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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66) 트루먼, 한국-중국서 미군 동시 철수 ”방어 포기" 선언...이승만, 한미동맹 요구 ’청년방위대-학도호국단‘ 창설...장세스 대만 피난...한국군 2개대대-해군함정 월북사건 터지다

뉴데일리

미군은 언제 철수할 것인가. 건국직후부터 미군이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잘 아는 이승만은 미군철수를 기정사실로 상정하고 대책을 서두른다. 우선 미군정에서 인계받은 국방경비대 이름을 ‘국군’으로 고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서 10여개 청년단체의 통합작업에 나섰다.해방3년간 공산당의 폭력사태마다 헌신적으로 진압에 투신했던 청년단체의 뛰어난 반공투쟁의 정신적 능력을 일원화하는 작업이다.

★청년단체 통합 ‘대한청년단’ 창설,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가 되다

건국 두달 째 10월19일 여수-순천에서 군반란이 일어나고 11월2일엔 대구 주둔 제6연대와 광주 제4연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대산 지리산에서는 빨치산이 준동하였다.이승만 대통령은 군반란을 진압한뒤 11월28일 국군 조직법을 제정하였고 12월1일 국가보안법을 통과 시키면서 숙군(肅軍) 작업을 지휘하였다. . 동시에 국민회 청년단(국청)과 청년조직총연맹(청총),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 민족청년단(족청), 학생총연맹(학련), 육해군동지회, 대한창의단 등 10여개 단체 대표들로 ‘민병단’(民兵團) 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청년 훈련을 완료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서울신문] 1948.11.19.일자)그리하여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조선청년총연맹, 민족청년단 등은 국방부가 초청하여 대책을 논의, 국군편성에 부족한 1만5,000명의 병력을 청년단체들이 채우기로 합의한다.통합청년단체 이름은 ‘대한청년단’으로 짓고 12월17일 서울운동장에서 발단식을 열었다.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과 서울시장 윤보선이 참석하였는데 대한청년단 단장에는 뒷날 국방장관이 되는 신성모(申性模, 1891~1960)가 임명되었다.신성모는 젊은 시절 중국서 신채호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해양대학을 졸업, 무역상선 선장으로 오랜 실적을 쌓아 대영제국의 ‘수퍼마스터’(Super Master) 칭호를 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자였다. 이를 알아본 이승만이 해군창설을 앞두고 영어 잘하는 신성모의 국제적 감각과 바다를 잘 아는 능력을 아껴 중용하게 된다.

이날 서북청년회 단장 문봉제(文鳳濟, 1915~2004)는 개회사에서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주구배(走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우리 손으로 북한 동포를 구출하고 남북통일을 반드시 이루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문봉제는 해방 그해 신의주학생반공의거를 무차별 학살하는 소련군과 공산당의 만행을 보고 이듬해 월남, 서북청년회 총단장을 맡아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전국 계몽운동을 펼쳤고 재일교포 지도책임자가 되었다가 돌아와 반공활동에 매진, 교통부장관까지 지낸다. 그는 일본대학 유학파 지식인이다.

이날 채택한 대한청년단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1) 우리는 청년이다. 심신을 연마하여 국가의 간성이 되자.1) 우리는 청년이다. 이북동포와 합심하여 통일을 완성하자.1) 우리는 청년이다. 파괴분자를 숙청하고 세계평화를 보장하자.

