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출당 촉구시위 A씨, 공교롭게도 尹캠프 출신
주체 차도살인하려다 망한 건문제 잊지 말아야
농민의 아들, 제국을 거꾸러뜨리다
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에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계책이 나온다. “타인의 손을 빌려 정적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역사상 많은 권력자들은 적장은 물론 눈에 거슬리는 내부 충신마저도 측근을 통해 모함한 뒤 이를 구실삼아 어쩔 수 없는 척 숙청하곤 했다. 그러나 되레 역격(逆擊) 당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명(明)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생몰연도 서기 1360~1424년)는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이다. 무일푼으로 거병해 지존(至尊)이 된 부친처럼 주체도 무골(武骨) 기질이 다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 타고 활 쏘며 전장을 누볐다. 연왕(燕王)에 봉해진 뒤에는 명장 서달(徐達)을 따라 종군(從軍)하면서 그간 동족을 탄압해온 몽골족을 몰아내는 등 나라와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
몽골족은 북쪽 변방에서 북원(北元)이라는 초라한 세력으로 전락했지만 수시로 남침했다. 주체는 그 때마다 침략을 막아내 명성을 떨쳤다. 주체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중원에는 또다시 천고마비(天高馬肥‧가을이 되면 말이 살찌고 북방 이민족이 쳐들어온다)의 비명소리가 퍼질 뻔했었다는 게 중론이다. 주원장은 이러한 엄청난 전공을 세운 주체를 후계자로 삼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장자(長子)우선 원칙에 따라 요절한 장남 주표(朱標)의 장남, 즉 장손(長孫)이었던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을 2세 황제로 지명했다.
주체도 일찍 눈 감은 큰형님에 대한 존경심에 더해 천하대란 방지를 위해 승복했다. 만약 자신이 황위(皇威)를 물려받는다면 나머지들도 “이왕 원칙이 무너진 거 나도 황제 한 번 해보자”며 너도나도 변란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북원이 이같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만무했기에 주체의 등극은 곧 공멸(共滅)을 의미했다. 주체는 이 점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전후사정 알아보지도 않고 삭번(削藩) 착수
주원장 사후(死後) 주체는 주윤문을 황제로 받들면서 번왕(藩王)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그러나 어린 조카의 마음은 태평하지만은 못했다. 주윤문은 이미 황태손(皇太孫) 시절부터 언제 어느 숙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릴지 모른다고 여겼다. 황자징(黃子澄)‧제태(齊泰) 등 주변 인물들도 이런 주윤문을 부추겼다. 이들은 천수백년 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삭번(削藩)을 주장했다.
황위에 오른 주윤문은 황자징을 불러 “그대는 과거 (황태손 시절의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라고 물었다.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깨달은 황자징은 “감히 잊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황자징 등은 직접 나서기 뭣한 천자를 대신해 삭번정책, 즉 여러 번왕들을 무고(誣告)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번왕들 중 가장 영웅이었던 주체였다.
주체는 변방의 책임자로서 강력한 병세(兵勢)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에 황자징 등은 비교적 약한 번왕들부터 건드리기 시작했다. 모함 받은 주왕(周王) 주숙(朱鏞)은 1398년 자신의 거처에서 불시에 체포당해 압송된 뒤 평민으로 강등됐다. 민장왕(岷莊王) 주편(朱楩)도 길거리로 쫓겨났으며 나머지 번왕들도 줄줄이 유폐되거나 감금됐다. 상왕(湘王) 주백(朱柏)은 절망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실 삭번정책은 고대~중세 왕조에서는 상식이었다. 후한(後漢) 말기 동탁(董卓)처럼 행정권‧병권(兵權) 등을 오로지한 채 사실상의 독립세력이 된 군벌들은 두 마음을 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중요한 건 철번(撤藩)에 앞서 대상이 정말로 역모를 준비하고 있느냐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이 된 신하로서는 억울하기에 오초칠국의 난 당시의 오왕(吳王) 유비(劉濞), 당(唐)나라 절도사(節度使) 안록산(安禄山) 등처럼 어쩔 수 없이 정말로 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나라의 큰 인재를 잃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때문에 주원장은 첩보기관 금의위(錦衣衛)를 운용하면서 자식‧조카인 번왕들을 철저히 은밀히 감시한 끝에 믿을 수 있다 여기고 병권을 맡긴 것이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을 토사구팽(兔死狗烹)한 것도 실은 한신은 역모의 기운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한고조 명을 어기고 제(齊)나라를 공격해 앞서 제나라에 머물면서 항복을 받아낸 중신 역이기(酈食其)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한고조에게 제나라 왕위를 요구했다.
한고조가 항우(項羽)에게 포위돼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도 한신은 출병하지 않아 한고조가 목숨 걸고 적진을 뚫도록 만들고 충신 기신(紀信)이 불타죽도록 했다. 항우와의 최후 결전인 해하(垓下)전투에서는 봉지(封地)를 늘려주겠다는 한고조 간청에 마지못해 움직였다. 한신은 자신에게 독립과 즉위를 권한 괴철(蒯徹)도 죄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나라의 충신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대가
졸지에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쓸 위기에 처한 주체는 처음에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창칼의 숲을 누비고 죽을 고생하며 나라를 위해, 조직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조카의 배신이라는 점에 한 층 참담했을 것이었다. 그는 조카에게 상소를 올려 번왕들의 죄를 대신 해명하는가 하면 칭병(稱病)하고서 두문불출했다. 수도 남경(南京)에 있던 세 아들을 돌려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만약 주체가 애초부터 딴 마음을 품었더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식들부터 먼저 자신의 봉지로 불러들였을 터였다.
