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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저주에도 정도란 게 있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野 ‘동해유전’ 저주굿판 당장 그만둬야

 

17세기 중반 청(淸)나라에는 사실상 ‘두 명의 황제’가 있었다. 진짜 황제인 순치제(順治帝) 아이신기오로 풀린(愛新覺羅福臨‧생몰연도 1638~1661)과 섭정(攝政)인 예친왕(睿親王)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多爾袞‧1612~1650)이 그들이다.

 

도르곤은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의 14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를 따라 여러 전쟁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황위(皇位)승계 순위를 높여갔다. 1643년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조카인 호오거(豪格)와 제위(帝位)를 두고 다퉜으나 또 다른 조카인 풀린을 3대 황제로 옹립하는 걸로 합의 보고 섭정으로 군림했다. 호오거는 자기 대신 무계파인 지르갈랑(濟爾哈朗)을 양대 섭정으로 세워 도르곤을 견제했다.

 

비록 2인 섭정체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실권은 병권(兵權)을 지닌 도르곤이 갖게 됐다. 위기를 느낀 지르갈랑이 자신의 국무(國務) 권한까지 넘김에 따라 도르곤은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도약했다.

 

도르곤의 권세는 그가 1644년 이미 망해버린 명(明)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에 입성한 첫 만주인(滿洲人)이 됨에 따라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졌다. 도르곤은 명의 반란수괴 이자성(李自成)을 무찌른 뒤 그에 의해 불타버린 자금성(紫禁城)을 재건했다. 또 순치제를 자금성으로 모셔와 천단(天壇)에서 제(祭)를 올리게 한 뒤 청나라가 명실상부 명나라를 대체하는 대륙의 새 천자국(天子國)이 됐음을 내외에 선포했다. 1644년 11월 순치제는 자금성 태화전(太和殿)에서 두 번째 즉위식을 갖기도 했다.

 

도르곤의 위세는 이제 거칠 게 없었다. 숙부를 두려워한 순치제는 도르곤의 업적이 고대의 주공단(周公旦)과 다를 바 없다며 그의 작위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높였다. 지르갈랑은 섭정왕에서 보정숙왕(補政叔王)으로 강등됐다. 1645년 도르곤은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을 자처하면서 권력을 한층 공고히 했다. 1649년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을 자칭했다. 옥새(玉璽)도 도르곤이 항상 꿰차고 다녔다.

 

대권(大權)을 향해 다가서던 도르곤은 급기야 순치제와 노골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보여주는 게 한족(漢族)에 대한 대우 차이였다.

 

도르곤 사후(死後) 비로소 친정(親政)하게 되는 순치제는 피지배층이 된 한족에 대해 엄격히 다스릴 건 다스리고 만주의 풍습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慫慂)하면서도 대대적 유화(宥和)정책을 펼쳤다. 한족의 문화·생활습관을 존중하는가 하면 중요 상소(上疏)에서의 만주어·한자 병용(竝用)을 허가했다. 명나라에서 투항한 관료·학자들을 우대했으며 이들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고 공적에 따라 상벌을 내렸다.

 

이러한 당근·채찍 병행은 사실 당시 시대상 필수였다. 명나라가 멸망했다곤 하나 멀리 남쪽에는 아직 남명(南明)정권이 살아 있었다. 때문에 많은 한족들이 고국을 중심으로 뭉칠 위험이 상존(常存)했으며 청나라로선 이들을 무작정 매질했다가는 남명의 체급만 키워주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훗날 순치제의 뒤를 잇게 되는 명군(明君) 강희제(康熙帝)는 아비의 국정(國政)기조를 이어받아 한족들을 마음으로 굴복시키고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뤄낸다. 따라서 순치제의 시책(施策)은 만주족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도르곤은 이러한 순치제에게 마치 ‘반대를 위한 반대’라도 하듯 한족을 쥐 잡듯 때려잡았다. 팔기군(八旗軍)을 풀어 북경을 방어하게 한 뒤엔 인근 한인(漢人)들의 전답(田畓)을 몰수해 하사했다. 1645년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를 목숨처럼 여기는 한족에게 무조건 변발(辮髮)을 요구하면서 거부하면 죽였다.

 

만주족에 대한 한인들의 증오심을 결정적으로 높인 사건은 1645년의 양주대학살(揚州大虐殺)이었다. 이 참극은 1937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이전의 최대 학살극으로 여겨진다.

 

대륙 도처 특히 강남(江南)지역에서 저항이 크게 일자 도르곤은 동생인 도도(多鐸)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진압토록 했다. 학살극의 생존자 왕수초(王秀楚)가 남긴 일기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에 의하면 남경(난징)을 함락한 도도는 10일에 걸쳐 한족이란 한족은 모조리 도륙했다. 희생자는 양주성(揚州城) 인구의 80%가량인 ‘60만~8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수초도 큰형·작은형·형수·조카들을 전부 잃고 자신과 아내·자식 세 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존속기간 내내 금서(禁書)로 지정돼 문자의옥(文字之獄) 대상이었다. 그러던 게 청조(淸朝) 말 일본으로 건너간 한족 유학생들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책은 대륙 식자층(識者層) 사이에 뿌려졌으며 이는 청말민초(淸末民初) 시기의 만주족 대학살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고 한다.

 

아무튼 1650년 도르곤이 열하(熱河)에서 급사(急死)하자 순치제는 뒷수습에 골머리를 앓았다. 순치제는 우선 도르곤의 정백기파(正白旗派)를 숙청하고서 황권(皇權)을 확립했다. 동시에 도르곤에 의해 벌떼처럼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면서도 상술한 대로 한족 규제를 완화시키고 포용정책을 펼쳤다. 당초 황제의 예우로 장례가 치러졌던 도르곤의 시신도 성난 민심을 달랠 겸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도르곤은 강희제 치세(治世)에도 황족신분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 대에 가서야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추증(追贈)됐다.

 

동해 유전(油田) 존재 가능성이 5000만 국민의 초미(焦眉)의 관심사다. 단군(檀君) 이래 최대 사건이 될 수도 있는 ‘대한민국 석유시추’ 가능성에 국민의 기대가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데 ‘여의도 대통령’으로 군림 중인 더불어민주당에선 “십중팔구 실패”라는, 마치 윤석열정부 시기의 석유발굴이 낭패 보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한 ‘저주’가 쏟아진다.

 

물론 상업적 가치의 석유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말로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있다면 이는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큰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국민 전체의 축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당의 ‘대(對)정부 저주’는 곧 ‘대국민 저주’가 된다. 정부에 책임을 묻는 건 검은 황금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범국민적 열망(熱望)에 찬물 끼얹는 대신 민심에 부응해 정부에 협력할 건 협력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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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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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소유

    좌파 정권 집권 때 석유가 나와야 퍼주기 생색내며 표팔이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문재앙 때 나왔으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4.06.08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나라 망하라식 발목잡기는 없었으면 합니다. 특히 지금은 굉장히 심하네요. 작정하고 훼방놓기. 이유여하 불문. 나 또는 우리 진영만 잘 되면 된다식. 이렇게 나라가 건국 100년도 안돼 망해가나 봅니다. 꼭 옳은 리더께서 제2의 혹은 제3의 건국 도약 이끄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