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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나는 모택동의 개였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혈세 관광’ 전직 장관, 독박 감당하나

 

“나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생몰연도 1893~1976)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의 부인이었던 장칭(江靑‧강청‧본명 리칭윈‧1914~1991)이 1980년 11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주도의 공개재판에 끌려나와 한 말이었다.

 

장칭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교에서 문제아로 따돌림 받았던 그는 한 대학도서관 근무 시절 공산주의를 접하고 193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入黨)했다. 이후 상하이(上海)에서 연극‧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성상납 등 추문에 휩싸였다. 장칭은 두 남자와 결혼했으나 두 결혼생활 모두 파국(破局)으로 끝났다.

 

극단적 선택 기도 등 나락의 삶을 살던 장칭은 배우활동을 접고 1937년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마오를 만났다. 장칭은 세 번째 부인과 별거하던 마오의 정부(情婦) 노릇을 하다가 1939년 정식부인이 됐다. 1940년에는 장녀인 리나(李訥‧이눌)를 출산했다.

 

국공내전(國共內轉)이 중공의 승리로 끝나고 1949년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취임하자 장칭은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영부인)가 됐다. 장칭이 본격적으로 ‘미친개’가 된 건 마오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등 ‘삽질’ 끝에 실각한 이후였다. 장칭은 실의에 잠긴 마오에게 1965년 해서파관(海瑞罢官)사건을 일으킬 것을 부추겼다. 이 사건을 기폭제로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문혁)이 발발하자 장칭은 이른바 사인방(四人幇)의 필두로서 마오의 사냥개로 날뛰었다.

 

중앙문혁소조(中央文革小組) 실세,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 등으로 선출된 장칭은 경극(京劇)과 같은 전통문화 말살에 앞장서면서 ‘봉건(封建)잔재’ 청산을 주도했다. 한편으로는 ‘혁명’을 구실로 사사로운 복수도 일삼았다.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왕광미)는 단지 자기보다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아 고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양녀 쑨유스(孫維世‧손유세)는 마오를 유혹했다는 망상 앞에 부하들을 시켜 몇 달에 걸쳐 윤간‧폭행한 뒤 살해했다.

 

사치향락과 자신에 대한 신격화(神格化)는 기본이었다. 장칭은 그 자신이 금지시킨 서구영화‧음식 등 ‘썩어빠진 부르주아 문화’를 탐닉했다. 인민복(人民服) 대신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Marcos)처럼 화려한 드레스가 입고 싶어 여성복으로 주름 잡힌 스커트 채택을 마오에게 건의했다가 퇴짜 맞기도 했다. 장칭은 비서들에게는 항상 “나를 섬기는 건 인민을 섬기는 것”이라 훈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칭의 도움으로 종신(終身)독재자가 될 수 있었던 마오는 자신의 사후(死後) 장칭을 지켜줄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 결국 마오가 1976년 9월9일 사망하자 그간 문혁과 마오‧사인방에 이를 갈았던 이들이 궐기했다. 덩샤오핑의 경우 문혁 당시 자신은 건설노동자로 하방(下放)당하고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紅衛兵)의 협박‧집단폭행 앞에 건물 밖으로 투신했다가 영구 하반신 장애를 입은 바 있었다.

 

자력(自力)으로 마오의 후계자가 되려던 장칭은 1976년 10월6일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군부(軍部)에 의해 전격 체포돼 중난하이(中南海) 독방에 감금됐다. 그는 그날도 자택에서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이 나오는 미국영화를 보다가 무방비로 당했다고 한다.

 

장칭은 “내가 석방되면 네놈들은 반시간도 안 돼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며 악을 썼다. 재판정에서도 당당한 태도로 판사를 ‘파시스트(fascist)’라 비난하면서 “너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혁에 참여한 인민들을 모욕 중이다”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머잖아 마오에게 평생 철저히 이용당하다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상술한 “나는 마오의 개였다”도 장칭의 뒤늦은 깨달음 이후 나왔다.

 

1981년 사형 및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던 장칭은 2년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減刑)돼 베이징(北京) 친청(秦城)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 자체는 호텔 부럽지 않은 환경이었으나 장칭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채 유령으로 살았다. 그는 1991년 5월14일 새벽 3시께 자신의 독방에서 손수건으로 목을 매 세상을 등졌다.

 

‘인도 혈세 관광’ 의혹의 전직 영부인 배우자 즉 전직 대통령이 최근 첫 입장을 내놨다. 그런데 인도 방문 당시 예산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편성‧집행했다며 문체부에게 물어보라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수족(手足)처럼 부렸던 전직 문체부 장관에게 왜 기내식비(食費) 6천여만원을 편성했는지 따져보라는 것이었다. 해당 전직 대통령과 전직 장관을 두고 마오와 장칭의 관계 그리고 ‘독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세부내역을 보지 못해 뭐라고 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는 전직 장관의 대응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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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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