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만천과해로 유럽 초토화…北도 즐겨 사용
일각 “‘5‧31 오발령’에 국민 대북경계심 저하 우려”
“성인남성은 모조리 도륙하고 나머진 노예化하라”
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에는 만천과해(瞞天過海)라는 계책이 나온다. 직역하자면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는 뜻으로 서양의 양치기소년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도 첫 장인 시계(始計)편에서 “용병(用兵)은 속이는 것이다. 유능해도 무능한 척 하고, 군사를 움직이면서도 쉬는 듯해야 한다.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나아가야 한다. 이는 승리비법이니 (피아가) 미리 알게 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만천과해는 유목기병의 전매특허와도 같았다. 특히 몽골족은 망구다이(Mangudai)전술 등을 바탕으로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ol Ulus), 즉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몽골제국을 건설했다. 13세기에 출현한 몽골제국은 19세기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시기의 대영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국가였다.
몽골족 만천과해가 발휘된 대표적 사례는 서‧동유럽 기사단과 맞붙은 서기 1241년 레그니차(Legnica)전투다. 이 교전에서 몽골족 경기병들은 유럽의 중갑기병을 마치 봄철 산짐승 사냥하듯 이리저리 몰아댄 끝에 대승을 거뒀다.
서역의 호라즘(Khwarizm)왕국 등을 정복한 칭기즈칸(Chingiz Khan)은 대서양까지 진출하겠다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227년 병사(病死)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로서 몽골제국 2대 대칸(大汗)에 오른 오고타이 칸(Ogotai Khan‧생몰연도 1185~1241)은 훗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로 명명된 대정복에 나섰다.
오고타이는 조카인 바투(Batu), 그리고 자비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노장(老將) 수부타이(Subutai)에게 유럽정복을 명했다. 1235년 열린 쿠릴타이(Khuriltai)회의에서 부족 원로들도 이를 지지했다. 원정군의 명목상 총사령관은 황금씨족(Altan urug)인 바투였지만 실질적 사령관은 칭기즈칸을 따라 숱한 전공을 세운 수부타이였다는 게 중론이다.
바투‧수부타이 등은 우선 길도 닦을 겸 유럽의 전력도 가늠해볼 겸 러시아를 방문했다. 키이우공국(Kievskaya‧키예프공국) 등은 몽골족의 쾌속진격 앞에 말 그대로 깨강정이 되도록 박살났다.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몽골족 식민지배(1240~1480) 시절을 타타르의 멍에(Tatar Yoke)라 부르며 치욕스럽게 여긴다.
달아난 슬라브인들은 러시아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등이 아닌 가톨릭으로의 개종 등을 전제로 헝가리왕국 망명을 허가받았다. 헝가리 국왕 벨라4세(Bela IV)를 알현한 슬라브인들은 감사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경고했다. “지금 동방에서 온 지옥의 군대가 서쪽으로 진군 중이다”
유럽 전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바투‧수부타이가 유럽인들에 대한 본보기 격으로 폴란드왕국 영토 상당수를 가볍게 쓸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유럽인들은 당초 몽골군을 전설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사제왕 요한)으로 여겼지만 폴란드의 참상에 현실을 깨달았다. 몽골족은 투항자는 살려주지만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점령 후 모조리 학살하는 게 관례였다. 생전의 칭기즈칸도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아이는 노예로 삼아라”고 명령한 적 있었다.
“거짓말인 줄 속았는데 맞고 보니 죽겠더라”
폴란드 헨리크2세(Henryk II)의 구원요청에 따라 지원군이 속속 도착했다. 지원병력은 동유럽 봉건영주 및 그 휘하 농민군과 기사들,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템플기사단)과 같은 서유럽 기사단 등으로 구성됐다.
전신(全身)을 철갑으로 감싸고서 방패‧철퇴 등으로 중무장한 기사단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중세 유럽‧중동에서도 “비록 그들의 전술은 돌격 하나밖에 없지만 그걸 막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는 취지의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성전기사단 등의 막강한 전투력은, 정면돌격에만 국한됐지만, 십자군전쟁(Crusades)에서 이미 입증된 터였다.
