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행동대장 자처 끝 ‘좌단의 철퇴’ 맞은 심이기
洪 징계심사에 당‧민심 분노↑…여후본기 필히 읽길
측천무후의 부정적 측면의 롤모델
고황후(高皇后) 여치(呂雉‧생몰연도 기원전 241~기원전 180)와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기원전 177). 전한(前漢) 초기 사람인 둘은 안 좋은 쪽으로의 수어지교(水魚之交)다. 여치는 웬만한 고어영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한 농단(壟斷) 일삼은 인물이다. 심이기는 여치의 막장드라마 조연(助演)이 돼 꼬리치다가 든든한 백이 사라짐과 동시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난신(亂臣)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등에 의하면 여치는 본래 부족할 것 없이 살던 집안 여식(女息)이었다. 그의 부친 여공(呂公)은 어느날 가족과 함께 패현(沛縣) 풍읍(豊邑)이라는 시골마을로 이사했다.
혼기(婚期)가 지난 딸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뚜쟁이들이 찾아왔으나 여공은 모두 물리쳤다. 여공은 비단옷 대신 누더기 입고, 풍월(風月) 읊는 대신 궁둥이나 벅벅 긁던 유계(劉季)라는 현지청년과 딸을 혼인시켰다. 유계라는 이름은 용(龍)의 기운 따위와는 광년단위로 거리가 먼 ‘유씨네 막둥이’ 정도의 의미다. 일설에는 놀라 자빠진 유계가 “귀한집안 여식인데 가당키나 한가”라고 정색하자 여치가 직접 나서서 유계에게 덤벼들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여걸(女傑) 기질 다분했던 여치는 ‘반달’ 남편이 사고 쳐서 파출소 들락거릴 때도 묵묵히 집안을 다스렸다. 남편이 진시황릉(秦始皇陵) 공사장 인부로 차출돼 떠난 후에도 홀로 장녀‧유영(劉盈) 두 자식을 키웠다.
여치가 두각(頭角) 드러내기 시작한 건, 공사장 도착시기를 제 때 맞추지 못해 죽게 된 남편이 혹독한 진(秦)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부터다.
지각은 물론 인솔하던 인부들 머릿수도 못 채우게 된 유계는 무리를 이끌고 망탕산(芒砀山)으로 도주했다. 사기는 “적제(赤帝)의 아들이 백제(白帝)의 아들을 삼척장검(三尺長劍)으로 베고 떨쳐 일어났다”는 식으로 기록했지만, 실상 망탕산 시절 유계 무리는 더도 덜도 아닌 그저 거지떼일 뿐이었다.
주린 배 부여잡고 골골 앓던 유계를 살린 건 여치였다. 그녀는 남편이 어디 있든 귀신같이 찾아내 품속의 찐빵을 건네곤 했다고 한다. 때마침 터진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亂)을 틈타 유씨네 막둥이, 즉 훗날 400년 한(漢)나라를 창업(創業)하게 되는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패현을 기적같이 접수하자, 여치도 건국대업(建國大業)의 장도(壯途)에 올랐다.
여치의 삶은 한마디로 ‘고난’이었다. 위로는 시부모님 등 대가족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들 돌보던 여치는 남편 따르며 마을 지키던 옹치(雍齒)가 배반하자 졸지에 투옥됐다. 이후엔 남편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됐다는 소식에 일껏 찾아 떠났으나, 남편과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의 포로가 됐다. 어느 경우든 여자로선 감당하기 힘든 고초가 동반됐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여치는 시아버지를 산 채로 삶아 죽이려는 항우에게 두 눈 부릅뜨고 따지는 등 여전히 기개(氣槪)를 잃지 않았다. 항우에게 초인목후이관(楚人沐猴而冠‧갓 쓴 원숭이)이라 놀렸다가 열탕(熱湯)에서 육수 우려내며 비명횡사한 한생(韓生) 사례처럼, 이는 목숨 내놓은 발악이었다.
후대의 여황(女皇)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연상케하는 여치의 성품은 여중호걸(女中豪傑)의 억센 모습을 투영함과 동시에, 사실상 두 명의 천자(天子)가 군림하게 되는 전한 조정에 불어 닥치게 될 피바람을 예고하는 전조(前兆)로 작용했다.
‘인간돼지(人彘)’
마침내 항우를 무찌른 유계는 황제에 즉위했다. 여치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첫 황후가 됐다. 생사(生死)가 오가는 오랜 전쟁 겪고, 항우의 화살에 부상 입었으며, 죽마고우(竹馬故友) 노관(盧綰) 등 여러 이성(二姓) 제후왕(諸侯王)들 반란에 트라우마까지 입은 유계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반면 여치는 한층 팔팔하게 독기(毒氣) 오른 상태였다. 그는 마치 지난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황후 신분으로 해선 안 될 월권(越權)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지옥에도 멸시받은 여자와 같은 분노는 없다(Hell hath no fury like a woman scorned)”는 속담은 여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전횡(專橫)이었다.