★“청년들아, 일어나자! 뭉치자! 공산당의 노예가 되지 말라”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긴 방송연설을 하였는데, 그가 청년시절부터 갈고 닦은 대중선동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감격적인 강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40년래 처음 되는 기회를 얻어서 국권회복이 날로 완성되며 날로 공고해지는 터입니다. 오직 반역분자들이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락해서 지하공작으로 살인방화나 난역(亂逆) 행동으로 군경과 관리들을 살육하며, 각처에서 모야무지(暮夜無知:저녁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간에 인가에 돌입해서 총검으로 난도학살 만행을 감행하며 선전하는 말인즉, 미군은 다 철퇴하고 공산군 여러 수십만이 쳐내려와서 소위 인민공화국이란 것이 서울을 점령할 것이며 이후에는 군경과 모든 애국남녀는 살육 소탕시킨다고 선동하고 있으니, 공산화가 되면 우리는 다 어찌될 것인가. 남의 부속국이 되어 이 좋은 금수강산은 남의 영토가 되고 우리는 다 남의 노예가 되리니, 우리 재산이나 생명이나 다 우리 것이 아니요 남의 총칼 밑에서 어육(魚肉)이 될 뿐이다. 우리 청년들아, 일어나자. 우리 부여민족(扶餘民族)의 용기를 표시하자. 우리 삼일운동의 정신을 다시 발휘하자. 청년들아 청년들아! 의려(疑慮:의심 염려) 말고 주저 말고 다 일심으로 일어나자. 다 합하자, 다 뭉치자. 정신으로, 사상으로, 행동으로 모든 단체가 다 동일히 나가자. 방방곡곡이 일제히 조직해서 절제와 규율 안에서 국민개병(國民皆兵)의 계도로 훈련하여 단련해서 자위일병(自衛一兵)이 되자!”

이승만은 ‘부여민족’의 용기를 말함으로써 만주벌판을 지배했던 민족정신을 상기시키며 분단된 북한 땅의 회복 목표를 제시, 남북통일 의지를 청년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지난 3년간 우리 청년들의 투쟁이 아니었으면 공산당의 화를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산당은 도처에서 청년을 꾀어서 충동질하여 민중을 정복하는 게 습관이므로, 해방후 남북한이 다 공산화 된 것 같이 되었던 것인데, 우리 청년들이 궐기해서 결사 투쟁한 결과로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청쇄시킨 것이다. 만일 우리 청년들이 잠자코 있었으면 우리 순량한 동포는 다 이리와 호랑이에게 먹힌 바 되었을 것이요, 우리 가정들은 악마들의 불꽃과 폭탄에 재가 되고 말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이며 우리 청년의 기상이며 의기남아의 정당한 태도라 하겠는가. 우리 용감한 청년들은 이런 기회를 좋은 기회로 삼아서 용기를 내어 철저히 전진하자!동서양 각국을 물론하고 공산당들이 들어가서 정부를 변동시키지 않는 나라가 몇이 못되는 이때에, 우리 민국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에 공산당 반란이 일어난 것을 며칠 내에 정돈청쇄(整頓淸刷)해서 질서를 회복하였다는 많은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전혀 우리 애국하는 국군과 경찰의 합심협력으로 이런 성적을 낸 것이다. 우리는 이에 순국한 군경의 공훈을 표창할 것이요. 앞으로는 우리 청년들이 전국적으로 조직해서 매진 분투하면 다시는 이런 난당들의 화단(禍端)이 생기지 않게 되리니, 청년들은 이 기회에 크게 궐기하여 동성향응(同聲嚮應)으로 대조직을 이루어 건국의 토대를 굳게 세워서 자유 복락을 다 같이 누리도록 할 것이니, 결심하고 맹세합시다. (중략)정부에서 민병단(民兵團)을 조직할 터인데 몇만명 내지 몇십만명이 될 것을 제한치 않고 국방부에서 제도를 만들어 하루바삐 진전되기를 전국이 기대하는 중입니다. 가장 주의할 바는 청년들이 정신적 통일을 이루어 파당이나 단체적 대립을 삭제해 놓아야 신성한 국군이 되어 대내대외에 우리의 원수를 방어할 능력이 생기며 우리 민족의 복리를 보장할 권위가 성립될 것입니다.” ([대동신문]1948.11.28.일자)

◆미국, 철수 반대 이승만을 속이고 은밀히 미군 빼내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건국정부수립 꼭 한달 뒤 9월 15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이승만의 말대로 모야무지(暮夜無知)하게 인천항에서 부산항에서 미군 수송선들이 병력을 싣고 출항하는 것이었다. ‘미군철수 반대’를 고집하는 “이승만은 절대 모르게 하라“ 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미군 당국은 물론, 건국직후 8월17일 한국에 부임한 특사 무초(John J. Muccio, 1900~1989)의 임무 가운데 하나도 ‘극비철군작전’ 그것이었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무초의 인식과 행태는 매우 2중적이다. 본국 정책에 따라 때로는 모호하게, 때로는 친한적으로 변화무쌍하다. 소련의 원조로 급격히 증강되는 북한 전력에 맞서 한국군의 전력도 증강해야 되지만, 지나친 군비 증강은 반공적인 이승만과 한국군부의 ‘북진통일’에 길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결국 무초의 역할은 이승만대통령과 한국 국민을 설득시키며 미군 철수정책을 완수하는 일이 되었다.

