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英” 텍사스공화국 지도부 실상은 ‘英 부역자’
‘친일파 혈통 의혹’ A씨, 입막음 대신 해명 나서야
‘야성의 고향’ 텍사스
텍사스(texas)는 누구나 알다시피 미(美)연방 구성하는 수십개 주(州) 중 한 곳이다. 알래스카와 함께 유달리 남녀불문 ‘야성미(野性美)’ 넘치는 지방으로서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유명하다. 미국 남부인들 멸칭(蔑稱)으론 ‘수준 낮다’ 의미쯤의 레드넥(Redneck)이 있다. 반면 가식 없이 솔직한 사람들이란 긍정적 이미지도 있다.
한 텍사스 지역개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세 남자가 만나 와이프 자랑에 나섰다. 오하이오 여자와 결혼한 이는 “내가 ‘요리‧청소는 자고로 아내가 해야 한다’ 하고 사흘 뒤 귀가(歸家)하니 말 한 대로 말끔히 돼 있더라” 과시했다. 버지니아 여자와 만난 이도 “요리‧청소를 시켰더니 사흘째에 깨끗이 끝나 호탕하게 식사했다” 껄껄 웃었다.
이에 텍사스 여자와 살림 차린 이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그는 “내가 ‘요리‧설거지‧청소‧빨래는 안사람이 해야 한다’ 했더니 첫 날엔 아무 것도 뵈지 않고 이튿날에도 눈앞이 깜깜하다가, 사흘째가 되자 부기(浮氣)가 좀 가라앉으며 왼쪽 눈으로 조금 볼 수 있게 됐다” 자랑(?)했다.
또 다른 개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텍사스‧알래스카 남자들은 늠름하고 터프한 것을 미덕(美德)으로 여겼다. 하루는 텍사스 남자가 알래스카로 놀러와 “강한 남자의 조건은 뭐냐” 물었다. 알래스카 남자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쳐다보며 “위스키 한 병을 깡으로 원샷하고, 회색곰과 생사불문(生死不問) 결투한 뒤, 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 했다.
이 말을 듣자 텍사스 남자는 말없이 위스키를 두 병이나 들이키고 달밤 산속으로 냅다 뛰어갔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 만신창이가 돼 어제의 술집에 나타나 포효했다. “자 이제 나와 결투할 여자는 누구냐!”
10년이나 자주국가로
텍사스가 원래 ‘독립국가’로서 이렇듯 야성미(?) 넘치는 와일드한 삶 살았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텍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존속기간 1836~1845)이 그것이다. 미 연방 위성국(衛星國)이었던 캘리포니아 공화국(California Republic‧1846년 6월14일~7월9일)과 달리 이쪽은 완벽한 자주국(自主國)이었다.
2021년 기준으로 영토는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 내에서 두 번째로 넓고, 인구(2953만명) 즉 선거인단도 캘리포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텍사스는 본래 멕시코 땅이었다.
텍사스 지역은 16세기부터 스페인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들에 의해 개척됐다. 이들은 주머닛돈 갹출(醵出)해 범선‧무기‧식량 등 마련한 뒤, 금은‧향신료‧담배 등 신대륙 재화(財貨)를 싣고 와 투자한 비율대로 수익을 배분했다. 멕시코가 19세기 초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에도 텍사스는 멕시코 영토로 남았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텍사스 지역엔 북미대륙 개척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820년 미주리주(州) 은행원 모지스 오스틴(Moses Austin)의 “텍사스 내 거주지 건설” 청원(請願)을 멕시코정부가 승낙한 것이었다. 모지스의 꿈은 그의 아들인 ‘텍사스의 아버지’ 스티븐 오스틴(Stephen Austin‧생몰연도 1793~1836)에 의해 이뤄졌다. 1821~1836년 미국인 정착민은 2만5000~3만명까지 늘어났다.
허나 새로운 멕시코 독재자가 된 산타 안나(Santa Anna) 등은 돌연 이민을 취소하고 정착민들을 탄압했다. 1835년 텍사스인들이 봉기(蜂起)함에 따라 내전(內戰)은 벌어졌다. 산타 안나는 압도적 전력(戰力)으로 밀어붙여 미국인 포로 수백명을 학살하는 등 폭주했다. 분노한 텍사스인들이 국사무쌍(國士無雙) 발휘함에 따라 내전은 텍사스 측 승리와 개국(開國)으로 끝났다.
텍사스 공화국은 총 4대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초대(初代) 대통령은 후일 3대도 역임하는 샘 휴스턴(Samuel Houston‧1793~1863), 2대는 미라보 B. 라마(Mirabeau B. Lamar), 4대는 앤슨 존스(Anson Jones)다. 텍사스 주도(州都) 오스틴, 최대도시 휴스턴은 모두 이들 역사적 인물들 인명(人名)을 딴 것이다.
