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서태후와 ‘맞짱’ 뜰만한 한국의 영부인
다시는 韓을 ‘낮은 산봉우리’라 말아야
여기 ‘배터지게 먹다가’ 죽은 여인네가 있다. 흔히 중국 3대 악녀(惡女) 중 하나로 꼽히면서 헐리웃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로 널리 알려진 서태후(西太后‧생몰연도 1835~1908)가 주인공이다.
서태후는 안휘성(安徽省)에서 한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滿洲族)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일설에 의하면 한족(漢族)으로서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고 한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는 입궁(入宮) 기회가 주어지자 애인 왕록(榮祿)까지 차버릴 정도로 권력욕도 컸다.
1851년 16세 나이로 궁녀가 됐던 서태후는 빼어난 자색(姿色)과 언변으로 함풍제(咸豊帝) 주변 환관들의 눈길을 끌었다. 결국 서태후는 황제의 후궁(後宮)이 됐고 함풍제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출세가도를 달렸다. 함풍제가 31세 나이로 요절하자 27세의 서태후는 젖먹이 아들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사실상의 지존(至尊)이 됐다.
아들‧손주까지 희생시키고 황제를 멋대로 갈아치우면서 권세를 탐하던 서태후는 어마어마한 탐욕에 걸맞게 주지육림(酒池肉林)에도 빠져들었다. 그는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이화원(頤和園) 등에서 천문학적 혈세(血稅)를 들여 호화 뱃놀이를 즐겼다. 심지어 열강(列強)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조직할 해군예산까지 횡령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침실에는 수시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이 불려갔다. 그 중에는 영국 외교부의 중국어 통역가였던 에드먼드 백하우스(Edmond Backhouse‧1873~1944) 백작 등 외국인도 있었다. 남자들은 봉변을 면하기 위해 서태후 측근들에게 뇌물까지 줘야 했다. 서태후는 말년까지도 수천 벌의 화려한 옷을 입고서 미모를 가꿨다.
사치향락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빠질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서태후는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요리를 차려놓고 먹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은자(銀子) 약 100만냥으로서 이는 청(淸)나라 말기 농민 한 명의 ‘1년치’ 식비(食費)에 해당했다. 서태후는 특히 동파육(東坡肉) 등 육식을 즐겨했다. 이들 음식을 담은 식기들 재료는 비취였다.
서태후는 절대로 같은 음식을 세 번 이상 먹지 않았다. 어떤 때는 그릇 당 수십만~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요리들을 오로지 ‘관상용(觀賞用)’으로 대령시키기도 했다. 향기로운 수입산 과일들은 ‘방향제(芳香劑) 대용’으로 식탁 위에 놓였다. 서태후가 전용 열차를 타고 지방에 나들이라도 가는 날에는 50~100명의 요리사가 동원됐다.
동(同)시기 조세(租稅)부담에 등골이 휜 백성들은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길바닥에 쓰러져가고 있었다. 1898년의 경우 아사자(餓死者)가 16만~17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평소에 기름진 고기를 포클레인(포크레인) 삽으로 떠서 먹어댄 서태후는 결국 위 기능 저하 등에 시달리다가 이게 원인이 돼 사망했다. 미친 듯 먹어대다 죽은 서태후는 사망 직전에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1906~1967)를, 그가 자신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역사상 마지막 황제가 될 줄은 모르고, 새 천자(天子)로 지명했다. 서태후는 내로남불스럽게도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政事)에 관여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유언도 남겼다.
‘장관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셀프초청’에 따라 인도를 방문해 ‘6000여만원의 식비’를 ‘3박4일’ 동안 35명과 날려먹었다는, 서태후가 기절할 전직 영부인 특검법 발의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정부부처(政府)가 이를 확인해줬다 하니 아마도 사실 아닐까 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혈세 6000여만원이 정말로 뱃속에 들어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먹보계의 기네스북 등재자가 나올지 희대의 혈세먹튀범이 나올지는 확인해보면 알 일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