★이승만, 철군 댓가로 ‘한미동맹’ 간청, NATO같은 태평양동맹도 요구

미군은 기본적으로 병력부족에 직면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 동원령을 해제하자 지원병까지 급감, 한반도와 같은 국지적인 위기까지 감당하기 어려워져 일찌감치 군사전략을 소련과의 전면전에만 국한하여 대비하는 전략으로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주한미군 7만 명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다음달 9월15일부터 철수를 개시한다. 다만 철군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모르게 1948년 12월말가지 완전철군을 목표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10월 여수-순천 반란이 일어난다. 이때 이승만이 미군철수 중단을 요청하여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철군시한을 다음해 6월말까지로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합동참모본부사:한국전쟁] 1991. [동아일보] 1948,11.20일자)

이 수정은 이듬해 3월22일에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한국에 관한 미국의 입장’(NSC 8/2)에서 확정되고 이튿날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이때 미국은 철군완료 대신 한국 보안군(육군, 해안경비대, 경찰) 10만4천명에 장비를 이양하고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기로 했다.수 없이 이승만을 만나 철군에 대한 설득과 한국군 지원을 내세운 무초는 이때까지도 미군완전철군 시한에 대하여는 이승만에게 함구한다. (Muccio to Achson, 1949.4.9. FRUS, vol-Ⅶ)

이승만은 무초에게 말했다. ”미군이 한국에 영원히 주둔하도록 붙잡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다만 한국이 자체방위력을 갖추는 적절한 병력과 무기와 탄약 공급이 완료될 때까지만 철군하지 말기 바랄뿐이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유럽의 마셜플랜(Marshall Plan)과 같이 미국이 태평양 제국에 대한 지원책으로 ‘맥아더 플랜’(MacArthur Plan)을 실시해주기 바란다. 그 이유는 동양 사람들에게는 맥아더 장군이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사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한발 더 나아가 이승만은 4월4일 유럽에서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rnization: NATO)와 같은 ‘태평양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였다.”태평양 방위동맹은 남태평양제도, 호주, 캐나다, 미국, 중화민국, 중남미 제국을 포항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동맹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조선일보]1949.4.9.일자)

그 다음 무초를 불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주한미군의 철수 댓가로 한국군 20만 증강과 무장시킬 무기와 장비, 비행기 100대를 즉기 제공해줘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북으로부터 공격이 있을 경우에 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한미 협정 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대하여 ‘한미군사동맹’을 처음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이승만, 트루먼에게 ”한국방위 성명만이라도 발표해 달라“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임명된 무초는 다음달 5월17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제서야 미국의 최종결정을 통보한다. 철군완료 한달을 앞두고서다. 그때 주한미군은 1만5천여명 정도 남았다.무초는 이승만이 나머지 미군 철수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해달라고 요구하였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이승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단호하게 대답하였다.”미군이 주둔하거나 철수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대한안보정책이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이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는 대통령의 성명서 발표를 요청한다. 그렇게 되면 주한미군은 없어도 좋다“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신화에 가린 인물] 황정일 역, 건국대출판부, 2002)미국은 그러나 성명 발표는커녕 ”방위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고 발표한다. ([조선일보] 1949.5.3.일자). 그리고 무초는 “제퍼슨 대통령 이래 미국은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동맹을 맺은 일이 없다”고 기자회견서 거부한다.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6월 장면 주미대사에게 훈령하여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다시 요청하게 하였고 7월 조병옥 특사를 통하여 애치슨(Dean Achson)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군 40만명의 양성과 이를 무장하고 훈련할 무기 제공, ◉한국이 침략당할 때 미국이 적극 지원한다는 의사를 세계에 선언할 것, ◉태평양 동맹을 미국이 주도해줄 것 등을 되폴이 요구하였다, 애치슨은 무기원조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한국방어보장의 선언같은 것은 안할것이며 아시아동맹도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못 박았다.한국에 남을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도 “미군은 소구경 대포만을 이양한다”고 실망스런 말을 밝혔다.이승만 대통령은 이때도 미국이 1882년 조선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명문화된 ‘거중조정’(good office)의 의무를 실천해줄 것도 요구하였다.(Rhee to Muccio, 1949.4.14. FRUS vol.Ⅶ)

