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에서 황제로’ 인간승리 주원장의 공감정치
야당發 코인 논란 점입가경…洪식 공감정치 절실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생몰연도 서기 1328~1398)은 말 그대로 문전걸식(門前乞食) 부랑자에서 제국의 황제가 된 인간승리의 끝판왕 같은 인물이다. 그의 믿기지 않는 성공배경에는 운이 아닌 처절했던 유년시절의 경험, 그리고 철저한 민심분석과 행동실천이 있었다.
주원장은 장강(長江) 하류의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두메산골 소작농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주중팔(朱重八)이었다. 주원장의 부모는 앞서 낳은 자식들이 누렇게 뜬 얼굴로 굶주리는 모습을 지켜봐왔던 터였다. 때문에 입이 하나 더 늘자 기뻐하는 대신 절망했다고 한다.
당시 백성들은 원(元)나라 말기 몽골족의 폭정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몽골족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원주민들을 2등 시민 취급하면서 지도층으로서의 업무태만과 부정축재‧차별을 일삼았다. 입에 거미줄 치는 게 일상이었기에 주원장도 걸음마를 시작함과 동시에 목장에서 소를 치는 중노동에 내몰렸다.
설상가상 마을에 전염병이 돌자 주원장은 부모와 큰형 등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됐다. 장례 치를 돈도, 땅도 없어서 시신을 거적에 말아 방치하고서 통곡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이웃사람이 한 뼘 땅을 내주어 겨우 매장할 수 있었다. 훗날 황위에 오른 주원장은 해당 인물을 찾아낸 뒤 제후(諸侯)로 봉해 은혜를 갚았다. 주원장은 황제가 되고서도 유년시절을 잊지 못해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물을 긷고 논을 매는 고된 수행을 하면서까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깨달음을 얻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나 몽골족 착취 아래 절이라고 해서 살림이 넉넉할 리 없었기에 먼 길을 나서 탁발승(托鉢僧)이 됐다.
주원장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베개 삼아 구걸로 연명하며 천하를 유랑했다. 각지에 난립하는 도적떼에게 죽을 뻔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원장은 이 시절이 트라우마가 돼 황제가 되자 빛 광(光)자 사용을 엄금했다.
돈도 재주도 없는 일개 필부(匹夫)가 난세에 굶주리지 않는 방법은 오직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1352년 군벌 곽자흥(郭子興) 등 홍건적(紅巾賊)이 원나라에 대항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주원장은 말단졸병으로 입대했다. 주원장은 비로소 삼시세끼를 그럭저럭 챙겨먹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무렵 이름을 주원장으로 고쳤다. 또 죽마고우였던 서달(徐達)‧탕화(湯和) 등과 재회해 의기를 다졌다. 주원장은 목동시절 굶주리던 서달 등에게 주인 몰래 송아지를 잡아 먹였다가 발각돼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는 등 은혜를 베푼 바 있다.
이미 인생의 배수진(背水陣)을 쳤던 주원장은 창칼‧총포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주원장의 용맹을 눈여겨 본 곽자흥은 양녀(養女) 마씨(馬氏)를 주고서 사위로 삼았다.
기반 하나 없이 오로지 능력만으로 군단의 2인자가 된 주원장은 곽자흥을 양부(養父)로 모시고서, 계산된 것이든 아니든, 진심으로 충성했다. 난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게 비일비재했지만 주원장은 달랐다.
주원장은 일군(一軍)을 이끌고 적진을 점령한 뒤에는 곧바로 병권(兵權)을 반납하고 성지(城池)도 바쳤다. 또 휘하의 대민약탈도 엄금했다. 이는 코 앞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의병완장 차고서 서로를 배신하고 몽골족 못지않게 동족에 대한 약탈‧살인을 일삼던 여러 홍건적 군벌들과 대비됐다.
의(義)를 지키는 주원장의 모습은 각지에 널리 퍼져 이선장(李善長)‧유기(劉基) 등 수많은 호걸들의 합류 계기가 됐다. 특히 유기는 진사시(進士試)를 통과한 사대부였지만 걸인 출신의 주원장 앞에 엎드렸다. 진사는 과거시험 최종합격자로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인물을 뜻한다.
