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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또 고소라니…부창부수로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저들과의 악연 어디까지인지 두고 보자

 

야율초재(耶律楚材‧생몰연도 서기 1190~1244)는 금말원초(金末元初)의 학자‧정치가다. 한화(漢化)된 거란인(契丹人)으로서 이름도 좌전(左傳)의 ‘수초유재 진실용지(雖楚有材 晉實用之‧초나라에서 났으나 진나라에서 뜻을 편다)’에서 따왔다.

 

학문에 전념했던 야율초재는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한학(漢學)‧천문‧지리‧경전(經典)‧고사‧역사‧의학‧시문(詩文)과 각국 언어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다. 단순히 암기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걸 현실에 적용하고 나아가 발전시킬 줄 알았다. 그는 17세 무렵 장원급제(壯元及第)해 출사(出仕)했으나 몽골(蒙古)의 칭기즈칸(Chingiz Khan)에게 조정이 지리멸렬하자 크게 실망하고 하야했다. 이후에는 불가(佛家)에 귀의해 참선(參禪)에 매진했다. 이 때 잠연거사(湛然居士)라는 호(號)를 얻었다.

 

칭기즈칸은 1215년 마침내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를 함락했다. 그는 여진족(女眞族)의 금나라에 학식‧인품이 뛰어난 거란인 출신 인재가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야율초재를 호출했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에게 “네가 여진족에게 나라를 잃은 거란 사람임을 안다. 내가 금나라인들을 모조리 죽여 네 원수를 갚아주겠다” 말했다.

 

만인(萬人)이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는 초원제국의 대칸(大汗)이 친히 회유하니 보통사람 같으면 넙죽 엎드렸을 터였다. 그러나 대쪽 같았던 야율초재가 꼿꼿한 자세로 내뱉은 대답이 실로 걸작이었다. “제 조상 대대로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복수는 무슨 복수랍디까?”

 

좌우는 ‘이 오만한 거란노예’의 목을 베자며 칼 빼들었으나 칭기즈칸은 껄껄 웃고 “네 말이 맞다”며 야율초재를 기어이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우르츠사하리’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우르츠사하리’는 중세 몽골어로 ‘긴 수염’이라는 뜻이었다. 야율초재는 그 옛날의 미염공(美髥公) 관우(關羽)처럼 수염이 매우 길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졸지에 굴러온 돌이 대칸의 심복이 되자 그간 칭기즈칸을 따랐던 몽골장수들의 시기질투는 커져갔다. 하루는 어떤 이가 야율초재 면전에서 “창칼도 못 다루고 말(馬)도 못타는 너 같은 먹물이 무슨 쓸모가 있는고?” 대놓고 면박 줬다. 이번에도 야율초재는 둘러서 말하지 않고 이렇게 직격해 상대의 입을 다물게 했다. “활은 사람을 죽일 뿐이지 살릴 수 있소? 천하를 얻고 다스리기 위해선 문무(文武)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 법이오”

 

실제로 몽골제국 태동에 있어서 야율초재가 이룬 공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우선 세금이라는 건 모르고 오로지 죽이고 뺏는 것만 알던 몽골에 조세(租稅)제도를 도입했다. 누구도 목숨 잃고 악다구니 쓸 필요 없이 점령지 백성들로부터 알아서 엄청난 양의 재화(財貨)가 쏟아져 들어오자 몽골인들의 턱은 쑥 빠질 정도로 벌어졌다.

 

모든 전리품을 한 곳에 모은 뒤 공적에 따라 배분하는 제도 확립에도 야율초재의 입김이 컸다. 몽골인들은 이전에는 각자 알아서 약탈‧노획했다. 오열(伍列)‧지휘통제가 생명인 전투 도중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자연히 적의 역격(逆擊)에 취약했다. 노획물을 두고 다투는 내분은 덤이었다.

 

야율초재는 다음과 같은 치국(治國)의 대원칙도 마련했다. 첫째, 모두가 예의란 걸 알고 군신(君臣)관계를 분명히 할 것. 둘째, 유학(儒學)을 장려하고 칼이 아닌 붓으로서 나라를 다스릴 것. 셋째, 학살을 자제하고 백성과 그 재산을 보호할 것. 넷째, 관료를 원칙에 따라 임용하고 고리대를 엄금할 것. 다섯째, 천하를 공정히 다스릴 것.

