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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굿바이 진나라, 굿바이 더불당

오주한

기명투표 통한 ‘수박’ 색출로 악명 떨친 환관

위기의 비명계, 이사 아닌 장한의 처세 따르나

 

비주류에서 주류로

 

수백년 간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은 건 잘 알려졌다시피 진(秦)나라다. 진나라는 시황제(始皇帝) 친부(親父) 아니냐는 의혹의 상방(相邦) 여불위(呂不韋) 등 출생비밀을 둘러싼 막장드라마, 형가(荊軻)의 시황제 암살시도와 비장함 넘치는 역수가(易水歌), 진시황릉(秦始皇陵)‧만리장성(萬里長城) 등 대규모 토목공사, 분서갱유(焚書坑儒) 등 안 좋은 쪽으로 (물론 업적도 일부 있지만) 많이 유명하다.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 주장한’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도 숱한 이야기 중 하나다. 고사의 주인공은 통일 진제국(秦帝國)을 단 2대만에 멸망으로 몰아넣은 간신(奸臣)의 대명사 환관 조고(趙高‧생몰연도 ?~기원전 207)다. 내시의 몸으로 황제를 꿈꾼 조고는 반대파 색출을 위해 이 웃기지도 않는 희대의 기명투표(記名投票)를 실시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등에 의하면 조고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조(趙)나라 왕족(王族) 출신이다. 목숨 바치는 대신 궁형(宮刑)을 당한 또는 택한 조고는 부새령(府璽令‧옥새를 관리하는 직책)이 돼 시황제를 바로 옆에서 수행(隨行)했다.

 

불로장생(不老長生) 꿈꾼 말년의 시황제는 암살 등이 두려워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조고만을 통해 문무백관(文武百官)들과 소통했다. 시황제는 “환관은 사람이 아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12~2013년 드라마 초한전기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라는 조고의 대사가 나온다.

 

축생(畜生) 취급당한 조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승상(丞相) 이사(李斯)도 부러워할 권세를 누렸다. 백관들은 상소(上疏)를 위해 한낱 환관에게 머리 조아려야 했다. 만약 조고가 작정하고 황명(皇命)을 위조한다 해도 시황제‧백관들 누구도 알아채기 힘들었다. 실제로 조고는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시황제 사후(死後) 사실상의 황제처럼 전횡(專橫) 일삼았다.

 

진나라의 운명은 시황제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시황제의 장남 부소(扶蘇)는 부친과 달리 유가(儒家)적 인물로서 분서갱유를 반대했다. 노한 시황제는 부소를 머나먼 북방으로 보냈다. 또 장수 몽염(蒙恬)과 함께 장성(長城) 축조(築造)를 감독하고 흉노(匈奴)를 막도록 했다. 아들을 내쫓았다기보다는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무덤’ 축조가 왜 필요하고, 이를 비난하는 유생(儒生)들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후계자 북방전출(轉出)은 결과적으로 시황제의 자충수(自充手)가 됐다. 시황제는 전국순행(巡幸) 중이던 기원전 210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급사(急死)했다. 당시 어가(御駕)에는 시황제‧조고 단 두 사람만 있었다. 시황제는 죽기 직전 어질고 현명한 부소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조고는 부음(訃音)을 알리고 유조(遺詔)를 공포하는 대신 숨겼다. 대신 승상 이사, 시황제의 또다른 아들 호해(胡亥)를 은밀히 불렀다. 그리고는 “황제의 옥새(玉璽)가 여기 있다. 선황(先皇) 유조를 위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부소 대신 호해를 이세황제(二世皇帝)로 모시고 우리 모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려보자. 우리 셋만 입 다물면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것”이라고 유혹했다.

 

이사는 처음엔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조고를 꾸짖었다. 그러나 조고의 “유가적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부소는 법가(法家)인 당신 일족을 도륙할 것”, 호해의 “내가 등극하면 승상을 의부(義父)로 모실 것” 등 감언이설(甘言利說)에 결국 설득당하고 말았다.

 

이사가 말없이 고개 끄덕이자 음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고는 거짓유조를 발표해 호해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동시에 또다른 거짓유조를 부소‧몽염에게 보내 자결(自決)을 명했다. 몽염은 “이건 가짜다”고 외쳤지만 부소는 “부황(父皇) 명을 받들어 지하에서 아버님을 모시겠다”며 끝내 목숨 끊었다.

 

부소가 살았다면 그를 앞세워 “간신‧역신(逆臣)을 타도하자”며 대군(大軍) 이끌고 수도 함양(咸陽)으로 향했겠지만, 몽염 혼자서는 조고의 간계(奸計)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나”고 부르짖은 몽염은 곧 “장성 공사로 지맥(地脈)을 끊었으니 나는 죽어 마땅하다”며 스스로를 억지위안한 뒤 부소 뒤를 따랐다.

