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귀족주의‧우리끼리 판치는 국민의힘 일각
대권 쥘 필요 없다면 ‘인재=재벌’ 공식 고집하길
예자(豫子)의 이야기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라는 말이 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뜻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예양전(豫讓傳)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晉)나라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당시 주(周)나라 중심에 위치한 강국이었다.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진(秦)나라와는 다르다. 통치력 잃은 주천자(周天子)가 힘 못 쓰는 사이 이 진(晉)나라가 삼진(三晉)으로 분리됨에 따라 춘추시대는 막 내리고,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개막한다.
예양은 진(晉)의 여러 유력귀족들로부터 중히 쓰이지 못하면서 빈궁히 방황했으나, 지백(智伯)에게 중용돼 식솔(食率)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됐다. 춘추시대 말기 진은 소(小)전국시대처럼 여러 유력가문이 패권 다투고 있었다. 끝내 지씨(智氏)를 뺀 나머지 유력자인 조씨(趙氏)‧한씨(韓氏)‧위씨(魏氏)는 연합해 기원전 453년 지백을 살해하고서 진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조씨 가문 수장인 조양자(趙襄子)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해 술잔 또는 요강으로 썼다. 이 모욕적 소식 접한 예양은 피눈물 흘리며 조양자를 죽이려 했다. 홀홀단신으로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게 쉬울 리 없었으니 예양은 곧 조양자에게 사로잡혔다. 조양자는 “충신이로다” 감탄하며 예양을 놔줬지만 예양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복수에 나섰다.
예양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훼손하고 목소리를 바꿨다. 심지어 그의 아내마저 남편이 실종된 줄 알았다. 이 모습을 본 친우(親友)는 예양을 안타깝게 여겨 “왜 이렇게까지 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양은 상술한 “나를 알아준 이를 위해 죽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고대~중세에 임금 시해는 그 시도조차마저도 구족(九族)을 멸할 중죄였다. 허나 조양자마저도 예양의 충심(忠心)에 감탄하고 또 감동하고 말았다. 그의 앞에 재차 끌려온 예양은 “지백이 나를 선비로 존중했으니, 나 또한 선비로서 지백에게 보답하려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론(辯論)했다.
끝내 눈 감고서 탄식 내뱉은 조양자는 예양을 ‘예자(豫子)’라고 극존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대를 법도(法度)에 따라 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나는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그대의 옷이나마 베어 지하(地下)의 지백에게 고(告)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예양의 마지막 간청을 받아들였다. 의식을 끝낸 예양이 칼 위로 엎어져 자진(自盡)하자 삼진의 식자(識者)들은 옷깃으로 눈물 훔쳤다.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이야기
그로부터 수백년이 흘러 전국시대. 피를 피로써 씻는 혈전(血戰) 벌어지던 야만(野蠻)의 시대에 네 명의 영웅이 홀연히 나타났다. 바로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다. 이들은 비록 군주의 지위는 아니었으나 각 국 유력자로서 인재를 그러모아 패권(霸權)을 도모했다. 선두주자는 단연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생몰연도 ?~기원전 278)이었다.
전문은 제(齊)나라 왕족이었으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의 부친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은 무당‧점괘를 크게 신봉하던 인물이었다. 전영은 얼자(孼子)인 전문이 태어나자 “불길하다”며 내다 버리도록 했다.
그러나 자식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모친에 의해 전문은 몰래 길러졌다. 자연히 전문은 엘리트 교육과정 마쳤을 리 없었다. 그렇게 배 곯다가 마침내 장성한 전문은 부친 앞에 나타났다. 대로(大怒)한 전영이 “당장 죽여라”고 외치자 전문은 차분하고도 논리적으로 부친 주장을 단 한마디에 논파(論破)했다.
전문은 우선 “어째서 저를 버리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전영은 “속설(俗說)에 5월5일에 태어난 아이는 문설주만큼 자라면 그 아비를 해친다고 한다”고 답했다. 이에 전문은 “사람 목숨이 하늘에서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문설주에게서 받은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당황한 전영이 입 열지 못했다. 전문은 “사람 목숨은 천명(天命)이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설사 문설주에게서 받은 목숨이라 해도 문설주 높이를 키우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뒤늦게 깨달은 전영은 얼자인 전문을 가문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에 전문은 장가조차 들지 않은 채 천하인재 영입에 심혈 기울였다. 바로 식객(食客)이었다.
돈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유능한 건 아니고, 유능하다고 해서 다 부자인 건 아니니, 인재들에 대한 의식주(衣食住) 제공, 즉 공직(公職)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든 일자리를 제공하는 건 기본이라는 걸 전문은 꿰뚫어본 것이었다. 실제로 동서양 영웅호걸들 중에는 걸인 출신의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오를레앙(Orleans)의 성녀(聖女) 잔다르크(Jeanne d’Arc) 등 서민 출신이 무수하다.