초한(楚漢)전쟁에서의 한나라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한신(韓信)‧팽월(彭越)을 직접 숙청한 건 여치였다. 유계가 토사구팽(兔死狗烹)에 착수한 건 사실이지만, 영포(英布)처럼 대놓고 반기(反旗)들지 않는 이상 대상자를 죽이려는 마음까진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그러나 여치는 군왕(君王)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돼 폐인처럼 살던 한신을 장락궁(長樂宮)으로 불러 기어이 죽여 버렸다. 폐서인(廢庶人) 돼 산간벽지 파촉(巴蜀)으로 귀양 가다가 억울함을 호소한 팽월도 도와주는 척 수도 장안(長安)에 데려간 뒤 깔깔 웃으며 멸족(滅族)했다. 팽월의 경우 그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나눠 담은 뒤 여러 제후들에게 배송했다.
나중에는 후궁으로서 유계 총애를 받았던 척(戚)부인 모자(母子)도 잔인하게 숙청했다. 여치는 2대 황제 혜제(惠帝)가 되는 아들 유영의 처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척부인 소생(所生)인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를 끝내 독살했다. 심성이 착했던 유영은 젖먹이 이복동생을 늘 곁에 두며 지켰으나 소용없었다.
여치는 동시에 “저 년이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며 척부인의 긴 머리를 삭발하고 목‧발목에 쇠고랑을 채워 투옥해 인면수심(人面獸心) 흉악범들에게 윤간(輪姦)당하도록 했다. 이후엔 아예 눈알과 혀를 뽑고, 귀엔 유황(硫黃)을 쏟아 부으며, 사지(四肢)를 절단한 뒤 뒷간을 겸하는 돼지우리에 던져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에게 이 지옥도(地獄道)를 강제로 보게 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라고 외친 아들이 실성(失性)하자 여치는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쯧쯧” 하며 혀를 찼다. 충격 속에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주색(酒色)에 빠진 유영은 22세 나이로 요절(夭折)했다.
이러한 참혹한 숙청 구실 취지는 ‘자신이 직접 황위(皇位)를 넘보거나 제 자식을 황위에 앉히려 한 한신‧팽월‧척부인의 월권’이었다. 노쇠한 유계는 여치의 이 끔찍한 월권을 그저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멸망을 도운 심이기
정작 가장 심각한 월권‧내로남불을 저지른 건 여치 그 자신이었다. 여치는 국정(國政)에도 깊이 관여했다. 유계가 임종 앞두자 여치는 승상(丞相) 소하(蕭何) 후임으로 누구를 삼을지를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러 조정대신들이 소하와 함께 유조(遺詔)를 받들어 특정인에 의한 날조(捏造)를 막아야 했지만 여치는 자신이 조정 2인자임을 과시했다.
유계가 “조참(曹參)이 좋겠다”고 하자 조참 다음은 누구로 할지 물었다. 유계가 “왕릉(王陵)이 맡고 진평(陳平)‧주발(周勃)이 그를 보좌토록 하라”고 하자 여치는 “그 다음엔?”이라고 물었다. 그녀에게서 미운 정 고운 정 등 남편 잃는 슬픔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날 학계는 여치의 이같은 행각을 두고 “새 재상은 여씨(呂氏)가 맡도록 하라”는 대답을 유도하려 했을 것으로 추측 중이다.
실제로 여치는 “이성(二姓)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국법(國法)마저 무시한 채 동족(同族)을 제후왕에 삼고, 남편의 직계(直系)후손들을 줄줄이 황위에서 폐위(廢位)시키는 ‘여씨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유계도 ‘여씨천하’를 만들려는 아내 의중(意中)을 알아챘는지, 집요하게 후임을 묻는 질문 앞에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내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라고 쏘아붙였다.
여치의 전횡을 도왔던 최측근 심이기도 ‘든든한 백’을 업고 월권에 앞장섰다. 심이기는 패현 시절부터 여치를 따랐다. 여치‧심이기는 거의 항상 붙어 다녔으며, 이는 유계가 부재(不在) 중인 항우 포로시절 때 절정을 이뤘다. 때문에 심이기는 속된 말로 여치의 ‘세컨드’라는 소문이 당대(當代)에도 파다했다.
별 공적(功績)도 없음에도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심이기는 낭중령(郞中令)을 겸하면서 궁궐 안팎을 삼엄히 감시했다. 낭중령은 궁궐출입을 관리하는 직책으로서,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환관(宦官) 조고(趙高)도 자신이 직접 낭중령을 겸하거나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혀 권세(權勢) 휘두른 바 있었다.