★이승만, 미군철수 발표...미국의 대한정책 공개 비판

5월7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심한 듯 미군철수 사실을 국민앞에 발표하고 다음날엔 미군을 철수시키는 미국의 대한정액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특별설명을 내놓았다.

“우리는 미국이 남한을 미국자체의 방위 제1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를 알고자 한다. 남한에 대한 공격이 있으면 이것이 미국 국민 자신에 대한 공격과 동일하다고 미국은 판단하는가? 또 외부세력의 공격이 있을 때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적 원조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우리 자신이 조성하지 않은 공산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의 생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할 당시에 한국에는 공산당은 없었다. 그러나 이 위협은 미-소 협정에 의하여 한국 중간을 분할한데서 야기된 것이며, 미국은 공산당을 타협적으로 대하고저 했기 때문에 남한에 공산당은 크게 힘을 얻고 강력해진 것이다. 공산당과 타협한다는 것은 이에 대항할 기회도 없이 우리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최후의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공산당이 끊임없이 38도선을 침범하고 우리를 파괴하는 이때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 이를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위를 위하여 충분한 무기를 공급받아야 한다.” ([동아일보] 1949.5.8.일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던 3년동안에 민족주의 한인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방송연설 원고는 전부 공산주의 비난을 없애기 위해 엄격한 검열을 받았다, 남한은 자위를 위한 군대를 설치할 권리를 금지당하였고 심지어 공산당의 조직과 선전을 막으려는 모든 기도조차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미국은 잔류미군의 철퇴를 떳떳이 여기며 우리보고 자위 태세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우리나라를 반쪽으로 분열해 놓은 채 공산당이 문란케 해놓은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위해 무엇을 할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미국이 반조각낸 이 분열을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남겨놓았다.” (공보처장 김동성의 담화문, [동아일보] 같은 날짜)

미국측은 격렬한 공개비판에 당황하였지만, 무초 대사는 이승만에게 달려가 “한국군이 38선에서 공격적인 행동을 삼가게 해달라” 부탁하는 것이었다.이승만은 “침략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땅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하게 응답했다.미국무성 극동국장 버터워스가 장면 대사와 특사 조병옥을 만나 ”정말 비우호적 성명“이라며 항의했다. 조병옥은 ”중국사태가 비관적인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하니 국민들이 대단히 불안해한다. 미국이 한국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보장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이승만, 미군철수 대비 ‘청년방위대’-‘학도호국단’ 창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한 일은 대한청년단 200만 단원을 조직한 일과 학도호국단 창설이다. 1949년 12월 이승만은 단원 20만명을 선발하여 ”미국의 주방위군(National Guard)과 같은 향토방위대를 조직하라“고 신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지시하였다. 병역법 제77조에 따라 조직된 ‘청년방위대’는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육군본부에 청년방위국을 설치하고 청년방위훈련학교를 창설, 충남 온양에 간부훈련학교를 열었다. 청년방위대에 앞서 1948년 10월 하순부터 조직 ‘학도호국단’은 여순반란사건 진압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중등학교이상 학생들을 대상으로 창설하였다. 이듬해 4월22일 출범한 중앙학도호국단 총재에 이승만, 단장에는 문교부 장관 안호상, 서울 등 각도 단장엔 서울시장과 도지사나 교육감, 각 학교 단장에는 교장과 대학총장이 맡았다. 단장 안호상 문교장관은 창단식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제군은 우리 조국을 영원히 보전해야할 의무를 진다. 민주주의와 세계의 자유를 방위하는 것이다. 제군의 귀중한 땀과 피를 우리 조국을 위해서 흘려주기 바란다“그야말로 범국가적인 학생조직은 1949년말 947개 학교에 45만명에 달했다. 대통령령 제186호에 따라 공포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의 지원을 받으며 학생들은 군사훈련을 필수과목으로 일정기간 국방부의 훈련을 받았다. 이처럼 국군과 청년방위대와 함께 학도호국단은 공산침략에 대비한 예비군들이다. ”미군이 없어도 좋다. 우리는 맨주먹과 돌맹이와 몽둥이만 들고라도 공산당 침락자와 싸워 이길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외치던 이승만이 만들어낸 ‘국민국가 국민개병’ 자유의 결사대 그것이었다.반공교육 등 정신무장에 치중한 학도호국단은 학교내 남로당분자들의 조직을 추방하였고, 이듬해 북한군의 6.25침략전쟁에 뛰어들어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 결사대가 되어 국가존망의 위기를 구해내는 영웅들이 된다. (남정옥 [대한민국 정부의 전쟁지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5).