전문의 인재관(人材觀)은 여느 배부른 귀족들이 볼 땐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의 식객 중에는 이름난 학자‧무인은 물론 ‘개 흉내’를 잘 내거나, ‘닭 울음소리’를 기막히게 흉내 내는 사람도 있었다. 혹자(或者)는 “저 따위가 뭘 하나”라고 비웃었지만, 개‧닭의 재주꾼들은 자신을 알아준 선비를 위해 끝내 누구도 할 수 없는 활약 펼쳤다.
전문은 어느날 외교관 신분으로 강대한 진(秦)나라를 방문했다. 전문의 능력을 두려워한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졸지에 전문을 잡아 가뒀다. 이에 전문은 소양왕의 총애 받는 후궁(後宮) 도움을 받기로 하고 ‘미꾸라지’ 같은 사람을 보냈다. 후궁은 “귀하디 귀한 호백구(狐白裘‧여우 겨드랑이 흰 털로만 만든 옷)를 주면 내 생각해보마”라고 했다.
이미 호백구를 소양왕에게 바친 터라 전문이 땅을 치던 그 찰나, 개 흉내를 잘 내는 식객이 미꾸라지 도움을 받아 야밤에 궁궐로 잠입했다.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철통경계 서고 있었으나, 식객은 들킬 때마다 땅에 코 대고 킁킁거리거나 기둥에 볼일 보고 으르렁 멍멍했다. 장졸(將卒)들이 “정말 개 같군” 할 사이에 식객은 잽싸게 궁궐로 들어가 기어이 호백구를 갖고 귀환했다. 이 호백구는 미꾸라지에 의해 다시 후궁에게로 보내졌다.
후궁은 “전문 그까짓 것 잡아가두면 대왕(大王) 위신만 깎이옵니다” 베갯머리송사에 나섰다. 간드러진 목소리에 풀려난 전문은 그 길로 모든 식객 이끌고 본국(本國)으로 미친 듯 내달렸다. 그런데 관중(關中)과 관동(關東)을 잇는 거대한 함곡관(函谷關)이 앞을 가로막았다. 관문은 새벽 첫 닭이 울기 전까진 열리지 않았기에 전문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 때 또다른 식객이 나서서 바이브레이션 섞인 구성진 목소리로 “꼬끼오” 울었다.
여기까지 읽고 보면 계명구도(鷄鳴狗盜)의 활약은 언뜻 실소(失笑)를 낳게도 하지만, 실상 이들로선 목숨 걸고 주인을 살린 것이었다. 미꾸라지‧개‧닭의 식객은 마음만 먹으면 저 혼자 달아날 수 있었으나, 끝내 자신을 알아준 이를 위해 예양처럼 제 목숨을 걸고 도박해 멋지게 성공시킨 것이었다.
사마천은 왜 이들을 상세히 기록했나
필자는 오랜 기간 국민의힘 및 그 직계(直系) 정당들과 연 맺어왔다. 국민의힘은 장점도 있지만 한가지 크나큰 치명적 약점이 있다. 바로 ‘공짜주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위세 얻은 이들은 아랫사람으로부터 조언‧전략 얻는 걸 너무도 당연히 여긴다. 그러면서 당사자들이 굶든 말든 “그건 네 사정이고” 고개 돌린다. 오히려 “내가 네 의견 들어주는 것만해도 영광으로 알라” “그러기에 어디 돈도 없는 천출(賤出)이 양반들 노는데 끼어들고 말야”는 식이다.
이러한 풍조(風潮)는 중간직들에게도 종종 전염된다. 능력 있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건지, 돈이 돈을 낳아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건지 알 순 없지만, 중간직들은 예양‧계명구도 같은 인재들과 주군(主君) 간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차단하고서 농단 일삼곤 한다. 이들 눈엔 주군의 성패(成敗) 여부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安危)만이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풍경을 너무도 오래 보아왔고, 이제는 지칠 지경이다.
아무리 풍진세상(風塵世上)이라 해도 결국은 지백‧조양자‧맹상군이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같은 이는 출현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비록 누군가의 눈엔 참새처럼 보이더라도 그 속엔 봉황(鳳凰)의 지략‧능력 갖춘 출중한 인재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로 가면 그 뿐이다. 그리고 한 번 떠나간 인재는 강태공(姜太公)의 복수불반(覆水不返)처럼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다.