곽자흥이 병사하자 적통성에서 앞섰던 그의 친아들 곽천서(郭天敍)가 군단의 수령이 됐다. 그러나 무능하고 오만했던 곽천서는 항장(降將)의 배신으로 전사했다. 서달‧탕화‧이선장 등은 주원장을 새 지도자로 추대했으며 상당수 장졸들도 주원장을 리더로 받들었다. 1356년 강남의 요충지 금릉(金陵)을 점령한 주원장은 명목상 홍건적 최고지도자였던 소명왕(小明王) 한림아(韓林兒)의 재가를 얻어 오국공(吳國公)에 올랐다.
이후 주원장은 몽골족은 물론 홍건적 군벌 진우량(陳友諒)‧장사성(張士誠) 등을 모조리 토벌한 뒤 명나라를 건국하고 옥좌에 앉았다. 즉위에 앞서 한림아의 의문사와 같은 석연찮은 사건도 있었지만 주원장은 위민(爲民)에 있어서는 거짓 하나 안 보태고 진심이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위민정신으로 오랜 기간 추앙받아온 유비(劉備)의 길을 따르고자 했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의하면 유비는 “(폭군) 조조(曹操)와 반대로 행해야 일이 성취된다”고 강조했다. 주원장도 “원나라 말기 군웅(群雄) 중 장사성‧진우량이 가장 강대했다. 장사성은 곡창지대를 가졌고 진우량은 강군(強軍)을 보유했었다. 나는 둘 다 모자랐지만 오직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말한 것을 지키며, 힘써 일하고 모두 함께 같은 마음으로 협력함으로써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가난 속에 가족을 잃고 자신도 굶어죽을 뻔했던 주원장은 직접 각지 순행을 나서고 민생을 시찰하면서 무엇보다 경제를 중시했다. 일설에는 과거시험 합격자들에게 형이상학적 경전보다는 농업 등 실학(實學)을 상대적으로 더 익히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관리들의 태만‧허위보고 등이 없도록 재상 제도도 없애고 자신이 직접 일일이 천하각지 서류를 결재했다. 그래도 마치 걸인 황제를 우습게 알기라도 하듯 거짓을 고하거나 백성을 핍박한 관리‧부호는 일벌백계(一罰百戒) 차원에서 중형에 처했다.
주원장은 어느 날 순행 도중 대부호 심만삼(沈万三)이라는 인물을 만나 식사했다. 알고 보니 심만삼의 재산은 몽골족 앞잡이로서 동족을 탄압하며 해상무역 등으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대몽(對蒙)항쟁에서는 곳간이 무색하게 군비 납부에 인색했던 점 등이 드러나자 주원장은 심만삼을 처형하려 했다. 심성이 착했던 황후 마씨의 만류로 심만삼은 목숨은 건졌지만 마씨의 권유에 따라 재산을 한 푼 남김없이 모두 국고(國庫)에 바쳐야 했다.
권신(權臣) 호유용(胡惟庸)은 주원장 앞에서는 자신의 백성사랑이 얼마나 큰 지 가늠할 수 없다며 떠벌이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각종 비리는 물론 조정 내 전횡과 이에 따른 태만, 친인척‧파벌 낙하산 인사, 반대파였던 유기 독살, 권력남용 등이 폭로되자 목이 떨어졌다. 호유용을 시작으로 십수년 동안 박피형(剝皮刑) 등 끔찍한 중벌에 처해진 부패한 관료는 무려 ‘수만’ 명이었다. 개국공신 중 중형을 피한 이는 탕화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주원장은 후대도 위민을 국정이념으로 삼도록 했다. 전국에서 어리석은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자 황태손(皇太孫) 주윤문(朱允炆)은 형구(刑具)를 거둬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주원장은 대뜸 가시막대기를 쥐여주려 했다. 어린 손자가 아파서 들 수 없다고 하자 주원장은 선혈낭자하도록 제 손으로 가시들을 전부 제거해 쥐여줬다. 그리고는 “황위는 가시나무 같은 것이니 내 생전에 (부패관료들과 같은) 가시들을 없애주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14세기에 건국된 명나라는 17세기까지 장장 약 300년 동안 존속했다.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남국 의원발(發) ‘코인’ 논란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민주당 강성지지층인 ‘개딸’이 김 의원을 옹호하고 나선 데 이어 한 종교단체에서는 ‘욕망 없는 자, 김남국에게 돌을 던져라’는 취지의 궤변까지 나왔다.