그러나 대군이 연나라를 포위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결국 주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북방을 안정시키고서 비로소 1399년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 주체는 장장 3~4년간에 걸쳐 호왈 백만대군이었던 금군(禁軍)과 맞서 싸웠다.
주체의 정난군(靖難軍)은 처음에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지만 이내 머릿수를 감당할 수 없어 밀렸다. 설상가상 요동군(遼東軍)마저 후방을 괴롭혔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냐면 전세(戰勢)를 종합해 일사분란하게 지휘해야 할 최고사령관 주체마저 직접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활을 쏘며 칼을 들고 난전(亂戰)에 뛰어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수년을 죽어라 싸웠어도 주체가 얻은 땅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으며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주체의 만인적(萬人敵) 앞에 조정 대군은 조금씩 패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늙어 죽을 때까지 싸우게 생겼다”고 외친 주체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격전(電擊戰)에 나섰다. 보급에 신경쓰지 말고 천수백㎞를 최단거리로 내달려 곧바로 제국의 심장부를 접수한다는 작전을 입안한 것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한 갈래 군세(軍勢)를 깨뜨린 뒤에는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신속히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남진했다. 주체는 조정 수군도독(水軍都督)의 투항을 마지막으로 끝내 남경에 입성해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체의 등극은 사실상 제2의 건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겨 풍부한 강남지방 경제력을 전국토로 확산시켰다. 전국에 어사(御史)를 파견해 백성을 핍박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엄벌토록 했으며 대운하를 개수(改修)해 백성들이 굶지 않도록 했다. 자금성(紫禁城)이 축조된 게 이 시절이며 환관 정화(鄭和) 대함대의 아프리카 등 방문도 영락성세(永樂盛世) 때 이뤄졌다.
전후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천방지축 내부총질에 나섰던 이들의 최후는 허망했다. 제태는 정난군을 두려워 한 주윤문에 의해 해임됐다가 복직하던 중 남경 함락소식을 듣자 도주했지만 잡혀 죽었다. 황자징도 주체에게 지지 않고 뻗대다가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方孝孺)는 이름난 문인(文人)이라 주체가 살리려 했지만 “역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넘어 십족(十族)이 처형됐다.
다만 주체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조카와 그의 일족은 도량 넓게 용서했다. 주윤문이 난리통에 실종되고 그의 젖먹이 차남 주문규(朱文奎)만이 발견되자 비록 황위정통성에 혼란이 생길까봐 평생 유폐했지만 끝내 살려주고 키웠다. 고대~중세에는 후환을 제거코자 정적의 일가, 특히 황족은 한 살 아기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목숨을 거두는 게 관례였다. 주문규는 환갑이 다 될 때까지 천수(天數)를 누렸다. 주체는 황자징‧제태 등의 일족도 일부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해치지 않았다.
‘여의도 출장소’ 이어 차도살인 오명마저 쓰지 않길
근래 대구지역의 몇몇 인사들이 홍준표 대구시장 징계‧출당(黜黨) 요구 시위를 국민의힘 대구시당 앞에서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홍 시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동을 명분 삼았다. 그러나 야당 대표 앞에서도 자당(自黨) 문제점에 거침없이 쓴소리한 홍 시장의 관록에 도리어 호감을 갖는 국민이 적지 않다고 한다. 홍 시장은 회동에서 이 대표 폐부를 우회적으로 찌르기도 했다. SNS에선 별개로 자신의 과거 실수를 과감히 고백하기도 했다. 당 중진·원로로서 자당 치부를 가리고 남의 흉만 잡는 것이야 말로 국민이 경멸하는 진영정치일 따름이다.
공교롭게도 대구시당 시위를 주도한 모 단체 상임이사 A씨는 지난 대선 경선 당시 윤석열캠프 출신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2021년 8월24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캠프의 한 싱크탱크(think tank) 위원장에 임명됐다. A씨는 올해 3월에는 윤 대통령의 대외정책 지지선언 기자회견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갖기도 했다. 때문에 홍 시장에 대한 A씨의 출당요구가 ‘용산’에 의한 ‘차도살인’ 격 아니냐는 오해가 정치권에서 발생하고 있다.
물론 홍 시장에 대한 A씨의 개인적 감정이 출당요구 배경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여러 언론보도에 의하면 A씨는 6‧1지방선거를 앞둔 지난해 3월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홍 시장이 대구시장 출마 결심을 굳히자 A씨는 “시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홍준표라는 유령이 사리사욕으로 분탕질하며 대구를 배회한다”고 비난했다. 당시에도 A씨는 “홍 의원은 출당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끝내 후보직에서 중도사퇴했던 A씨는 홍 시장 대신 타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홍 후보는 대구시장이 돼선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씨는 앞서 2021년 5월에는 홍 시장의 국민의힘 복당(復黨)을 반대하면서 이른바 개혁보수 측을 긍정평가하기도 했다.
홍 시장에 대한 A씨의 집요한 공세가 개인적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A씨가 윤석열캠프 출신이라는 점에서 오해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용산 여의도 출장소’ 비판의 현 국민의힘 지도부가 정말로 홍 시장 출당 등 징계에 착수한다면 차도살인 의혹은 더 이상 의혹에서 머물 수만은 없다. 영락제에 대한 건문제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모옷된 녀석들 보수가 참어른을 공경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그게 보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