운 거구(巨軀), 천지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포효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도록 한다.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도 코끼리의 험악한 인상에 따른 심리적 충격 때문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된다. ‘코끼리 과시설’이 사실이라면 애물단지 코끼리는 실은 카르타고가 지닌 비장(祕藏)의 전략무기였던 셈이다.
‘반지의 제왕’ 모티브 된 윙드후사르
군대의 위용(威容)이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사례는 또 있다.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는 16~18세기 존속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의 정예기병대였다. 보병 장창방진(方陣)을 뚫기 위해 길이 수m의 랜스(Lance‧마상창) 등으로 무장한 이 부대는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갑옷에 달린 거대한 ‘날개장식’이었다.
이 날개의 역할을 두고 후대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온 몸에 걸리기 쉬운 보병 투척 올가미‧그물 방지용도라는 주장에서부터 단순장식용이라는 해석까지 분분했다. 그러나 ‘위압감’이 목적이었다는 것으로 의견은 점차 모아지고 있다.
시속 수십㎞의 속도로 내달리며 도합 톤 단위의 충격력을 일으키는 기병‧군마(軍馬) 조합은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여기에 마치 전설 속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를 연상시키듯 두 개의 날개를 단 채 달려오는 수백~수천 기병의 물결이 주는 장엄함은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1만8000명가량의 윙드 후사르는 1683년 빈(Vienna)전투에서 수십만 적군에게 돌격해 일격(一擊)에 붕괴시키는 등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이 전투는 훗날 헐리웃영화 ‘반지의 제왕’ 내 나팔산성(Hornburg)‧펠렌노르(Pelennor)전투에서의 대규모 기병돌격 장면 등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국군의날 시가(市街)행진이 약 10년만에 부활한다는 소식이다. 국방부는 오는 9월26일의 건군(建軍) 75주년 및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국군의날 행사에서 서울 숭례문~광화문에 이르는 각 군 사관생도 등 행진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편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상책(上策)”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자병법(吳子兵法)에도 “위풍당당한 군대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번 시가행진이 위엄 넘치도록 성공적으로 진행돼 중국‧북한 등의 콧대를 눌러 놓길 기대한다.
이론에 함몰되어 인간의 감정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소속감이나 상대방에 대한 공포심도 충분히 현상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도 말입니다. 경제학에서 연구하는 것은 최고의 금전적 이득이 아니라 만족감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중국은 중공도 그렇지만 한반도를 노리려는 야욕을 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감국대신으로 조선을 유린해 조선의 근대화를 무산시켜 멸망으로 몰아넣은 전과가 있고, 장제스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원을 빌미로 한반도를 속국화 하려는 야욕을 품은 경우가 있습니다. 중공이 무너지고 중국이 민주화가 되어도 특유의 중화사상을 감안하면 한반도를 계속해서 노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중공이 무너져도 중국을 계속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영원한 우방도 적군도 없다는 말이 있는 걸로 압니다. 역사를 보건대 말씀하신 점에 적잖이 동감합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