2023년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치세(治世)가 아니다. 적자생존의 난세(亂世)다. 항우(項羽)는 제 혈통‧재력‧위세만 믿고서 귀족주의에 젖거나, 탐욕스런 중간책에게 인사(人事)를 일임(一任)했다가 결국엔 패가망신했다. 땅이나 파던 한고조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 덕에 새 세상의 주인이 됐다. 선택은 그들 몫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한국 역사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각자 다르겠지만 저는 5공 시절 '장세동' 안기부장이 떠오릅니다. 군 복무시절 육사 출신의 지휘관 운전병을 하면서 장세동씨를 자주 뵈었습니다. 남자가 남자를 보고 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20대 초반의 저에게 비친 장세동씨의 이미지는 너무 강하고 선이 굵은 분이었습니다.
살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 말이 회자되는 줄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TK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다시 대통령 출마하면 찍어준다는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집권을 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문제가 많았지만 어쨌든 집권 후에는 안보가 튼튼하고, 국민들 먹고 사는 것 걱정 안 하게 해주었고, 길거리에 깡패들 없었고, 열심히 살면 내집 마련의 꿈도 이룰 수 있었으니 서민들에게는 이 보다 더 고마운 대통령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공직 또는 권력의 언저리에 있었던 분들은 누구에게나 공과는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쳇말로 "해먹어도 있는 놈들 것 해먹었지 없는 서민들 것 해먹지는 안했잖아"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국민들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5.6공 시절이 오버랩 되면서 가끔씩은 "아 옛날이여~"를 부르짓나 봅니다.
저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태국의 잠롱시장 같은 그런 분이 없는 것일까?
한국은 대통령하고 국회의원을 제일 먼저 수입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지금 한국은 분명 치세는 아닌 난세임은 분명한데 그 영웅이 언제쯤 모습을 드러낼지 기대가 됩니다.
영웅은 결코 혼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시대와 함께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대의가 우선이고 저도 그 뜻을 추구하고자 불혹 넘게 살아왔습니다. 허나 대의를 모르면서 중간에서 자라나는 싹들 짓밟고 꿀 빨며 농간하는 이들 눈치보며, 정작 주군과는 소통경로조차 차단된 채, 저 혼자 대의를 추구한답시고 손가락 빨다 시체 되면, 대의을 이루는 건 고사하고 좁은 국토에 무덤만 늘어날 뿐이죠.
국민의힘 중 어느 곳이라고 말씀드리긴 뭣합니다만, 이게 하루이틀이 아니란 게 문제입니다. 당 안팎의 많은 인재님들 하소연을 옮깁니다. 저는 수레로 천명 만명쯤 옮기다 보면 나올만한 아둔한 사람입니다. 허나 분명히 아는 건, 우리 당에도 분명 지백, 맹상군, 한고조 같은 분들이 계시긴 합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길로 가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선비가 아니라 간신의 전형입니다. 잘못되면 지적할 줄 알아야 진정한 선비이자 충신입니다.
조그마한 촌동네 출신이고 당시 젊은 놈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부터 선거사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군대 전역하고 기별도 없이 집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저는 동네에서 그저 용접꾼으로 통했습니다. 선거사무실을 가면 어디 휴대폰 총판하는 아저씨 어디 병원장 전직 대기업 임원 중소사장 으리으리한 라인업 사이에 껴서 보잘것없는 용접수는 부담없이 여러 사람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할수 있었습니다. 노가다 꾼이지만 동네 영감들 표는 가지고 있는 아주 편리한 위치였죠.
정말 여러 인간 군상이 있었습니다. 지역 신문사랑 친한 으스대는놈. 편법 대마왕. 중국 졸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이 선거사무실들에서 민주당이든, 새누리당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대학생들을 아주 ㅈ으로 봤습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선거에 이용되고 선거가 끝나면 저 걔들 연락처는 어디 네이버 주소록 같은데 짱박아 두었습니다. 힘없는 용접꾼은 걔들이랑 고기나 먹으면서 인생이야기 듣는게 취미였습니다. 아 예의바른척 하느라 수고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얻어갈건 인생경험 뿐이다.
이 대학생들은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속아봤습니다. 그것도 정치인한테. 10년 뒤에 이 친구들중 연이 닿은 대부분은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선거운동했던 반대쪽에 서있었습니다. 이친구들은 결코 무능하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 들를 때마다 뭐하나 더 챙겨주고 뭔가 할때 기꺼이 힘을 빌려주는 든든한 아군이 되었습니다.
네이버 주소록에 얘들을 짱박아둔 영감님들은 다른 사람의 네이버 주소록에 짱박혀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연속성에서 주변사람을 써먹을 생각을 좀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뒤따르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게 아니라 나와 동등한, 나보다 위로 갈수있도록 도와준다면 오히려 더큰 이익을 볼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젊을수록 나의 노후는 더욱 안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옛날일 생각나서 주저리주저리 두서없이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