자연히 바투‧수부타이로서는 유럽 기사들과의 난전(亂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이 곳은 적진인 유럽이었다. 몽골족도 중갑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보급선이 천㎞ 단위로 멀어진 이상 병력손실을 메울 길이 없었다. 반면 안방에서 싸우는 유럽은 달랐다. 이에 수부타이 등은 만천과해로 적을 잡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동‧서양의 군대는 1241년 4월9일 폴란드 남서부의 레그니차에서 대치했다. 전투는 유럽군 지휘부의 “돌격” 신호로 시작됐다고 한다. 유럽군 1진이 화살비에 격퇴되자 달아오른 전군이 육중한 철퇴‧랜스(Lance‧장창) 등을 휘두르며 진군했다. 몽골군은 마침내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사분란하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섭다더니 별 것 아니네” 유럽군의 사기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는 스텝지대 유목민이 사냥감을 덫으로 유인하는 것과 같은 속임수였다. 체계적으로 추격하는 대신 무질서하게 돌격한 유럽군은 기‧보병 간 기동력 차이 탓에 둘로 분리됐다. 보병보다 앞서 나간 유럽 기사단은 말에게 마갑(馬甲)까지 씌우고 있었기에 몽골 경기병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렇게 허덕이며 쫓아가던 기사단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돌연 들판에 엄청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시야를 가려버린 것이었다. 기사단이 혼란에 빠지자 사전에 전개됐던 몽골군 좌우 양익(兩翼) 궁기병들이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화살비가 그치자 미리 매복 중이던 몽골 중갑기병들이 정면으로 돌격해와 이미 탈진한 기사단 갑옷을 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낙마(落馬)한 기사들은 말발굽에 밟혀 죽거나, 갑옷 틈을 찌르기 위해 단도(短刀) 등을 들고 몰려온 몽골보병 등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기사단은 일방적 학살에 내몰렸다. 뒤따라온 유럽 보병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유럽기사 간의 전투라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상대를 인질로 삼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몽골군은 그런 것 없었다. 퇴로가 막힌 채 포위된 유럽군은 괴멸(壞滅)되다시피 했으며 헨리크2세도 전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화살 두 발에 창까지 맞고 낙마한 그는 몽골보병에 의해 참수됐다고 한다. 몽골군이 전과(戰果)확인을 위해 모은 유럽군 전사자의 한쪽 귀는 큰 자루 9개 분량이었다고 한다.
헝가리도 머잖아 모히(Mohi)전투에서 몽골군에 대패했다. 동유럽이 말발굽에 짓밟히고 바야흐로 서유럽 정복의 관문(關門)이 열린 그 때 몽골군은 갑자기 바람에 쓸려간 듯 사라졌다. 유럽인들은 이를 기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은 숨은 내막이 있었다. 본국(本國)의 오고타이 칸이 붕어(崩御)한 것이었다.
몽골족은 대칸 사망 시 모든 왕족‧귀족이 참여하는 쿠릴타이회의를 열어 새 대칸을 선출하는 게 관례였다. 황금씨족이자 황위 계승권자인 바투로서는 1년이 걸리더라도 수도 카라코룸(Karakorum)으로 돌아가는 게 유럽정복보다 급선무였던 것이다. 비록 바투가 ‘바지대장’ 격이라 해도 수부타이 홀로 반역 가능성이라는 의심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칸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에 잔류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몽골족의 망구다이 전술, 즉 만천과해는 오직 최고지도자 서거(逝去)라는 대사건만이 저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오해가 야기하는 피해는 상당하다.