 

이 중 셋째 원칙은 몽골제국의 정복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를 만나기 이전엔 어디를 점령하든 목수(木手)‧장인(匠人) 등 기술자들만 빼고 모조리 죽였다. 그러나 야율초재의 대원칙 이후엔 반항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모두 살려줬다. 자연히 점령지 인근 백성들 상당수는 이 소문을 듣자마자 싸우지 않고 저마다 성문을 열었다. 칭기즈칸의 정복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고 세수(稅收)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야율초재는 1227년 사망한 칭기즈칸 사후(死後) 자칫 분열될 뻔했던 제국의 위기도 막았다. 칭기즈칸은 임종 직전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Ogotai)를 새 대칸으로 점찍었다. 친자(親子) 의혹이 있던 장남 주치(Juchi)의 후손, 호전적이었던 차남 차가타이(Chaghatai)는 각각 킵차크칸국(Qipchaq Khanate)‧차가타이칸국(Chaghatai Khanate)을 봉지(封地)로 받고서 대칸의 결정에 복종했다.

 

그러나 막내 툴루이(Tului)는 불복했다. 몽골족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쿠릴타이(Khuriltai)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컸다. 툴루이는 무려 2년 동안이나 임시대칸으로 재임하면서 권좌(權座)를 셋째 형에게 넘기는 걸 거부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마땅히 태조(太祖)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이치로 설득하거나 때로는 “더 이상 시간 끌면 늦다”며 무(武)로서 압박했다. 결국 툴루이는 1229년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를 새 대칸으로 지목했다.

 

이렇듯 제국의 일등공신인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칸 치세(治世)에서 대쪽을 넘어 철근콘크리트 같은 기백(氣魄)을 과시했다.

 

하루는 오고타이가 총애하는 황금씨족(Altan urug‧황족) 하나가 죄를 지어 야율초재에게 체포됐다. 분노한 오고타이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게 준 선물이다. 그의 뜻에 따라 국정(國政)를 펼쳐라”는 부친의 유언도 잊어버린 채 “우르츠사하리를 잡아들여라” 명했다. 야율초재가 긴 수염 휘날리며 투옥되자 그제야 오고타이는 아차하며 곧바로 석방했다. 이 때 오고타이와 마주한 야율초재의 한마디가 실로 명언(名言)이었다.

 

“아니, 노신(老臣)이 감옥에 갇힌 건 뭔가 죄가 있으니 그랬을 텐데 신을 풀어줬다는 건 곧 죄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죄가 없다면 왜 체포했으며 죄가 있다면 왜 석방하셨습니까?”

 

즉 풀려날 때 풀려나더라도 나는 만백성 앞에서 결백을 증명해야 속이 시원할 테니 대칸도 나의 죄를 입증해보라는 요구였다. 구금이 해제됐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될 것을 유무죄를 따져야 한다는 철근선비의 요구에 오고타이는 결국 백기 들고 말했다. “아무리 지존무상(至尊無上)이라 한들 결국엔 사람인데 어찌 실수가 없겠소? 경(卿)이 이해하시오”

 

야율초재와는 정반대로 임기 5년 간 대한민국 경제‧사회‧외교‧국방을 총체적 파탄(破綻)으로 몰아넣었다는 논란의 전직 대통령은 ‘입막음’으로도 유명세를 탄 바 있다. 필자도 단지 ‘필봉(筆鋒)’이 ‘공익차원’의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약 8년 전 해당 인사로부터 친히 고소당해 무려 ‘징역’을 갈 뻔하다가 1~2심 재판부에 의해 콩밥 먹지 않은 바 있다. 필자의 심신(心身)이 모두 피폐해질 동안 해당 인사의 의혹 해명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의 인사의 배우자가 ‘나 그런 적 없다’ 막무가내식 주장만 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자들을 고소하려 든다고 한다. 참으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이자 녹아내린 철근콘크리트 고철더미, 판다가 대나무 갉아먹고 싸지른 분뇨 같은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얼마 전 지면(紙面)에서 해당 배우자의 의혹을, 비록 데스크에 의해 다소 손질이 가해지긴 했으나, 다룬 바 있다. 어디 필자와 해당 부부의, 아니 대한민국과 해당 부부의 악연(惡緣)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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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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