멀쩡히 황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이기는 여치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결재(決裁)를 도맡다시피 했다.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진 여치가 베일 뒤에 숨어 하명(下命)하면, 행동대장 심이기가 팔 걷어붙이고서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여후 지시로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 생모(生母)를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심이기였다. 공교롭게도 유계의 붕우(朋友) 노관이 숙청의 불안에 떨게 될 무렵 그를 접객(接客)하려 한 것도 심이기였다. 한신·팽월·척부인 등 숙청에서도 심이기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충복(忠僕) 앞세워 월권 등 혐의로 정적(政敵)들을 숙청한 여치는 정작 심이기 행위엔 침묵하면서 그를 아꼈다.
“주발이 외치자 모두가 왼쪽어깨 드러내다”
심이기의 운명은 그 상전(上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여치가 죽자 그간 그의 눈치만 보며 따르거나 숨죽였던 문무백관(文武百官)들 상당수가 봉기(蜂起)했다. 제후왕 등 조정 안팎에 알박기하던 여씨일족은 진평‧주발에 의해 뿌리 뽑혔다.
상장군(上將軍) 여록(呂祿)을 속여 병권(兵權)을 인수받은 주발이 “한나라를 따를 자는 좌단(左袒‧왼쪽 어깨를 드러냄)하라”고 외치자 모든 장졸(將卒)‧백성이 좌단했다 할 정도로, 월권‧내로남불 일삼은 여치와 그의 충견(忠犬)은 만인(萬人)의 공적(公敵)이었다.
‘백’이 사라진 심이기도 최후를 맞았다. 그는 특유의 술수(術數)로 미꾸라지처럼 상당기간 위기를 피해갔으나 끝내 회남여왕 유장에 의해 목숨 잃었다. 임지를 떠나 입조(入朝) 때부터 유장은 ‘어머니의 원수’ 심이기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유장이 만나기를 청하자 아직도 제 세상이라고 착각하던 심이기는 당당히 응했다. 심이기는 그 자리에서 무자비한 철추(鐵椎)세례에 쓰러진 뒤 산 채로 생살이 포(脯)에 떠졌다. 살인죄는 황족(皇族)이라 해도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으나, 조야(朝野)는 “여치 앞잡이가 이제야 죗값 치렀구나”고 박수치며 집단 탄원서(歎願書)를 올렸다. 황제 문제(文帝)는 유장의 죄를 일절 묻지 않았다.
26일 오후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홍준표 대구시장 징계(懲戒)수위 심사에 돌입했다. 정치권에서는 수해(水害) 관련 구설수에 오른 당내 인사들이 적지 않음에도 유독 홍 시장 징계심사만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또 강경자세로 임하는 것을 두고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오간다. 그 중에는 제 권세에 위협적인 이들을 심이기 앞세워 잔인하게 숙청했던 여치와 같은, ‘누군가’의 의중에 따른 모종(某種)의 정략적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있다.
심이기는 조금만이라도 양심(良心)적 행동에 나섰더라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는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허나 여치의 충복‧행동대장이 돼 ‘나라의 기둥’을 뿌리 뽑는 등 악행(惡行)에 앞장선 결과 만인의 공분(公憤)을 샀다. ‘집단좌단’ ‘집단탄원’에서도 드러나듯 누구도 심이기를 변호(辯護)하지 않았다.
권력은 짧고 인생은 길다. 당심(黨心)‧민심(民心)이라는 하늘은 튼튼한 기둥이 있어야 존재한다. 국민의힘의 든든한 버팀목인 윤리위가 모쪼록 현명하고도 이성(理性)적인 판단으로 당의 대들보 제거에 앞장서지 않으리라 믿는다. 명철(明哲)한 판단을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칼럼 올리기 무섭게 윤리위가 당원권 정지 10개월 판단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네요.
결국 '수해골프'라는 가짜민심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차라리 제명이 되면 속시원하게 마음껏 국힘을 비판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지도부는 솜방망이라며 이의를 제기 할지도 모릅니다.
제명을 바라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큰 그림은, 후에 당명이 어떻게 바뀌든, 국민의힘 정상화가 돼야 합니다.
저는 윤핵관들이 있는 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야말로 자기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준표형님을 대선 공천에서 조직표로 몰아낸 하극상(下剋上)을 저지른 자들이니까요.
주(周)나라의 여왕(厲王)이 입을 틀어막았으나 결국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난 것에서 유래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란 고사성어가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홍 시장님이라는 구심점을 향해, 비록 사소한 이견이 자의반 타의반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토론하고 합심한다면 반드시 웃는 날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명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내 나라 내 일생을 위해"
도덕성은 민주당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맏형님께서 지켜오신 이 소중한 당에 심이기들이 참 많긴 합니다만.. 시장님 말씀대로 시간은 많습니다. 우리가 인내하고 뭉치고 싸우면, 반드시 볕 들 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