北 진짜 도발 시 “또 양치기사건 아냐” 오해할 수도
31일 많은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필자도 이날 오전 6시41분께 수신한 서울시발(發) 위급재난문자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6시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피령 발령 이유는 북한의 대남(對南) 미사일 발사 가능성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이를 접하고 떠올린 것이 ‘전쟁’이었다. 황급히 집 밖으로 나가 새벽하늘 올려다 본 필자도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32분에 쐈다면 탄두가 이미 한양 땅에 착탄하고도 남았을 텐데’ ‘KN-23(북한판 이스칸데르‧Iskander)이 회피기동 하느라 늦어지는 건가’ ‘빗나갔나’ ‘32분에 사격했는데 사전통보는커녕 10분씩이나 지나서 도망가라고 문자 보내다니’ ‘보낸 사람이 칼 루이스인가 황영조인가’ ‘당신이 한 번 도망가봐라’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로 대피하라는 건가’ ‘생화학무기 공격인가 핵공격인가’ ‘하늘로 솟아야 되나 땅으로 꺼져야 되나’ ‘이대로 죽는 건가’ ‘우리 가족은 무사할까’
모든 수신자가 그랬겠지만, 필자도 오전 7시3분께 행정안전부로부터 “서울시의 오발령(誤發令)”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오세훈 시장도 당일 시청에서 긴급브리핑을 열고 “혼란을 드려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다만 “오발령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는 부연설명을 달았다.
물론 안보에는 과잉대응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떠나 서울시가 북한의 대남 만천과해 전술을 대신 해준 꼴이 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각서 나온다. 차후에 정말로 북한이 대남도발에 나서더라도 일부 우리 국민이 “북한이 지독하다곤 하지만 또 오발령 아냐” “또 서울시 양치기사건 아냐”하는 오판을 할 계기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북한은 그간 숱하게 ‘있어도 없는 척’하는 기만술(欺瞞術)을 펼치다가 1~2차 연평해전, 연평도포격, 천안함피격 등을 저질렀다. 6‧25도 우리 국군장병 상당수가 휴가를 나가는 등 경계심을 풀게 만든 상황에서 새벽 4시를 기해 기습침공함에 따라 발발했다. 서울시 오발령과 비슷한 시각에 이웃나라 일본은 북한 우주발사체(를 가장한 미사일) 사격에 매뉴얼대로 정확히 대처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다시는 ‘대리 만천과해’의 오명‧오해를 뒤집어쓰지 않길 바란다.
아마추어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자국민의 목숨을 등한시하는 대한민국.
아무리 군사 정보력이 천양지차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대처와 너무 비교되었습니다.
일본은 미사일이 날아오는 와중에 미리 오키나와 지역에 대피령을 내렸고, 곧 기시다 총리도 자국 기자의 물음에 북한이 쏜 것은 탄도미사일로 생각되어 진다고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자국민의 안전을 생각하는 차이가 너무나 커서 웃음도 안 나왔습니다.
갈 길이 너무나 멉니다.
칼럼 본문에 오자가 많이 났습니다. 잘못된 것 수정하느라 지금까지 틈틈이 칼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크게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안타깝지 않았으면 합니다.
질탄 받은 만큼 보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저번 드론 사건도 그렇고 실망이 큽니다.
몇년 뒤에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가 들어서면 잘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때까지 북중러가 가만히 기다려 줄지도 의문입니다.
안보만큼은 당장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의 여야 지도층이 함께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대구시처럼 잘 되는 곳도 많지 않습니까.
늦은 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정부도 군도 시도도 잘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쏘고 한참 시간지나 다짜고짜 대피하라는 경보는 책임회피용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민감한 부분은 계속 잘 하다가도 한 번 실수하면 양치기 소년처럼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나라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크게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한 번의 실수, 특히 안보에서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국가안보 분야에서 다년간 일해 본 적 있기에 특히 느끼는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숨이 나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과 우국충정의 고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한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항상 많을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__)
과분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평온한 밤 되십시오 (_ _)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경보발령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얼마나 평화에 찌들어서 아무도 대비를 안했는지. 허둥지둥 하는것을 보면서 흡족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별 효과는 없을것이라는데 배팅합니다. 아무도 개선하려들지 않을것입니다.
실망·염려하시는 바가 느껴집니다. 적잖은 분들이 동감하시리라 짐작합니다. 그렇다 해도 하나뿐인 우리나라이기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속히 개선되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