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제3지대 기싸움 조짐에 제갈탄亂 오버랩
필자가 앞선 칼럼에서 썼듯 어느 조직이든 교통정리가 최우선이다. 사공(沙工)이 많으면 배는 산(山)으로 가고 만다. 한 명의 구심점‧결정권자를 추대해야 한다.
그러나 교통정리도 구성원들이 승복해야 가능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는 말처럼 자기애(自己愛)가 지나치고 걸핏하면 후두부 갈기는 사람은 영원히 승복 못 한다. 따라서 그런 ‘폭탄’과 새살림 차리느니 차라리 각자의 길 가는 게 몇 배 나을 때도 있다.
제갈탄(諸葛誕‧생몰연도 ?~서기 258)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 겸 정치인이었다. 제갈근(諸葛瑾)‧제갈량(諸葛亮)과는 한 집안 사람이다. 그러나 둘에 비해 인품‧능력은 바닥을 기었다. 때문에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촉한(蜀漢)은 용을 얻었고, 오(吳)는 범을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고 신랄히 혹평했다.
제갈탄은 위나라를 건국한 문제(文帝) 조비(曹丕) 시절 위 조정에 임관했다. 하후현(夏侯玄) 등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리며 사총팔달(四聰八達) 멤버로서 귀공자의 삶을 누렸다. 조비의 뒤를 이은 명제(明帝) 조예(曹叡)는 “허명(虛名)만 가득하다” 즉 입만 살았다며 이들을 멸시했다.
때문에 제갈탄은 조예 사후 조상(曹爽)이 조정실세로 부상하고 하후현이 그의 신임을 얻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비로소 중용됐다. 조예의 눈은 정확했다. 오나라의 실세 제갈각(諸葛恪)이 군사를 일으키자 제갈탄은 방어임무 띠고 파견됐다. 제갈탄은 정작 실무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 묵사발이 되고 좌천됐다.
반면 출세욕의 달인 답게 아군을 상대로는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255년 위나라의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 관구검(毌丘儉)은 양주자사(揚州刺史) 문흠(文欽)과 함께 사마씨(司馬氏)에게 반기 들고자 수춘(壽春)에서 거병했다. 앞서 사마의(司馬懿)는 조상을 참살하고 새로운 조정실세가 돼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그의 사후에도 모든 권력은 사마씨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다.
여담이지만 관구검은 우리 역사와도 연관 있는 인물이다. 242년 고구려(高句麗)는 오환(烏桓)‧선비(鮮卑) 등과 함께 서안평(西安平‧요동과 평양을 잇는 지역)을 공격했다. 동천왕(東川王)에게 처음엔 대패했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은 246년 비류수(沸流水)전투에서 역격했다. 서안평은 311년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된다.
아무튼 쿠데타가 발발하자 어느새 사마씨에게 빌붙기라도 한 듯, 제갈탄은 대장군(大將軍) 사마사(司馬師)에게 숙청된 은인이자 친구 하후현도 “뉘신지” 잊어버린 채 진압에 나섰다.
도독예주제군사(都督豫州諸軍事)였던 제갈탄은 관구검의 사자를 한 칼에 베어버린 뒤 진압군 별동대로 참전했다. 문흠은 여포(呂布)‧조자룡(趙子龍) 못지않았던 아들 문앙(文鴦)의 용맹 덕에 난전(亂戰) 중 겨우 살아남아 오나라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도주하던 중 일반백성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낙마(落馬)한 뒤 목만 수도 낙양(洛陽)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제갈탄은 중앙조정에 소환돼 고관대작에 임명되는 대신 여전히 변방을 전전했다. 밀림‧늪지 천지의 양주에 머물게 된 권력욕의 화신, 배신의 아이콘 제갈탄은 중앙군 10만 외에 은밀히 사병(私兵)을 모집했다. 식객(食客)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대장군 사마소(司馬昭)는 심복을 제갈탄에게 보내 중앙 관직인 사공(司空) 벼슬을 내리고 입궁을 명했다. 257년 제갈탄은 “핵관을 물리친다” “탈당선언은 정치적 고향인 양주 수춘시 상계동 갈빗집에서” “당원모집은 온라인으로” “제3지대 다 모여” 격문(檄文) 읽으며 수춘성에서 난을 일으켰다.