의혹 쟁점은 국록(國祿)을 먹는 김 의원이 카메라 앞에선 위민정신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인사청문회 등 중차대한 업무시간까지 할애해가며 불법적 재산증식에만 혈안이 됐던 것 아니냐다. 공직자 태만‧부패의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만의 진영에서 이는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지금의 여당 지도부 대응도 당원‧국민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주원장과도 같은 속 시원한 부패청산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요원하기만 하다. 일각에서는 몇몇 여권 고위층 인사들이 일반국민의 고통을 피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도 나온다.
18~19세기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야당에 의한 사실상의 국가폭력 피해자인 국민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정치, 고향 창녕에서 수돗물로 물배 채워야만 했던 홍준표 대구시장과 같이 서민 삶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의 중앙정계 재등판을 기대한다.
저도 이분법적 시각은 지양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한 정당의 이모 대표는 두메산골 출신이지만 공감능력이 없는 모양인지 개발특혜 의혹 등으로 제 배만 불린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죠.
주원장처럼 어렵게 살았기에 국민 삶에 공감까지 할 수 있는 분의 재등판을 바라며 칼럼을 써봤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서민팔이 코스프레도 문제고, 그걸 자산증식에 이용하는 건 사기가 아닐까 소견에 생각됩니다. 지난번 칼럼서 누차 썼듯 저도 열심히 사는 대한민국 소시민으로서 자본체제를 존중하고, 적법하게 부를 늘리신 분들을 늘 존중합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모든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저는 딱히 거지출신이나 부자출신이나 해당 위치에 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태부자였던 녀석이 거지코스프레를 하는것을 심각한 모욕과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였던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자여서 가난을 모르는 주제에 그것을 이해한척 하는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부라고 할수 있죠
혹여 본 칼럼 내용에 (서민팔이 하는가 등) 오해하실 분이 계실까 말씀드립니다만.. 저 또한 고향에서 소박하디 소박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대 초부터 40대 초반 지금까지 맨주먹으로 열심히 살려 노력해왔다고 감히 자부한다는 점 말씀올립니다..
테어도어 루즈벨트는 대부호의 아들에 개망나니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미국인들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절대악인 거대 독점재벌을 해체해 풍요로운 자유주의를 정착시켰습니다.
저도 이분법적 시각은 지양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한 정당의 이모 대표는 두메산골 출신이지만 공감능력이 없는 모양인지 개발특혜 의혹 등으로 제 배만 불린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죠.
주원장처럼 어렵게 살았기에 국민 삶에 공감까지 할 수 있는 분의 재등판을 바라며 칼럼을 써봤습니다.
모든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저는 딱히 거지출신이나 부자출신이나 해당 위치에 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태부자였던 녀석이 거지코스프레를 하는것을 심각한 모욕과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였던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자여서 가난을 모르는 주제에 그것을 이해한척 하는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부라고 할수 있죠
말씀하신대로 서민팔이 코스프레도 문제고, 그걸 자산증식에 이용하는 건 사기가 아닐까 소견에 생각됩니다. 지난번 칼럼서 누차 썼듯 저도 열심히 사는 대한민국 소시민으로서 자본체제를 존중하고, 적법하게 부를 늘리신 분들을 늘 존중합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공정하게 부를 축적했으면 인정해 주고,
부자에게는 자유를, 서민에게는 기회를 주자는 홍준표의 모토에 공감합니다.
똑같이 가난한 유년 시절을 겪어도
사회에 대한 분노심을 영양분 삼아 올라 온
사람도 있기에 가난팔이는 늘 경계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