◆중국 내전서 국민정부 완패...미국은 장제스를 버리다

무초는 주한미군 철수 완료가 가까워진 5월 중순에 이런 보고서를 애치슨 장관에게 보낸다.”한국에서 미군의 철수에 따라 본인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아우성과 공포가 야기되었다, 한국정부의 고위층에 퍼져있던 위기감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어 ‘패닉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 책임은 미군철수에 대해 한국정부가 조장한 선전, 최근의 한국군 병력과 해군 소해정의 월북 및 중국 국민당 정부의 패퇴 등에 있다.“

이처럼 한국정부 및 국민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의식 ‘패닉’을 남의 일 구경하듯이 본국에 보고한 미국대사 무초, 그때 미국 정책담당자들은 거의 다 그랬다. 특히 중국내전에 개입하였다가 불리해지자 일방적으로 발을 빼내 중국대륙을 포기한 행태는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철군하는 정책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좀 더 파고 볼 필요가 있다.한마디로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이 소련-중공과 맞섰다가 번번이 물러서는 패자의 꼴이다. 여기서 한국군 부대의 월북사건 설명은 뒤로 미루고, 먼저 일본의 항복직후 벌어진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상황부터 살펴보자. 이승만의 건국투쟁과 때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국공내전◀중국 공산당은 조선공산당보다 4년 먼저 1921년 생겼다. 물론 소련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직접지도로 조직되었다. 당시 중국은 쑨원(孫文:손문,1866~1925)의 공화제,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소위 ‘민족통일전선’을 끌어내 국민당에 공산당을 침투시켜 세력을 확장한다. 국민당정부 2인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 1887~1975)는 반공주의자, 1927년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을 장악하고 북벌(北伐)로 지방군벌을 제압하며 중국을 통일하여 난징(南京)을 수도로 중국을 통일한다. 이때 공산당과 결별하고 소탕작전에 나선다. 국부군(國府軍:국민당정부군)의 철저한 토벌에 쫓긴 공산당은 1934년 피난길에 올라 6천㎞(공산당은 12,000㎞ 주장)의 이른바 ‘대장정’을 1년간이나 계속한다. 병력은 4분의 1로 줄어 2만명정도만 남았다.유명한 시안사변(西安事變)은 만주에서 공산당을 토벌하던 군벌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이 1936년 12월12일 군본부를 방문한 장제스를 납치 연금한 사건이다. 궁지에 몰린 공산군이 ”우리끼리 손잡고 일본군과 싸우자“는 선전으로 장쉐량을 포섭한 것, 그리하여 공산군 잔당 소탕을 눈앞에 두고 장제스는 발이 묶였다. 이어서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중공군은 ”우리민족끼리 싸우지 말고 적을 물리치자“며 ‘반일전선’을 주장,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다. 이것 역시 코민테른 전술, 국부군이 공격을 멈추자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군은 군비증강에 집중하고 전쟁에 피로한 국민당과 국부군을 포섭공작을 벌인다.