관구검의 난 때 오나라로 도주했던 문흠 부자(父子), 전단(全端)‧전역(全懌)‧당자(唐咨)‧주이(朱異) 등 오군(吳軍) 장수들도 가세하는 등 제3지대는 일견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빈 수레의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사마소가 친히 이끈 26만 대군이 순식간에 수춘성을 포위하자 위나라가 얻었다는 견공(犬公)은 기를 펴지 못했다.
제3지대 패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제갈탄의 ‘분탕’이었다.
제갈탄은 거대 정치세력에 사력(死力) 다해 맞서 싸워야 하는 그 난리통에도 “내가 이렇게 지지자(사병) 많다. 온라인으로 5만여 명 모았다. 넌 뭐 있냐. 내 밑으로 전부 눈 깔어” 문흠에게 윽박질렀다. 급기야 문흠과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자 제갈탄은 “그 새X” 욕하며 문흠을 죽여버렸다.
어이없게 주인이자 부친을 잃은 문앙‧문호(文虎) 형제와 부곡(部曲)들은 야밤에 월담해 친정(親庭) 위나라로 되돌아가버렸다. 두 형제가 낮밤으로 매일 수춘성을 돌며 “우린 이렇게 안전하다. 너희도 투항하라” 외치자 제갈탄 측 태반이 항복했다.
마지막 발악으로 몇몇 측근만 이끌고 성 밖으로 돌격했다가 개박살 난 제갈탄은 난전 중에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모르게 비참하게 전사(戰死)했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봤던, 협력이라곤 도통 모르고 눈앞의 제 이익만 봤던 필부(匹夫)의 한심한 최후였다. 오나라로 미리 도피해 살아남았던 아들 제갈정(諸葛靚)은 훗날 오나라 멸망 후 위나라의 후계국가 서진(西晉)에 보내져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고 살았다.
야심차게 출발한 제3지대가 초반부터 삐걱댄다. 이원욱·김종민·조응천 의원 등 미래대연합(가칭)과 이낙연 전 대표의 새로운미래(가칭)는 구정(舊正) 전 연대에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당초 이들과의 협력에 열정적인 듯한 모습이었던 이준석 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은 16일 공개된 이 전 대표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께서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맞잡고 서로 힘을 합쳐 거대한 잘못에 맞서야 한다고 하시면 그 물길에 합류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로 또 같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협력해 나가라고 하시면 그렇게 따를 것이다. 시민과 국민의 반응을 살피면서 움직여나갈 것이다”
물론 이 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미래대연합‧새로운미래와 손을 덥썩 잡기엔 기존의 전통적 지지자들 눈치가 보여 그랬을 수도 있다. 이 위원장은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국민의힘 출신이다.
반면 수년 전 친정 버리고 새살림 차린 뒤 한솥밥 먹었던 삼촌뻘 인사에 대한 “그 새X” 발언,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잇따른 견제성 발언 등에 드러난 이 위원장 면모와 맞물려 다른 추측도 나온다. 이 위원장이 총선 공천(公薦) 영향력 및 차기 대선 등을 염두에 두고 제3지대 주도권을 쥐기 위한 몸값 올리기, 시간끌기 등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공교롭게도 미래대연합‧새로운미래는 합당(合黨) 후를 애초부터 염두에 둔 듯 당명(黨名)에 ‘미래’가 들어갔다.
관심법(觀心法)의 궁예(弓裔)가 아닌 이상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원인이 둘 다 일 수도 있다.
이 위원장이 필자가 본 개담 서두(序頭)에서 쓴 그런 인물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제3지대에서는 벌써부터 후자(後者)에 대한 기우(杞憂)의 목소리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정치에서 주도권도 중요하다. 숲을 못 보는 좁은 안목과 그 욕심의 수위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 가정 하에서 제3지대 교통정리가 과연 순조롭게 될지, 아니면 연대체 출범도 전에 협력이 파투 나서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거대양당에게 각개격파될지, 필자도 많은 국민도 몹시 궁금하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본인들 살려고 도망치는 거지,
국민을 위해 일을 하려는 느낌이 안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