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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옛 선비들의 풍류가 그립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적대감 없는 선의의 경쟁의 정치 되길

 

진식(陳寔‧생몰연도 서기 104~186)은 후한(後漢) 말의 인물이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후일 삼공(三公)에 거론될 정도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사람이다. 청렴함과 능력으로 이름 떨쳤으며 두 아들 또한 난형난제(難兄難弟) 고사를 남길 정도로 뛰어났다. 훗날 위(魏)나라에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하는 진군(陳羣)은 진식의 손자다.

 

진식이 태구현령(太丘縣令) 자리에 있었을 때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 의하면 진식은 모친의 병을 사칭한 뒤 혈세(血稅)로 유급휴가 떠난 관리를 적발했다. 주부(主簿)가 다른 죄상도 조사하려 하자 진식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상관을 속인 건 불충(不忠)이고 어머니를 거짓으로 병들게 한 건 불효(不孝)다. 불충불효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또다시 그가 태구현령으로 있던 시절의 일화. 한 강도가 마을갑부를 해치고서 체포되자 진식은 수사 및 판결을 위해 사건현장으로 향했다. 당시는 행정‧사법이 분리되지 않았기에 현령이 모든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출산 후 신생아를 버려 숨지게 한 여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도중에 전해졌다. 진식이 신생아 사건현장으로 수레를 돌리자 주부는 “감히 양반을 해친 강도사건 처리가 우선 아닐까요?” 물었다. 진식은 “제 친자(親子)를 죽게 한 것이야말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이다.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바로잡는 게 우선이다” 물리쳤다.

 

진식의 벼슬은 비록 현령에 머물렀으나 대쪽 같은 성품은 입에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여러 청류파(淸流派)들은 고위공직에 자신이 임명될 때마다 진식이 중용(重用)되지 못하는 걸 늘 안타까워했다.

 

진식은 환갑이 넘어서야 중앙조정에 불려가 요직에 임명됐다. 그러나 환관들의 국정전횡에 반발해 일어난 당고(黨錮)에 연루되자 스스로 투옥을 자청해 옥고(獄苦)를 치렀다. 진식이 사망하자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객은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람들은 “차라리 형벌을 받을지언정 진중궁(陳仲弓‧진식)의 지적은 받지 말아야 한다”며 진식을 기렸다.

 

이러한 진식과 연관된 사자성어가 있다. 바로 양상군자(梁上君子)다.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에 의하면 태구현령이던 진식이 퇴근 후 귀가했을 때였다. 그는 한 도둑이 몰래 집에 들어와 천장 들보 위에 웅크린 채 기회만 노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진식은 의관(衣冠)을 정제한 뒤 두 아들을 불러 짐짓 도둑 들으라는 듯 말했다. “무릇 사람이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으나 그들이 반드시 태어날 때부터 악인(惡人)이라 할 순 없다. 평소의 그릇된 행동이 버릇처럼 돼 나쁜 일을 할 뿐이다. 바로 저 들보 위의 군자(양상군자)처럼 말이다”

 

깜짝 놀란 도둑은 달아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진식의 말에 감복(感服)해 그의 앞에 엎드렸다. 도둑이 울며 회개하자 진식은 “그대는 악해보이지는 않으니 아마 생계가 막막해 이런 일을 하게 된 모양이오. 얼마든지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니 개심(改心)하시오” 타일렀다. 비단 두 필을 받고 물러난 도둑은 새 사람이 됐으며 이후로 고을엔 강도가 사라졌다.

 

2024년 5월 대한민국 정치는 바야흐로 살기(殺氣)의 정치다. 뭐 하나 상대 허물이 없나 뒷조사하기 바쁘고 작은 의혹이라도 나올라치면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살을 붙여 가차 없이 물어뜯기 일쑤다. 적대감 없는 훈계, 타협‧뉘우침 등 훈훈한 장면은 사치다. 물론 누구든 죄가 있다면 응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국민이 바라는 건 증오의 정치가 아니다. 옛 선비들의 풍류(風流)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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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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