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통해 국민 사랑 받은 역사상 최고거부 만사무사
‘가식’ 통해 만인 증오 받은 석숭 전례, 김남국 기억해야
지난 2019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놨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거부(巨富)로 꼽힌 인물이 아시아인도, 유럽인도, 신대륙인도 아닌 아프리카인이었다는 내용의 ‘2019 억만장자 리스트’가 그것이다.
주인공은 바로 말리제국(Mali Empire)의 9대 황제였던 만사 무사(Mansa Musa‧생몰연도 ?~서기 1337). 루돌프 부치 웨어 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 부교수는 포브스에 “무사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표현불가’인 무사의 재산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위에 오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의 재산이 4조6000억달러로 추산된다는 점에서 무사의 곳간이 얼마나 풍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브스가 2019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최고 자산가로 꼽은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의 재산은 1310억달러(약 148조6000억원)에 ‘불과’했다.
이렇듯 상상초월의 재력가였음에도 무사는 일반서민들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 지도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사의 재산은 적법하게 형성된 것이었으며, 그는 ‘서민 코스프레(흉내)’ 등 가식도 떨지 않았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베풀 줄 알았다.
말리공화국은 지금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황금 산지(産地) 중 하나다. 팀북투(Timbuktu)는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말리 중부지방의 역사적 도시다. 이곳으로부터 수십㎞ 떨어진 니제르강(Niger River‧또는 나이저강)에서는 과거 여름에 홍수가 나고 강바닥이 드러나면 엄청난 양의 황금이 채굴됐다고 한다.
이렇게 산출된 금은 지중해 연안으로 수출돼 가공된 뒤 유럽 각 국으로 유통됐다. 무사가 재임한 14세기에는 말리제국 홀로 전 세계 황금 생산량의 약 70%가량, 소금 생산량의 약 절반가량을 책임졌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도층은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리제국을 방문한 모로코의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말단병사들과도 격식 없는 대화를 나눴다. 황제가 접객을 위해 내놓는 음식은 세 개의 빵 덩어리와 구운 소고기, 발효된 크림 등이 전부였다.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기혼여성이 외간남성과 거리낌 없이 담소하는 등 사회 분위기도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활기찼다.
황제들은 또한 가식적이지도 않았으며 가진 것을 진심으로 베풀 줄 알았다. 무사는 1324년 대대적인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약 6만명의 수행원을 대동하는 등 제국의 국력, 자신의 재력을 대외에 숨김없이 과시했다. 수십~수백마리의 낙타 등은 한 마리당 18~110㎏의 황금을 짊어졌으며 1만2000명의 노예도 1인당 평균 1.5㎏의 금을 운반했다. 이들은 모두 눈부신 비단옷을 입고서 보는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무사는 머나먼 성지순례의 길에서 만난 가난한 이들마다 말 그대로 황금을 한 움큼씩 나눠줬다. 이집트 카이로(Cairo), 사우디아라비아 메카(Mecca)‧메디나(Medina) 등이 대표적 지역이었다. 특히 카이로에서는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얼마나 많은 금을 뿌려댔는지 금값이 폭락했다. 이로 인해 지중해권‧서아시아 경제가 초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 앞에 혼돈에 휩싸이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무사가 부랴부랴 황금을 되사들이면서 혼란은 약 10년 후에 종식될 수 있었다.
무사의 전설은 카이로와 지중해를 넘어 베네치아(Venice)의 상인들에게까지 전파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럽의 평민‧농노(農奴)들은 ‘저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는 황금의 대제국’을 상상했다. 또 부유하고 가식적이지 않으며 관대한 황제가 언젠가 유럽도 방문해주리라 염원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무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거의 없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 줄 알았던 지도자”로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다.
무사와는 정반대로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일삼으면서 나눔에는 인색하고, ‘현신(賢臣‧어진 신하)‧충신 코스프레’를 능청스럽게 해내며, 민생을 도탄에 밀어 넣은 인물들이 있다. 고대 서진(西晉)의 인간들로서 속된 말로 ‘전설적 돈지랄’에 나섰던 석숭(石崇‧생몰연도 서기 249~300)‧왕개(王愷‧미상)가 그들이다.