 

“세력 안위(安慰) 따윈 개나 줘버려”

 

보위(寶位)에 오른 어리석은 호해는 어마어마한 폭정(暴政)을 펼쳤다. 시황제의 경우 그래도 분명한 국정(國政)목표가 있었고 국가 대소사(大小事)도 일일이 챙겼지만 호해는 그마저도 없었다.

 

호해는 우선 옥좌(玉座)를 위협할 여지가 있는 형제‧누이 수십명을 순장(殉葬)을 구실로 산 채로 황릉에 파묻었다. 1970년대부터 발굴되고 있는 진시황릉에서는 사기의 기록대로 팔다리가 토막 나거나 사지(四肢)가 찢긴 처참한 상태의 유골(遺骨)들이 대거 출토(出土)됐다고 한다.

 

온 황궁(皇宮)을 피칠갑한 호해는 조고에게 정사(政事)를 일임했다. 자신은 궁녀들 치마폭에 싸여 궁궐 밖 현실과는 천만리 떨어진 격양가(擊壤歌)만 불러댔다. 전국각지에서 백성들 비명이 솟구치고 급기야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亂)이 발발했지만 조고는 “천하가 태평하옵니다”고 아뢰었다. 황제의 아부(亞父‧의부)는 이사가 아닌 조고가 됐다.

 

나라꼴을 보다 못한 이사는 누차 호해를 만나 고언(苦言) 올리려 했으나 번번이 조고에 의해 가로막혔다. 조고는 이러한 이사마저도 제 권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제거에 나섰다. 조고는 어느날 큰 선심(善心)이라도 쓰듯 “천자를 배알(拜謁)하게 해주겠소”라고 말했다. 안도의 한숨 내쉰 이사가 황궁에 들어가자 호해는 궁녀들과 낯 뜨거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호해는 “감히 짐(朕)의 흥을 깨다니”라고 내심 생각하며 이사를 불쾌히 여겼다.

 

쾌재(快哉) 부른 조고는 호해‧이사 관계를 파탄 낼 결정타를 날렸다. 마침 호해는 진승오광의 난 발발 사실 및 관군(官軍) 패전소식을 어찌어찌 알게 됐다. 이에 조고는 “이건 다 이사의 장남이자 삼천군(三川郡) 태수인 이유(李由)가 도적들과 내통하고 길을 터줬기 때문”이라고 모함했다. 안 그래도 제 술자리에 난입(亂入)해 쓴소리나 해댄 이사를 아니꼽게 여기던 호해는 벌컥 화내며 “역도(逆徒)를 잡아들여라”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사는 투옥 후 모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하고서 아들과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졌다. 이사는 허리가 잘리기 직전 아들에게 “너와 함께 또 한 번 누렁이 데리고 동문(東門) 밖으로 나가 토끼사냥 하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겠구나”고 처량히 말했다. 부자(父子)는 나란히 죽임 당했으며 이사의 삼족(三族)이 멸족(滅族)됐다. 이사뿐만 아니라 곽거질(霍去疾)‧풍겁(馮劫) 등 대쪽 같은 군자(君子)들 대부분이 모조리 숙청됐다.

 

진나라 마지막 명장(名將) 장한(章邯)도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조고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장한에게 병권(兵權)을 주면서도 그를 24시간 감시했다. 장한은 진승오광의 장초(張楚)에 맞서 연전연승(連戰連勝)했으나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명줄은 짧아졌다. 장한이 전쟁에서 마침내 압승(壓勝)한다면 그 길로 그를 시기한 조고에 의해 멸족될 게 분명했다. 이에 장한은 어제까지 창칼 맞대며 그 숙부를 참했던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투항하는 치욕을 겪었다.

 

기명투표로 ‘마지막 수박’ 색출

 

부소‧몽염에 이어 이사‧장한마저 사라지고 온 조정이 자신 앞에 엎드려 기자 조고는 본색(本色)을 드러냈다. 그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엄인(閹人)황제’가 되겠다는 흉계(凶計)를 꾸몄다. 이를 위해 조고는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수박’ 색출에 나섰다.

 

조고는 호해에게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여드리겠다”며 백관들을 빠짐없이 소집했다. 황궁에서 호해‧백관을 기다린 건 ‘한 마리 사슴’이었다. 조고는 사슴을 가리키며 “폐하께 명마(名馬)를 바치옵니다”고 했다. 당연히 호해는 “승상(조고)이 잘못 아시는구려. 저건 사슴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고는 “그럼 여러 백관들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시지요”라며 ‘기명투표’를 제안했다.