지금도 주정부‧연방정부 충돌 시 텍사스‧캘리포니아에선 독립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영국 브렉시트(Brexit)를 모방한 텍시트(TEXIT)‧칼렉시트(Calexit)가 그것이다. 캘리포니아는 반쯤 푸념조라면 텍사스는 정말 진지한 분위기가 종종 연출된다. 수년 전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 등 보도에 의하면 텍사스에선 연방군‧주방위군이 상호포위 거듭하는 일촉즉발(一觸卽發) 대치를 벌이기도 했다.
옛 식민지배자와 밀통(密通)한 종자들
그런데 텍사스 역사에는 숨겨진 ‘흑역사’가 있다. 반영(反英) 주장한 지도부의 ‘친영(親英)행각’이 그것이다. 텍사스 공화국은 1845년 미 연방에 합병(合倂)됐다. 그 과정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수상쩍은 행보 일삼았다.
당초 미 연방정부는 텍사스 흡수에 회의적이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루이지애나 등 이미 확보한 땅덩어리만 해도 감당 안 되는 수준이었다.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WWW)’로 가는 길이 뚫리자, 무법자 총잡이들은 중앙정부 공권력(公權力)이 서부에 미치지 않는 점 악용해 열차를 털고 마차를 습격하는 등 각종 범죄 일삼았다. ‘루이14세(Louis XIV)의 땅’이란 뜻의 루이지애나 지역은 19세기 초중반 당시 미국 본토(本土) 3분의 1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자 미국 급속성장 경계한 영국은 기다렸다는 듯 1840년 텍사스 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하고서 ‘미승인국’ 딱지를 떼 줬다. 공화국 지도층도 ‘영국’에 접근해 멕시코와의 중개(仲介)를 요청했다. 그리고는 태연히 공화국 대통령에 줄줄이 출마‧당선됐다.
1812~1814년 미영전쟁(美英戰爭) 등에서 대영제국(British Empire)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다고 자신들 선전하며 영웅 자처하고 지존(至尊)이 된 이들이, 알고 보니 ‘매국노‧앞잡이‧부역자’였던 셈이다.
미 연방 국민들이나 텍사스인들이나 국적(國籍)만 다를 뿐 피지배자로서 제국에 맞서 저항했다는 뿌리는 같았다. 어이를 상실한 미 행정부는 신속히 태도를 바꿔 멕시코와의 전쟁 가능성까지 불사(不辭)하면서 1845년 12월29일 텍사스를 28번째 주(州)로 병합했다. 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앤슨 존스는 1846년 2월19일 공화국→자치주 전환 행사에서 “텍사스 공화국은 더 이상 없다” 선언했다.
유사의혹 A씨의 입막음식 고소‧고발
지금은 재야(在野)에 있는 야권 최고위층 출신 인사 A씨 과거 이력이 새삼 정치권 화두(話頭)로 떠오르고 있다. 그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의혹이었으나 이제야 수면 위로 부상 중이다.
한 정부부처(部處) 장관은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 출석해 “백선엽이 스물 몇 살 때 친일(親日)파라고 한다면 A씨 부친, 그 분도 (백선엽 장군과) 나이가 거의 똑같다. 그 당시(일제치하)에 (A씨 부친은) 흥남시 농업계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시청 농업부문은 한반도 양곡 수탈(收奪) 선봉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A씨는 정계현역 당시 해당 의혹에 대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서전에서 ‘월남전에서의 미국 패배에 희열을 느꼈다’는 취지의 주장 내놨다. 홍준표 현 대구시장은 2017년 4월 A씨와의 토론에서 “우리 장병이 5000여명 전사하고 공산주의가 이긴 전쟁인데 희열을 느꼈다는 건가” 지적했다.
전세계 어떤 나라든 부역자를 중용(重用)하고 나아가 자국 국가원수로 삼는 곳은 텍사스 공화국 등 극소수를 빼고 고래(古來)로 없다. 미국만 해도 독립전쟁 시기 영국에 빌붙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에 대한 보편적 시각은 지금까지도 ‘천하의 역적’이다.
A씨 의혹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허나 A씨가 명확한 입장 내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신(不信)이 커지는 건 사실이다. A씨는 현역시절 처럼 입막음식 고소‧고발 남발하는 대신, 한 치 부끄러움이 없다면 “아니다”고 당당히 말하고 입증증거를 내놓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따라붙는 건 텍사스 공화국 매국노들과 같은 수백년째 대를 잇는 비판일 뿐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