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하후패 교훈 바탕으로 공익 위해 헌신하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전중반기만 읽은 분들에겐 생소할 수 있으나 하후패(夏侯霸‧생몰연도 ?~서기 259)라는 인물이 있다. 위태조(魏太祖) 무황제(武皇帝) 조조(曹操)의 친척이자 오른팔이었던 하후연(夏侯淵)의 차남이다.
위나라에서의 하후패의 위상은 그 아비 하후연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서 알 수 있다. 하후연은 후한(後漢) 말 조조가 거병(擧兵)하자 제일 먼저 달려온 창업공신(創業功臣) 중 한 명이다. 신출귀몰하는 기습이 장기라 귀속장군(鬼速將軍‧귀신같이 빠른 장수)이란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하후연은 태원(太原)의 상요(商曜) 등 여러 도적떼를 물리치고, 저족(氐族) 등 이민족을 평정하는가 하면, 일세(一世)의 맹장 마초(馬超)와도 일진일퇴 거듭하는 등 조조의 검잡이로서 활약했다. 유비(劉備)의 한중(漢中) 공략 때 전사하지 않았다면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 때까지 살아남아 노장(老將)으로서 세력의 정신적 지주가 됐을 것임이 분명하다.
개국공신이자 태조의 오른팔인 하후연의 아들이니 하후패는 그야말로 위나라에서 ‘황태자’ 대접을 받았다. 허명(虛名)‧권세욕만 가득한 친척 하후무(夏侯楙)와 달리 정말로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능하고 용맹했는지 실제 전장(戰場)에서도 적잖게 활약했다.
위략(魏略) 등에 의하면 230년 위나라 대장군 조진(曹眞)이 정촉(征蜀)에 나서자 하후패도 종군했다. 촉한(蜀漢)은 하후패를 알아보고 전력을 다해 들이쳤다. 공신집안 귀공자가 적군에 사로잡히면 위군(魏軍)이 받을 심리적 타격은 엄청났을 터였다. 그러자 하후패는 녹각(鹿角)으로 몸을 방어하면서 직접 적병과 싸워 퇴각에 성공했다.
하후패는 247년 위나라 서부 이민족들이 촉한에 호응해 봉기하자 이마저도 진압했다. 그는 이민족을 도우러 북진(北進)한 촉한의 대장 강유(姜維)도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와 함께 막아냈다.
그러나 하후패의 삶에는 암운(暗雲)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처럼 철저히 조씨(曹氏)에 충성했다. 249년 사마의(司馬懿)가 고평릉의 변(高平陵之變) 일으켜 조정실세 조상(曹爽)을 참살하고 권세를 쥐자 조상과 가까웠던 하후패는 불만 반, 불안 반으로 떨었다.
결국 하후패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물어뜯고 죽이고 하던 ‘촉한’으로 투항했다. 첩첩산중 넘다가 넘어지고 굴러 떨어져 거지꼴이 된 하후패였지만 촉한 조정은 내치지 않고 따뜻이 받아줬다.
이유는 있었다. 우선 촉한 창업공신 장비(張飛)의 아내이자 황후 장씨(張氏)의 모친이 하후씨(夏侯氏)였다. 게다가 본래 하후씨는 위나라가 아닌 400년 한나라의 개국공신 집안이었다. ‘파리 떼가 준마(駿馬)의 꼬리에 붙어 따라가듯’ 한고조(漢高祖)를 따라다니며 그의 태복(太僕‧운전기사)으로 활약했던 이가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候嬰)이었다.
촉한으로선 “방황하던 대한(大漢) 공신집안 후손이 다시 주인네로 돌아왔다” 선전해 위나라 조야(朝野)를 어수선하게 만들 수 있었다. 때문인지 하후패가 촉한에서 받은 대우는 어마어마했다. 주어진 감투만 해도 단순서열상으로 총사령관 강유를 뛰어넘는 거기장군(車騎將軍)이었다.
하후패는 위나라 공신후손인 만큼 위나라 내부실정을 촉한 조정에 상세히 보고했다. 후일 촉한을 실질적으로 잡아먹는 종회(鍾會)를 경계하라 경고한 것도 하후패였다.
그러나 촉한은 막상 하후패에게 실무를 맡기진 않았다. 어쩌다 종군시키더라도 전면(前面)에 내세워 세력을 통솔케 하거나 최소 강유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게 하는 대신 잡일이나 시켰다. 그가 북벌에 참여한 건 255년 강유의 3차 북벌이 전부였다.
까닭은 간단했다. 우선 하후패가 위나라 속사정을 잘 아는 만큼 위나라도 하후패의 성품‧군략(軍略) 등 모든 면을 속속 꿰고 있을 게 뻔했다. 하후패에게 크게 일 맡겼다간 말아먹을 공산이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위나라는 하후패의 약점 또한 꽉 잡고 있을 여지가 매우 컸기에 전군(全軍) 또는 일군(一軍)을 인솔하게 된 하후패가 만에 하나라도 두 마음 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하후패가 진심으로 한나라를 따르고자 투항한 게 아니라 위나라 내부 권력싸움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도망쳐온 점도 홀대에 큰 영향으로 작용했다.
오늘(21일) 국민의힘에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가 사실상 출범했다. 당내에선 언급이 터부시되고 있지만 냉정히 말해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항장(降將) 격인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항장 밑의 항장 격인 출신이다.
필자는 한 때 여의도연구원에 몸담았던 사람, 이왕 한동훈 비대위가 출범해야 한다면 친정(親庭)의 성공을 빌어주고 싶다. 오늘 필자가 금기어(禁忌語)를 꺼낸 이유도 한동훈 비대위와 친정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인 법, 그리고 몸에 좋은 약은 쓰디쓴 법. 필자의 고언(苦言)을 무례하다 생각지 말고 모쪼록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잘 헤아리고 배수진(背水陣)의 심정으로 임해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란다. 그리고 그 결실을 패거리이익이 아닌 공익(公益)을 위해 잘 쓰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한동훈은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되려 남자 가남풍 같은 존재죠.
오히려 총선 지면 준표형님에게 떠넘길 궁리나 하고 있으니....
문재앙의 호위무사의 호위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