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딛고 ‘노당익장’ 저력 발휘한 사마의
대구시‧눈닷컴 MOU 소식에 범국민 시선
유송(劉宋)의 학자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는 ‘노당익장(老當益壯)’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모도원(日暮途遠‧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하더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늘 청년과 같은 패기를 품고 와신상담(臥薪嘗膽‧고난을 견딤)해 대업을 이뤄야 한다는 뜻이다.
서기 1세기 무렵 후한 초대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시기에 반란이 발생했다. 예순이 넘었던 노장 마원은 갑주 걸치고 창을 비껴든 채 말에 올라 휘하병력에 진군을 명령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시대상 예순이면 상당히 노쇠한 춘추였다.
마원이 패할까 내심 걱정했던 광무제는 “그대는 너무 늙었소. 진압은 젊은 장수에게 맡기고 집에서 편히 쉬시오”라며 만류했다. 이에 마원은 당당하게 “신(臣)의 머리가 이미 희끗희끗하지만 기력은 젊은이 못지않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출정을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마원은 평소 입버릇처럼 주변에 “장부위지(丈夫爲志‧대장부가 큰 뜻을 품었으면) 궁당익견(窮當益堅‧곤궁할수록 더욱 굳세야 하고) 노당익장(늙을수록 더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이라고 강조해왔다. 감탄한 광무제는 출진을 허가했고 마원은 보란 듯 대승을 거뒀다.
후한 말기 인물로서 서진(西晉)을 실질적으로 개창한 추존황제 사마의(司馬懿‧생몰연도 서기 179~251년)도 와신상담하며 노당익장을 과시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유년시절을 수도 낙양(洛陽)에서 보낸 사마의는 역적 동탁(董卓)의 천도(遷都)로 대혼란이 빚어지자 인근 하내군(河內郡)으로 피신했다. 여러 제후(諸侯)들이 천자(天子)의 조서를 받들어 공격해오자 동탁은 시내에 불을 지르고 황릉(皇陵)을 도굴하는 등 낙양을 초토화했다. 대민약탈은 기본이었고 천자마저 납치해 장안(長安)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사마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대의 명사(名士)였던 최염(崔琰)은 그를 두고 “총명‧성실‧영특하고 강단 있으니 누구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최염은 대기만성(大器晩成) 고사의 주인공이다. 그의 사촌동생 최림(崔林)은 당초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염은 “큰 종이나 솥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으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림은 훗날 위(魏)나라 삼공(三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사마의는 201년 무렵 군(郡)으로부터 천거돼 미관말직으로 출사했다. 조정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지내던 조조(曹操)는 사마의를 눈여겨보고서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칭병(曹操)한 채 두문불출했다.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승상(丞相)이 돼 천자를 손바닥 위에서 갖고 놀던 조조는 다시 사람을 보내 사마의를 불렀다. 그리고는 “따르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사마의는 어쩔 수 없이 조조를 섬겼다.
조조는 사마의를 곁에 두면서도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경계했다. 일설에 의하면 조조는 어느 날 말(馬)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꿨다. 그러자 대뜸 장남 조비(曹丕)를 불러 “사마의는 신하 자리에 머물 인간이 아니다”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사마의는 형 사마랑(司馬朗), 동생 사마부(司馬孚)를 두고 있었다.
이후 사마의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실 위나라에서의 사마의의 역할은 지대했다. 제갈량(諸葛亮)‧손권(孫權) 등의 북벌을 막아내는가 하면 보급도 어려운 머나먼 요동(遼東)의 맹주 공손연(公孫淵)의 반란도 성공적으로 토벌했다.
특히 제갈량의 북벌 때는 항장(降將) 맹달(孟達)의 거사를 막아내 망할 뻔한 위나라를 기사회생시켰다. 맹달은 촉한(蜀漢)에서 위나라로 투항한 후 위촉 접경지대 수비를 위임받는 등 중용된 인물이었다. 이후 권세가 위태롭게 되자 제갈량과 은밀히 내통해 위나라를 결딴내려 했다. 만약 맹달의 대군이 낙양을 기습했더라면 위나라는 3대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대우는 없었다. 조조‧조비‧조예(曹叡) 등은 겉으로는 사마의를 존중하는 척 하고 그의 계책을 상당수 받아들이며 제후직 등도 제수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조진(曹眞) 등 더 큰 실권을 쥔 이들의 그늘에 의도적으로 가려져야만 했다. 조씨 일가는 사마의를 조정이라는 새장 안에 항시 가둬놓으려 하고 끊임없이 지켜봤다. 사마의의 재능을 철저히 이용해먹고 필요 없어지면 바로 버리는 패로 여겼다.
