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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김일성 묘향산특각 사망의 미스터리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들 담은 담론

‘적과의 동침’ ‘토사구팽’서 역격 당했다는 金

파격(破格) 시도의 與野 VIP‧핵심인물 운명은

 

<“YS와 만나겠소”>

 

한반도 분단(分斷) 주범(主犯)인 북한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94년 7월 묘향산(妙香山)특각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죽음을 두고 측근에 의한 암살설(說)이 퍼진 바 있었다. 그 측근은 다름 아닌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이었다.

 

설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 집권 말기 미중(美中)은 북한에 다각도의 압력을 넣고 있었다.

 

1992년 8월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修交)를 전격 단행했다. 불과 약 반년 전인 1991년 12월 중국의 실질적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改革開放) 요구 받아들여 나선(나진‧선봉)경제특구를 지정하기까지 했던 북한의 배신감은 컸다.

 

덩샤오핑은 크게 격노한 김일성에게 자본 진영과의 관계강화를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평소 “자본주의에도 계획은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를 교시(敎示)해왔다. 그는 앞서 일본 닛산(日産)자동차 공장 등을 견학하고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량에 압도돼 흑묘백묘(黑猫白猫‧개혁개방)를 추진해온 터였다.

 

설상가상 미국 빌 클린턴(Bill Clinton) 행정부는 북핵(北核)을 이유로 북폭(北爆)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같은 노골적 핵개발, 1994년 3월의 “서울 불바다” 협박 등으로 응수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만약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클린턴 만류가 없었다면 북한은 90년대 중반에 이미 지도상에서 지워졌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YS는 수백만 북한군, 방사포(放射砲‧다연장로켓) 등 재래식 전력 앞에 한국 공동소멸,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擴戰) 등을 우려했다.

 

아무튼 가장 급한 건 김일성이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그를 찾아온 건 지미 카터(James Carter) 전 미 대통령이었다. 김일성은 1994년 6월15일 방북(訪北)한 카터를 융숭히 대접했다. 김일성은 결국 거대양국 압력에 굴복했다. 귀국길에 방한(訪韓)한 카터는 YS와 이홍구 당시 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만나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메시지 전달했다.

 

문민정부는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다. YS의 남북정상회담 목적은 묻지마 퍼주기 따위가 아닌 점진적인 평화흡수통일 발판 마련이었다. 1994년 6월28일 예비접촉에 나선 남북 부총리급 수석대표단은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 정상회담 갖기로 합의했다.

 

<“그 따위로 할 거면 때려치워!”>

 

늙고 지친 말년(末年)의 김일성은 대단히 들떴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서울 답방(答訪) 시 읽을 연설문을 벌써부터 준비하는가 하면 YS가 묵을 묘향산특각을 샅샅이 둘러보는 등 회담준비에 일일이 관여했다.

 

김일성은 특히 YS가 교통에서 불편 겪지 않도록 내각 철도상(장관 격)에게 철로(鐵路) 보수를 지시했다. 1인 독재체제 북한에서 수령의 교시는 곧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다. 그런데 철도상은 즉답하는 대신 머뭇거렸다. 김일성이 “왜, 남조선 괴뢰(傀儡)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물으며 웃을 정도로 처음엔 회의장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분위기는 철도상이 이실직고하면서 급격히 냉랭해졌다. 철도상은 벌벌 떨며 “사람을 동원할 수 없어 공기(工期)단축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정색하고 이유 묻자 철도상은 “배급 끊긴지 몇 달이 지나 그렇다”고 했다.

 

김일성은 그때껏 ‘조직비서’ ‘당(黨) 중앙’ 김정일로부터 “이밥(쌀밥)이 넘쳐난다” 식의 허위보고만 접한 터였다. 그제야 고난의행군 전조(前兆) 알아챈 김일성은 아들을 불러 “그 따위로 할 거면 다 때려치워라” 호통 쳤다. 식량을 통해 주민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쥐고 흔들어야 하는 사회주의 독재정권에게 배급중단은 곧 사형선고였다.