석숭은 어려서부터 영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시중(侍中)‧산기상시(散騎常侍) 등 고관대작을 역임했다. 그는 혼군(昏君)이었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으로부터 어진 신하라는 평가와 함께 총애 받았다.
그렇게 형주자사(荆州刺史)가 된 석숭은 본색을 드러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나서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다. 심지어 상선을 약탈하는 등 일개도적이나 할 법한 짓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의 불법행위들은 완전한 비밀에 부쳐졌으며 조정은 물론 형주 이외 지역 백성들도 석숭을 진짜 현신이라 믿고서 의지했다.
석숭은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왕개와 함께 전설에 길이 남은 ‘돈배틀’에 나섰다.
왕개는 어느 날 시종들에게 설거지할 때 당시 시대상 대단히 귀했던 맥아당을 쓸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석숭은 시종들에게 밥을 할 때 짚 대신 더더욱 귀한 밀랍을 쓰도록 호령했다. 왕개가 자택 앞 거리를 40리(약 16㎞)에 걸쳐 보라색 비단으로 장식토록 하자 석숭은 50리(약 20㎞)를 장식토록 했다. 보라색 염료는 상당히 비쌌으며 서양에서는 오직 로마황제만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재산과 권세는 황제 사마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왕개가 석숭의 앞에서 황제의 하사품인 두 자 남짓한 큰 산호수(珊瑚樹)를 자랑하자 석숭은 대뜸 이를 깨부숴버렸다. 진귀한 보물이 산산조각나자 왕개는 크게 격노했다. 그러자 석숭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걱정 말라. 내가 보상해주겠다”며 하인을 시켜 ‘세 자’ 남짓한 산호수 여러 개를 집에서 가져오도록 했다. 이를 본 왕개가 ‘패배’를 인정하면서 그렇게 두 사람의 ‘돈지랄 더비매치’는 주변인들의 손가락질 속에 석숭의 완승으로 끝났다고 한다.
석숭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산을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재미 삼아 혹독하게 탄압했다. 그는 자신이 개최한 연회에서 기녀가 노래를 잘 못 부른다고 느껴지거나, 기녀가 따라준 술을 손님이 안 마시면 그 자리에서 기녀들을 참수했다. 훗날 동진(東晉)의 공신이 되는 왕도(王導)가 기녀들을 살리기 위해 약한 주량에도 폭음을 할 정도로 석숭의 잔혹함은 도를 넘었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60억 코인’ 논란 앞에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스스로 청렴함을 강조하면서 서민정치를 표방했던 그가 가상자산 과세유예 법안 발의에 참여하고 뒤에서 수십억대 가상자산을 축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자신은 가난하다고 주장해왔던 김 의원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했다는 소식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김 의원이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위믹스코인은 그 변동성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투자자들을 손실의 늪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만사 무사는 적법하게 쌓은 자신의 재력을 숨기지도 않고 서민 코스프레도 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베풀었기에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만사(萬事)가 무사(無事)’할 수 있었다. 반면 석숭 등은 어진 신하 코스프레를 하면서 재력을 불법으로 몰래 축적하고, 베풀기는커녕 백성의 고통에 고개 돌리고 탄압해 많은 사람의 원한을 샀다. 때문에 석숭은 팔왕의 난(八王之亂) 과정에서 고발돼 전 재산이 몰수되고 삼족이 멸족됐다.
김 의원은 의혹 일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이미 산산조각 난 서민 이미지 앞에 국민 분노는 치솟고 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건 “정치생명과 전 재산을 걸겠다”는 언변이나 이미 결백이 입증된 타 당 인사에 대한 특수활동비 의혹 제기 등 ‘물귀신작전’이 아니다. 김 의원에게 필요한 건 국민 앞에 진심 어린 석고대죄(席藁待罪)와 거취를 정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되짚습니다.
항상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에 어지러운 마음에 답장이 늦었습니다. 만시지탄이라 생각합니다. 저야 말로 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치인이 정치를 잘하라고 서민들이 뽑아준거지 서민처럼 행동하면 그건 기만을 넘어선 농락입니다. 그쵸?
가난팔이로 유권자들 현혹해 권력을 얻고, 그 권력으로 이해충돌을 일삼으며 몰래 부정축재하면서도 여전히 가난팔이하고 상대를 기득권으로 몰아 종래에 독재자가 되고자 하는 위선이 '문재'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