◉미군의 칭다오 진주...소련을 모르는 전략일본이 항복하자 미군은 1945년 10월 9일 미해군육전대 제6사단이 산동반도 칭따오(靑島)에 상륙, 12일까지 2만7천명이 상륙했다. 이듬해 5월13일엔 미국 제7함대가 기항했다.미국이 중국에 미군을 파견한 것은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얄타 밀약’ 때문이다. 소련의 참전조건이 러일전쟁때 잃은 요동반도 회수, 만주로 물밀 듯 진격한 소련군이 2차대전 연합국 중국까지 점령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때 중국을 친미연합으로 소련의 남진을 막는 극동 방어선으로 삼으려는 전후전략을 갖고 있었다.

◉소련, 중국공산군 적극지원...만주를 점령시켜일본이 물러가자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은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을 열고 10월10일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자유롭고 평화로운 중국을 만들자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력증강과 국부군 공격에 나선다. 이제 장제스는 이듬해 6월 일방적으로 약속을 깬 허베이(河北)의 공산군 공격명령을 내리고 만주지역까지 북진하여 중공군 섬멸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군의 전력은 막강해져있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일본이 남긴 첨단무기들을 제공하고 철도로 병력을 요충지마다 수송하여 국부군보다 먼저 만주 지역을 장악시켰다. 중공군은 100만명으로 급증하였다.

◉ 마샬의 좌경화...장제스에 일방 휴전 강요급박한 상황변화에 미국은 마샬(George C. Marshall) 원수를 특사로 임명, 중국에 보냈다. 중국 주둔군 사령관 스틸웰(Joseph W. Stilwell)이 마샬에게 장제스를 매도하는 보고를 하였다. 반공주의자 장세스와 공산당에 호의적인 스틸웰의 불화는 불가피한 것, 마치 서울의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의 그것과 닮았다. 모두 미국무성을 장악한 ‘친소련 첩자세력’이 아시아 정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마샬은 스텔웰의 보고가 아니라도 ‘미국 말을 안 듣는 장제스’에게 휴전을 요구하며 공산당과 ‘통합정부를 만들라‘는 휴전안을 내놓았다. 당시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것과 같다.마샬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사실은 ’농촌개혁자‘들이라는 국무성 첩자들의 보고에 길들여있었다. 스틸웰 사령관의 보좌관도 첩자였다. 장제스는 반발했지만 마지못해 동의한다.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1946년 1월10일 휴전합의 조인에 이어 2월25일엔 ’공산군의 국부군으로의 통합을 위한 기초‘라는 계획서에 마샬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서명한다. 이른바 군사통합이다. 그것은 마샬과 국무성 첩자들의 환상을 위한 탁상놀음이자 중공군의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한 계획서가 되었다. 이제 공산군은 합법적으로 국부군을 장악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만주의 중공군은 즉각 방심한 국부군을 일제히 공격, 파죽지세로 남으로 남으로 밀어붙였다. 장제스는 또 ’미국을 믿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미국, 원조단절 선언...장제스, 대만으로 피난마샬이 또 충칭(重慶:중경)에 달려왔다. 사태가 악화된 것은 국부군의 책임이라며 ”원조를 중단“시키고는 귀국해버렸다. 약속을 먼저 깨고 덤빈 적은 모른 체, 적에게 쫓기는 자기 친구의 목줄을 다시 묶어버린 것이다. 1947년 6월 중공군은 황하(黃河)를 건너 양자강(楊子江=長江) 분수령까지 내려왔다. 병력도 장비도 바닥이 나는 국부군은 미국의 원조만 학수고대하였는데 뒤늦게 도착한 무기는 예고량의 10%에다 고장난 것들이 많았다. 누군가 고의적인 범행이 분명하다. 지친 국부군은 곳곳에서 이탈하여 공산군에 가담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1948년 1년간 국부군은 공산군에 저항다운 저항도 못한 채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4월에 미국의회를 통과했다는 군사원조 1억달라는 12월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1949년 1월 마샬이 물러나고 애치슨이 국무장관에 올랐는데, 국무성 친소그룹의 좌장 격이던 그는 ”중국원조 단절“을 선언하였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했다.같은 날 중국국민당 장제스 총통이 물러났다. 자유민주 통일에 평생을 바친 그는 무너졌다.총통대리 이종인은 휴전협상을 시도, 미국의 마지막 원조를 애원하였지만 무소식, 그 대신 공산 대군은 ’최후통첩‘을 발하며 양자강을 건넜다. 북쪽에선 베이징(北京)을 포위한 공산군이 무혈 입성하고, 4월23일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그러자 칭따오의 미군이 철수를 단행한다. 그 이틀 후 5월27일 상하이가 떨어졌다. 광저우(廣州)로 피난갔던 국민당정부는 충칭으로, 청뚜(成都)로 옮겨가며 버티다가 12월10일엔 결국 타이완(臺灣) 섬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야했다.