 

호해는 대신(大臣)들에게 “저게 사슴이냐 말이냐”고 물었으나 누구도 선뜻 대답 못했다. 이들은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조고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씩 “저건 분명 말이옵니다”고 맞장구쳤다. 일부는 목구멍 밖으로 나올락 말락 하는 “저건 사슴이옵니다”를 꿀꺽 삼키며 식은땀 흘리고 침묵했다. “사슴”이라는 답변은 극소수에 그쳤다. 멍청한 호해는 이게 그저 새로 나온 놀이인 줄만 알고 “그래, 승상 말대로 저건 말이 맞소”라며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조고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조회(朝會)가 파하자마자 침묵하거나 진실을 말한 백관들을 모조리 끌어내 목을 쳤다. 공포분위기에 휩싸인 조정은 조고가 마분(馬糞) 더러 된장이라 해도 맞다고 소리치며 맛 볼 지경까지 됐다.

 

조고는 나아가 “황상(皇上)께서 정신병에 걸려 사슴을 말이라 주장했다”는 취지의 소문을 퍼뜨렸다. 또 사위 염락(閻樂)을 시켜 치료를 빙자해 감금된 호해를 끝내 살해했다. 염락은 조고가 환관이 되기 전 낳은 딸과 혼인한 인물이었다. 염락의 군마(軍馬)가 황궁에 난입했지만 누구 하나 막는 이가 없었다. 운명을 직감한 호해는 “제위(帝位)를 넘길 테니 왕(王)으로 살게 해 달라” “안 되면 열후(列侯) 자리를 달라” “안 되면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넌 죽어야 한다”였다.

 

부소‧몽염‧이사‧장한에 이어 황제마저 시해(弑害)해 진제국을 무너뜨린 조고는 거리낄 게 없었다. 옥새 움켜쥔 조고는 면류관(冕旒冠) 쓰고서 옥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만약 그 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지진이 나지 않았거나,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병마(兵馬)가 함양 코앞에 이르지 않았다면 초유의 ‘환관의 왕국’이 세워졌을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고대국가에서 지진 등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최악의 경우 “임금이 부덕(不德)한 탓”이라는 비난 앞에 폐위(廢位)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제국을 멸(滅)하러 온 반란군 앞에서 즉위해봤자 돌아오는 건 “저놈이 삼세황제(三世皇帝)다”는 손가락질과 날아드는 창칼뿐이었다.

 

비명계, 장한의 처세(處世) 눈여겨보길

 

더불어민주당에서 ‘기명투표’ 논란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다. 당내 일각에서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표결(表決)을 기명으로 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자 이재명 대표가 사실상 맞장구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는 현재 각종 범죄혐의로 피의자(被疑者) 신분인 상태다. 그는 앞서 누차 구속위기를 겪었으나 현역 국회의원 신분 등을 통해 피해갔다. 때문에 체포동의안 표결을 기명투표로 하자는 건 곧 이 대표 체포를 찬성하는 민주당 의원들, 속칭 ‘수박’이 누구인지 실명을 파악하겠다는 으름장으로 민주당 비명(非明‧비이재명)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명투표 주장을 두고 민주당 외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국회에서 일부 안건을 무기명(無記名)투표하는 이유는 국회의원들이 외압(外壓)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국회법 112조 5항은 “인사(人事)에 관한 안건 등은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고 못 박고 있다. 국회의원 체포동의안도 인사 관련 사항이다. 기명투표는 “겸직(兼職)으로 인한 의원사직과 위원장 사임에 대해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협의한 경우” 정도에만 허용된다.

 

윤 원내대표는 “현재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이 대표) 강성지지층에게 ‘수박’으로 찍혀 조리돌림당할 것이 두려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가 체포동의안 기명투표에 찬성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고’의 사례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진제국은 조고의 행각 앞에 왕국(王國)으로 크게 축소됐다가, 조고에게 추대된 시황제의 손자 자영(子嬰) 대에 가서 흔적도 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심지어 다른 제후국들이 속속 재건(再建)될 때도 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3개국으로 갈가리 찢겨졌다. 비명계 주장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비명계 처지가 인간적으로는 다소 안타깝긴 하지만, 필자 개인의 정치성향 측면에서는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의 처지는 어쩌면 자업자득(自業自得)일 수도 있다. 자기가 저지른 업보(業報)는 제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법, 그저 비명계의 무운(武運)을 빌 따름이다. 어쩌면 장한처럼 상대 정당이나 제3지대로 적(籍)을 옮기는 게 하나의 생존방도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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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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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dol7707

    장한은 기껏 초나라에 투항했더니 항우는 신안대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과연 장한은 어떤 심정일까요?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7.26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장한도 진나라 시절 잘했다고 할 순 없으니, 신안대학살 옳고 그르고는 접어두고서라도, 장한의 업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왕이 돼서 잘 먹고 잘 살다가 한신에게 패해 업보를 짊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