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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국민 발톱의 때만도 못한 난교(亂攪)왕

오주한

역이기 활약에 ‘제나라 정복’ ‘천하통일’ 앞뒀던 漢

난교(亂攪) 괴철의 망언들 앞에 폐족폐당 위기 봉착

교왕, 이번엔 서울시민 비하… 당장 거취 결정하라

 

괴철(蒯徹‧생몰연도 미상)은 초한(楚漢)전쟁 시기의 인물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영향으로 괴통(蒯通)으로도 불린다.

 

괴철은 여기저기 권력자들에게 빌붙으며 “상전을 배신해” 꼬드기다가 세력이 망하면 홀로 달아나는 등 각지를 유랑했다. 그런 주제에 입은 뱀의 혓바닥처럼 미끄러웠다고 한다.

 

괴철의 이름이 사서에 처음 나타난 건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 때다.

 

진(秦)나라의 폭정 앞에 봉기한 농민군은 전국을 무섭게 장악해나갔다. 진승 수하의 무신(武臣)이란 자도 옛 조(趙)나라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괴철은 고향 범양현(范陽縣)의 현령 서공(徐公)을 설득해 무신에게 투항토록 했다. 나아가 직접 사자를 자청한 뒤 무신을 찾아가 “서공을 후히 대우하면 인근 지역도 모두 항복할 것입니다” 꾀를 줬다.

 

옛 조나라‧연(燕)나라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무신은 진승에게서 독립해 조왕(趙王)을 참칭했다. 기록엔 명확치 않으나 후술할 한신(韓信)의 사례를 보면 무신의 배반을 부추긴 건 괴철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무신이 왕이 되자 괴철의 지위도 크게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무신을 포함한 진승오광 세력은 무섭게 등장한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 장한(章邯)에 의해 급속도로 무너졌다. 이에 괴철은 바람처럼 사라져 한동안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기원전 204년 한나라 대장군 한신이 한고조(漢高祖)의 명으로 북벌에 나섰을 때 비로소 재등장한다.

 

괴철은 군재(軍才) 빼고 나머지는 백치나 다름없었던 한신에게 접근해 무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리저리 구워삶았다. 그리곤 한신에게 “독립해서 왕이 돼” “한고조‧항우(項羽)와 함께 천하를 셋으로 나눠 가져(천하삼분지계)” 끊임없이 유혹했다. 한신을 왕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 되려는 욕심에서였다. 괴철의 관심사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따위가 아닌 오로지 일신의 부귀와 영화(榮華)였다.

 

괴철은 제 욕망을 위해 실로 해선 안 될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북벌을 성공리에 완수 중이던 한신은 제(齊)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게 됐다. 그러나 제나라의 국력은 만만찮았으며 더구나 그곳에는 유생(儒生)들이 많았다. 전쟁통에 유생들이 죽거나 다친다면 약법삼장(約法三章)의 한나라를 좋게 보던 천하 인심은 뒤바뀔 것이 뻔했다.

 

때문에 한고조는 참모 역이기(酈食其)를 시켜 제나라에 항복을 종용토록 했다. 유생 출신인 역이기는 때로는 같은 유가(儒家)로서의 인정으로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설득하고 때로는 이치를 들어 전광의 폐부를 찔렀다. 전광은 “신안(新安)에서 포로 수십만을 생매장한 잔악무도한 항우에게 몰살당하느니 한나라와 손잡고 항우에 대항하라”는 역이기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괴철은 한신에게 쪼르르 달려가 “저 더벅머리 서생은 세 치 혀를 놀려 제나라 수십 개 성지(城地)를 얻었습니다. 장군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모른 척 미친 척하고 제나라를 들이치십시오” 졸랐다. 처세술과는 담 쌓았던 한신은 그 말에 혹해 “제나라 시민들은 교양 없고 거친 사람들” “제나라 시민 교양수준, 왜국인 발톱 때만큼이라도 따라갈까” 지껄이며 진군(進軍)의 북을 울렸다.

 

역이기는 눈 돌아간 전광에 의해 산 채로 끓는 물에 던져져 삶겨져 죽었다. 항우와의 제나라 확보 쟁탈전에서 몇 마디 말로 대승을 거뒀던 능신(能臣)의 어처구니없는 최후였다. 제나라는 한신에게 점령당하긴 했으나 이후 제나라 백성들은 이를 갈면서 원수 항우와 손잡고 한나라에 대항했다. 한신은 제나라를 한고조의 직할령으로 바치는 대신 자신이 제왕에 올라 주물럭거렸다.

 

뒷감당은 오로지 나머지 한나라 식구들 몫이었다. 그런 주제에 괴철은 한신에게 “한고조를 돕지 말고 네 세력이나 길러라” 조언했다. 대군을 거느린 한신은 북방에서 꿈쩍도 않다가 전쟁 막판에야 마지못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 사이에 한나라는 자력(自力)으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항우와 피 터지게 싸워 겨우겨우 이길 수 있었다. 한고조의 가슴팍에 항우의 화살이 꽂힐 정도의 접전이었다.

 

결국 통일 후 한신은 한고조에 의해 토사구팽(兔死狗烹)됐다. 그러자 괴철은 또 한 번 신들린 궤변으로 저 혼자 살아남았다.

 

괴철만 아니었다면 한신을 내칠 일도 없었던 한고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이 난교(亂攪‧어지러워 시끄럽게 함) 괴철의 목과 몸통을 분리시키려 했다.

 

일설에 의하면 괴철은 “개가 (성군인) 요(堯)임금에게 짖는 건 요임금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한신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고조께 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풀려난 괴철은 한고조의 공신 조참(曹參)이 제나라 상국(相國)으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가 잘 먹고 잘 살다가 무신‧한신과 달리 아주 편안히 눈 감았다.

 

국민의힘이 오로지 당·대 핵심이라는 한 사람의 실언들 때문에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분위기다. 부산시민들에 대한 ‘교양 없는 사람’ 발언으로 뭇 부산시민의 공분(公憤)을 산 인물이 이번에는 ‘일본인 발톱 때보다도 못한 서울시민’ 망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당의 서울 지역 총선 관계자들 절대다수는 망연자실한 분위기라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전선(戰線)에서 고군분투해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내기 직전이라 한들 한 사람의 ‘내부의 적’을 방치하면 전황(戰況)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문제의 인사는 “12년 전 발언이고 비하의도 없다” 같은, 요임금 앞에서 개 짖는 소리 말고 오늘 중으로 거취를 결단하길 바란다. 괴철은 요행수로 살아남았으나 두 번의 괴철은 없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14일) 부산을 방문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사태를 엄중히 직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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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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