★매카시, 국무성의 소련 간첩 57명 폭로,..궁지에 빠진 트루먼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1893~1976)은 베이징을 수도로 삼고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선포한다. 쑨원과 장제스의 민주공화국 ’중화민국‘은 38년 만에 중국대륙을 공산당에 빼앗기고 ’타이완‘에 정착, 오늘날 ’Chinese Tiwan’(올림픽 표기)로 불린다.

누가 중국을 빼앗겼는가? Who lost China? 미국의 공화당 등 정계도 여론도 끓어올랐다.크렘린의 스탈린이 승리의 술판을 벌일 때 백악관 트루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을 잤다.1948년11월 대통령 선거에 매달린 트루먼은 그동안 마샬과 애치슨의 결정에 따라 OK 사인만 해왔고 중국과 한반도에서 미군이 동시에 철수한 지금, 결정을 되돌릴 생각도 없었다.국무장관 애치슨은 정치공세에 맞서려 ‘중국 백서’를 급조하여 발표한다. 그동안 시행했던 ‘친공정책’을 긁어모은 것으로 트루먼도 결재한다. 그러나 백서는 정가와 여론의 거센 역풍을 몰고왔다.1950년 1월 5일 대통령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중국정책의 변화’를 처음 공개한다.일주일후 1월12일 애치슨은 기자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중대한 연설을 했다. 중국을 포기한 이유를 설명하고 충격적인 극동 방위선을 공포한 폭탄선언, 한국과 대만을 미국 방어선 밖으로 밀어낸 그 ‘애치슨 선언’이었다. 트루먼이 결재한 것임을 물론이다.

다음달 2월 9일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가 극적인 ‘반전’을 일으킨다. ”국무성에 소련첩자가 57명“이고 ”미국을 오도하는 소련간첩200여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며 ”그 뿌리는 애치슨“이라고 못 박는 폭탄을 터트렸다.이미 국무성 실세 소련간첩 앨저 히스(Alger Hiss)는 전향한 동료간첩 [타임(Time)] 편집자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 1901~1961)의 고발로 정체가 드러나 수사 받는 중이었는데도 트루먼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정부를 통째로 궁지에 몰아넣는 매카시의 폭로에 격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6월 25일 북한 남침이 터지자 ‘궁지 탈출’의 역전 카드로 미군개입의 칼을 뽑은 것이었다.

◆한국군 2개 대대 38선 넘고, 동서해 한-미 함정들이 월북-납북

중국 국민당정부군이 공산군에 양자강 수도 난징을 빼앗기고 피난길에 오를 무렵, 한반도 38선에선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1949년 5월 4~5일 대한민국 국군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表武源, 1925~2006) 소령과 제2대대장 강태무(姜太武, 1925~2007) 소령이 2개대대 병력 380여명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다.

”남조선의 군대와 경찰력을 파괴하라“는 소련의 북한 총독격인 슈티코프의 지령 실천은 대한민국 건국후에 더욱 과감하게 전개된다. 스탈린의 전략 ‘남한 무력침공’ 준비에 호응한 김일성의 작전이다. 그 진두 지휘자는 말할 것도 없이 김일성이 남한에 밀파한 지하공작 대표 성시백이다. 물론 남로당의 활동과 알게 모르게 한 덩어리로 돌아간다. 이승만의 국가보안법에 따른 숙군(肅軍) 수사가 조여오자 군경(軍警) 내부에 숨은 남로당 조직원들은 구원을 요청하고 성시백은 이들을 월복시키는 암약을 펼쳤던 것이다.

