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육사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문제는 여야 대립과 갈등을 넘어 역사전쟁을 촉발시켰다. 지난 3월 육사방문 기회가 있어 문제의 흉상을 보고 순간 단상은 어? 이상하다였다. 홍범도 장군의 헌신적인 독립군 활동은 널리 선양해야 마땅하지만 대한민국 정체성에 반하는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까지 한 행적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공산당에 깊숙이 몸담았던 이의 상징물을 국가정체성 수호 전사 양성소에 설치하여 기리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본다.
역사의 평가는 현재 일이며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현재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작금의 논쟁은 마치 조선시대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당시 사람을 체포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모적이고 퇴행적이다.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뜻을 잘 되새겨야 한다.
이번 논란을 자초한 흉상 설치 당시 이해상관자인 군과 육사동문회 그리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청회 개최나 의견여론 수렴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분란거리를 잉태시킨 것이다. 그러니 국민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왜, 무엇 때문에 생도강의실 건물 앞에 흉상을 야밤에 도주하듯 서둘러 설치했는가? 또한 당시 육사 교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그들의 가치와 얼을 뒤흔드는 일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동조 내지 묵인을 했는가? 묻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며 군의 정치중립과 가치·철학을 등한시하며 역사의식 부재까지 보여준 행태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역사는 후견지명이어서 현재가 과거가 되기 이전까지 매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는 없다.
한편 야권과 그 지지층 행태는 자신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이 폄하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적 자기애(Collective narcissism)에 풍덩 빠진 느낌이다. 특정시각으로만 지각되는 뒤틀린 이미지로 반이성적인 정부여당을 비난하는 행태가 도를 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딸, 존재이유를 상실한 저널리즘과 좌편향 지식인 그리고 야당 행태가 흥미롭게도 이 개념과 한 치 오차 없이 꼭 맞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집단의 영광이 곧 나 개인의 영광이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단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무시하며, 부정적인 평가자(집단)은 언제든지 보복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북한과
체제경쟁에서 승패가 갈린 지 오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퇴행적 역사전쟁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친일논리와 반공논리는 그 어느 쪽도 반쪽짜리일 뿐으로 프로크로테스(Procrustean)의 침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압축적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 성공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질서에 기인한 것은 빼박 증거다. 고로 국가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법질서 유지라는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현 정부의 주장은 타당한 반면, 이를 부정하며 국론분열과 갈라치기를
일삼는 야당의 행태는 온당치 못하다.
코로나19·우크라이나 전쟁· 전략적 미중경쟁·기후변화가 야기한 외교·안보·경제
패러다임 대변환기에 소모적 당쟁으로 날을 지새울 만큼 한가롭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으로 신뢰와
확신의 협력관계로 묶고 제도화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물론 북·중·러 연대강화 부작용, 역내 문제의 조율된 대응협약에 따른
연루 딜레마,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대응 등 해결할 과제도 많다. 여야는 뜬금없는 역사전쟁으로 나라발목을 잡는 자멸행위를
멈추고 국익 극대화를 위해 능동적인 안보경제외교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9/05/20230905000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