 

김정일은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자칫 대한민국 주도로 일이 진행될 경우 1973년부터 20년 넘게 지도자수업 받아온 김정일은 옥좌(玉座)에 앉지도 못한 채 단두대 오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로부터 “수령 될 자격 없다” 취지의 나무람 듣자 김정일은 대단히 분노했다. 그는 주변에 “통일 주장하는 놈들은 다 반동(反動)”이라 목소리 높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1994년 7월7일 밤 묘향산특각을 둘러보다가 쓰러졌다. 그의 심장은 이튿날인 8일 새벽 2시에 완전히 멈췄다.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으로부터 34시간이 지난 9일 낮 12시에 수령의 죽음을 발표했다.

 

김일성에겐 복수(複數)의 프로 주치의(主治醫) 및 전담 의료팀이 있었다. 이들은 수령 만수무강 위한 비약(祕藥) 제조한답시고 심지어 생체실험(生體實驗)도 자행했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 당시 특각엔 초짜배기 이비과(耳鼻科) 의사만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 특명(特命)으로 특급 의료진‧수술도구 실은 헬기가 특각에 급파됐으나 기상조건이 나빠 회항(回航)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재차 육로(陸路)로 수술팀 실어 보내게 했는데 이마저도 공교롭게 산사태로 길이 막혀 돌아갔다고 한다. 정 급하면 걸어서라도 1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김정일을 꼭 빼닮은 김정은이 고모‧고모부‧이복형 숙청‧처형‧암살이라는 엄청난 패륜(悖倫) 보여줌으로써 김정일의 생부(生父) 암살설도 마냥 허구는 아닐 것이란 추측에 힘 실리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몇몇 재벌가(財閥家)에서도 적과의 동침(同寢)이나 토사구팽(兔死狗烹) 등 과정에서 혈투(血鬪) 벌어지기도 한다.

 

<제2의 김일성 되나>

 

여야에서 미묘한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여권(與圈)에선 ‘VIP’에 의해 당 지도부‧친윤계 등에 대한 토사구팽이 시도되는 듯하다. 제1야당에선 주류(主流) 친명계 핵심인물이 출당(黜黨) 청원 삭제 및 회동 제안 등 라이벌 친문계 소속 전직 국무총리에게 손 내미는 듯하다.

 

그들의 진짜 목표‧속내가 무엇이든 이는 반발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가만히 앉아 “내 목 가져가쇼” 할 사람은 없다.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라이벌 계파에게 구애(求愛)하는 듯한 반역(反逆)행위를 쌍수 들고 환영할 주류 인사는 많지 않다.

 

친윤‧친명 등으로선 공통적으로 “VIP가 누구 덕분에 컸고 친명핵심이 누구 덕분에 입이 찢어지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나” 이를 갈 수 있다. 여당은 두말 할 나위 없고 제1야당에서도 “출당청원 삭제 주동자 밝혀라” 등 반발이 크게 일고 있다. 일부 ‘개딸’은 “설마 L이 이런 (청원삭제 등) 조치 취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의미심장한 친명핵심 공개언급에도 나섰다.

 

실세(實勢) 요구는 거부하고 적과의 동침에 나서려 했다가 돌연 석연찮게 사망한 김일성의 전례(前例)가 한반도 이남에서 재현될지, 아니면 김일성과는 반대로 역격(逆擊) 성공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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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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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3.12.07

    오늘 국민의힘 혁신위 해산선언했네요. 여권은 일단 vip 판정패인 듯 합니다.

  • 멸공통일
    2023.12.07

    미류나무인가, 그걸 기점으로 부자간 권력투쟁에서 김정일이 빨치산세대의 도움으로 이겼고 김정일 우상화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컬럼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YR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김정일이 사실상 죽인거라고 소문이 파다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