◉북과 내통후 ”야간 훈련“ 거짓말...장병 350여명 38선 넘어봄꽃이 흐드러진 춘천(春川) 북방의 초저녁 무렵, 제1대대장 표무원은 행군과 야간훈련을 한다며 병력 455명을 집결시켰다. 북으로 북으로 행진하는 대열에서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최동섭 중위 등 일부 장교들이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남쪽으로 달렸다. 사병 230여명이 뒤따라 탈출한다. 남은 병력을 인솔한 표무원은 이미 내통한 38선 북쪽의 북한군 연락소를 향해 질주한다. 38선을 넘자 북한군이 에워쌌다. 장교4명과 사병 213명이었다.

이튿날 5월5일엔 표무원의 고향친구 강태무 소령이 강원도 홍천에 주둔하던 육군 제8연대 제2대대 병력에 ”작전명령“이라면서 북한인민군을 공격하러 간다고 속인 다음 38선을 넘어 인제(麟蹄) 현리로 내달렸다. 역시 성시백이 수배해놓은 북한군이 약속된 장소에 나와 맞이하자 투항하는 순간, 중대장 김인식과 몇몇 중대 병력이 격렬히 반항하며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려왔다. 3백여 명 중 143명이 생환하였다. 강태무-표무원은 평양에서 ‘의거 월북의 영웅”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북한군에 편입, 재교육을 받은 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했으며 뒷날 김일성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앞의 책)

◉동해에선 한국해군 함정이, 서해에선 미군 함정이...줄줄이 납북"1948년 하반기부터 1년간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군내 좌익(左翼)이 함정 4척을 납북했고, 9척을 또 납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정장(艇長)이 살해된 적도 있었죠." 몽금포 전투 참전자 중 최고령인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문갑식, [조선일보] 2012.8.17.일자)공정식(孔正植, 1925~2019)은 해군과 해병대에서 장군까지 올랐다가 예편,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의 증언처럼 1949년 5월초 육군 2개 대대가 월북한 이틀 뒤, 5월7일 해군 180t급 소해정(掃海艇)이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뿐이 아니다. 점점 잦아지는 북한의 공세는 8월 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전용 보트를 납치해 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할 관함식(觀艦式)을 엿새 앞두고 북한이 선제공격을 가해온 것. 이태영 첩보부대장은 피납 보트가 몽금포에 계류된 사실을 밝혀냈다.경무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응준 육군참모총장,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며 개탄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동해에선 태극기를 단 함정이, 서해에선 성조기를 단 보트가 잡혀 올라가니…" 그렇게 시작된 것이 ‘몽금포 보복작전’이었다. 1949년 8월 17일 새벽 2시 인천항을 몰래 떠난 해군함정 5척이 6시쯤 황해도 용연군 몽금포(夢金浦)에 접근, 특공대원 20명이 고무보트 5척에 나눠타고 돌격했다.놀란 북한군이 반격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적탄(敵彈)이 특공대장 함명수 소령(후에 해군참모총장)의 양쪽 넓적다리를 관통하여 쓰러지고, 고무보트 중 4대가 기관 고장으로 멈췄다. 이때 공정식 소령(후에 해병대사령관)이 중기관총을 난사하며 돌진, 함 소령을 구한 뒤 북한 경비정 4척을 대파하였다. 우리 해군 특공대는 육박전을 벌여 북한군 5명을 생포, 35t급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했다. 몽금포 전투는 한국 전사상(戰史上) 유일하게 가해진 대북 보복 공격이다. 참전자는 200여명으로 당시 1명만 부상하였다. (문갑식, 앞의 기사. 문창재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공정식 회고록] 해병대전략연구소, 2009)

★스탈린의 중국 공산화작전에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이 맞서다가 내부의 소련첩자들 장난에 놀아나 전투는커녕 역전의 용장 장제스를 구렁텅이에 밀어넣고 트루먼 대통령 스스로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 내주었다. 동시에 남한에 갖 태어난 대한민국을 버리고 미군을 철수, 동아시아를 한꺼번에 버리고 도망친 트루먼 정부의 오판, 중화민국 장제스는 미국만 믿었다가 타이완으로 쫓겨갔지만, 미국을 믿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은 혼자 힘으로 남한을 지키려 몸부림을 친다. 산불처럼 저만치 다가오는 스탈린의 붉은 불길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계속>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12/22/20231222002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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