픽션이 가미된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드라마 신삼국(新三國) 등에서 사마의의 삶은 한층 비참하게 그려진다. 조조는 사마의에게 선심 쓰듯 미인을 시집보냈지만 이 여인은 사실 조조의 스파이였다. 조씨 일가는 제갈량의 북벌이 있을 때만 마지못해 사마의에게 병부(兵符)를 주고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빼앗으며 한직을 떠돌도록 했다. 조진 등은 사마의의 일부 실책들을 쉴 새 없이 꼬투리 잡아 그를 척살하려 들었다. 사마의의 자식들도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느덧 사마의는 백발의 노인이 다 되고 일모도원의 처지에 놓였지만 끝내 노당익장을 발휘했다. 그는 조씨 일가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임종이 임박한 것처럼 드러누우면서 한편으로는 측근들을 은밀히 소집했다. 사마의의 높은 신망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던 터였다. 249년 사마의는 평생에 걸쳐 자신을 핍박했던 조씨 일가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도성을 비운 사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거병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신삼국에는 사마의의 와신상담을 상징하는 명대사가 나온다. 그는 조진의 아들로서 권력을 오로지했던 조상(曹爽)의 어깨를 밟은 채 이같이 말했다. “검은 한 번 휘둘렀지만 나는 그 검을 십수년 동안 갈아왔다” 사마의는 거사 직전 갑주를 걸친 자신의 모습에 아들이 놀라며 “위중하신 것 아니셨습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난 수십년 동안 위중했다!” 사마의는 거짓칭병을 자식들에게마저도 숨겼다.
마침내 평생의 한을 씻은 사마의는 제위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황제로서 통치했다. 훗날 당(唐)태종 이세민(李世民)이 “문(文)으로 다스리고 무(武)로써 위세를 떨쳤다”고 평가할 정도로 사마의는 그의 생전에 치세(治世)를 열었다.
후대도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신삼국의 대미에는 사마의가 어린 손자 사마염(司馬炎)에게 당랑규선(螳螂窺蟬)을 외우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고사성어 내용은 “사마귀는 눈앞의 이슬 먹는 매미만 노릴 뿐 등 뒤에 참새가 있는 줄 몰랐다”였다. 사마염은 265년 서진을 건국하고 조부를 추존황제에 추숭(追崇)했다.
고난이 현재진행형인 홍준표 대구시장이 18일 ‘중동의 아마존’이라 일컬어지는 현지 최대 온라인 플랫폼기업 ‘눈닷컴(noon.com)’과 두바이 본사에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눈닷컴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와 중동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 이마르(EMAAR)의 합작투자 기업이다. 대구시는 이번 협약이 역내 소비재‧경(輕)산업재 기업의 중동 진출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희소식에 대구시를 넘어 범국민적 시선이 쏠리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당익장의 역사는 계속된다.
칼럼 좀 더 자주 올리셔야 할 듯
며칠 전부터 잠시 본업(기자) 쉬면서 재충전하고 있기에 시간여유가 좀 있는 편입니다. 불혹의 나이에 생의 약 반절을 맞아 다른 진로도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십수년 동안 억지, 꼬투리잡기 등이 특기인 좌파들과의 소모적인 논쟁에서 지친 마음이 안정되는 대로 조만간 못 뵌 분들 찾아뵙는 틈틈이 부지런히 쓰고 또 지도편달 받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역은 양국의 이해관계를 얽히게하고 분쟁의 가능성을 줄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줘야 하기 때문이죠. 자원을 무기로 쓰는 보호무역주의가 판치는 현 세계정세에서 한국이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할수 있길 기원합니다.
저 또한 대한민국의 발전을 염원합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