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논개와도 같은 의기, 나라에 경종 울리길
조선(朝鮮)시대에도 ‘연예인’은 있었다. 관기(官妓)가 그들이다. 궁중‧지방관에 소속돼 활동한 이들 중 특히 예기(藝妓)는 노래‧춤‧서화(書畫) 등에 능해 뭇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히 이들의 언행(言行)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중 한 사람인 의기(義妓) 논개(論介‧생몰연도 ?~1593)도 관기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譚) 등에 의하면 논개는 경남 진주의 관청에서 근무했다. 삶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논개는 왜장(倭將)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어우야담은 논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사년(癸巳年‧1593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마침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성내는 피바다가 됐다. 이 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서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섰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는 사람의 혼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시커먼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군은 논개를 바라보며 침을 흘렸으나 (지형 때문에)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 때 왜장 하나가 위풍당당히 논개 앞에 섰다. 왜장이 논개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자 그녀는 요염한 미소와 함께 왜장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왜장을 마주 안은 논개는 돌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적장을 안을 때 논개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서 섬섬옥수(纖纖玉手)의 열 손가락에 반지까지 끼운 상태였다. 깍지 낀 두 손이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일본남성 평균체격이 지금보다 작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몸 쓰는 게 직업인 직업무인(武人)들은 달랐다. 비록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친(親)조선파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참전하지 않았다 허나, 그의 사천왕(四天王) 중 하나인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를 예로 들면 창대 길이만 6m에 달하는 장창(長槍)을 장난감처럼 휘두를 정도의 거구(巨軀)였다.
이 정도 길이의 장창 무게는 보통 10㎏ 이하다. 숫자만 보면 가벼워 보이나 쌀 10㎏ 무게를 떠올려보자. 더구나 무게중심이 극단적으로 쏠린 장창을 다뤄보면 그 체감 중량을 실감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타다카츠를 “(삼국지의) 장비(張飛)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몸 굵은 역사(力士)들을 평범한 여성의 완력으로 완강히 결박하기 불가능했기에 논개는 반지까지 사용한 것이다.
논개의 의기(意氣)는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널리 펴져 애국애족(愛國愛族)에서 깊은 울림을 던졌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진주성민(城民)들은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조정이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의(民意)를 받아들인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 비변사(備邊司)에 백성의 뜻을 전달했다. 조정은 논개의 자손에게 급복(給復‧부역면제)의 특전(特典)을 내렸다. 1739년에는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지고 매년 정부예산으로 논개 추모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진주에서는 추모제가 실시되고 있다. 올해에는 다음달 3일 열린다고 한다.
가황(歌皇) 나훈아가 최근의 은퇴 콘서트에서 온 국민에게 울림을 주는 한마디를 던졌다. 북녘 동포를 굶겨죽이고 호시탐탐 남침(南侵)을 노리는 북한 김정은을 탐욕스런 돼지에 비유하며 강력히 비판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 세력의 반발이 거세나 많은 국민은 가황의 촌철살인(寸鐵殺人)에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있다. 개인적으로 팬으로서 나훈아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그의 한마디가 대한민국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저러기 쉽지 않았을텐데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존경할 따름입니다. 이제 직업에서도 자유로워졌으니 앞으로도 옳은 목소리 많이 내주셨으면 합니다.
진짜 가왕은 김정은 한테 90도 폴더 인사한 조용필이 아니라 나훈아 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