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3천년 전부터 신상필벌이 중시되는 까닭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육도(六韜)에 의하면 강태공(姜太公)과 마주 앉은 주문왕(周文王)은 세력을 다스릴 비책을 물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답했다. “포상은 공로에 맞게 이뤄진다는 믿음이 중요하고 처벌은 예외 없이 실행된다는 신용이 중요합니다. 이를 만인(萬人) 앞에서 실천한다면 모두 교화될 것입니다”
강태공과 주문왕의 대화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후세.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집필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손무(孫武)는 자신의 병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선 반드시 상대와 나 자신의 7가지 덕목을 살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상벌숙명(賞罰孰明) 즉 상벌의 기준을 명확히 하느냐 아니냐다”
손무가 초(楚)나라를 격파한 때로부터 또다시 수백 년이 흐른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이 봉기하자 조정은 중랑장(中郞將) 노식(盧植)에게 진압을 명했다. 노식은 황건 수괴 장각(張角)의 본대가 있는 기주(冀州)로 진격해 대승했다. 도적떼는 성 안에 갇혀 수성(守城)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노식은 감찰 나온 환관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파직됐다. 연의(演義)에서는 아예 “적과 내통한다”는 모함을 받아 투옥된 것으로 묘사됐다.
노식의 제자 유비(劉備)도 피해자였다. 그는 황건적 격퇴를 위해 의병(義兵)을 이끌고서 교위(校尉) 추정(鄒靖)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큰 공을 세운 유비는 기주 중산국(中山國) 안희현(安熹縣)의 현위(縣尉)에 임명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우(督郵‧감찰관) 하나가 가짜 공로자 색출을 구실로 현을 방문했다. 유비는 그를 만나려 했으나 독우는 마치 “맨 입으로?” 묻듯 대문을 닫아걸었다. 노한 유비는 독우를 끌고 나와, 연의에선 장비(張飛)가 한 걸로 각색됐으나, 직접 몽둥이로 수백 대를 때린 뒤 인수를 던져버리고 낙향했다.
아무튼 노식 대신 병권(兵權)을 쥔 동탁(董卓)은 선임과는 정반대로 연전연패해 도적떼의 숨통을 틔워줬다. 그럼에도 동탁은 뇌물‧아부의 파워로 무사했고 도리어 파로장군(破虜將軍) 등으로 승진해 변장(邊章)‧한수(韓遂)의 난 진압에 재투입됐다. 이처럼 신상필벌이 조금도 지켜지지 않은 후한은 결국 군웅할거(群雄割據)라는 난세를 맞았고 삼국(三國)으로 분열됐다.
삼국 중에서도 특히 유비의 촉한(蜀漢)은 신상필벌을 가장 우선시했다. 1차 북벌에 나선 제갈량(諸葛亮)은 조위(曹魏)를 상대로 분전했다. 그러나 요충지 방어를 위해 믿고 보낸 마속(馬謖)의 세기의 삽질 앞에 패퇴하고 말았다. 귀국한 제갈량은 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 벼슬을 승상(丞相)에서 우장군(右將軍)으로 대폭 강등했다.
국민의힘 원내대표 경선이 3일에서 9일로 연기됐다. 22대 총선 패장(敗將)이 또다시 전면에, 그것도 ‘추대’ 형태로 나서는 게 옳냐는 계파 불문 비판의 결과로 보인다. 머나먼 3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신상필벌이 조직경영 필수요소로 괜히 여겨지는 게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다. 9일 어떠한 선택이 내려질 지 궁금하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