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과 5.16은 상호보완적이다>
1. 문제의 제기
우리는 196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1년 간격으로 두 개의 혁명을 경험했다. 1960년의 4.19민주혁명과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다.
한국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이 두 혁명은 동일한 공간 내에서 1년 1개월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으며, 모두 성공한 혁명으로 평가되었다. 4.19혁명은 주체들이 대학생들이었는데, 5.16 혁명은 주체가 군인이었다.
대학생과 군인 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양자 공히 사회의 계급집단(Social Class)이 아니고 신분집단(Social Status)이라는 사실이다. 계급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 계급이익의 실현이 혁명의 목표가 아니다. 국가발전이라는 보편적 국익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대학생들이 정권을 상대로 항거에 나서는 것은 그 목표가 정권타도나 장악이 아니다. 정권의 불의와 부정에 집단적으로 항거하여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며, 이 과업이 끝나면 학생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학생운동은 이 한계 안에서 정당성을 평가받는다.
그러나 군인들의 쿠데타는 그들의 이념과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군사력이라는 폭력수단으로 합법 정권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찬탈한다. 쿠데타는 이처럼 수단과 방법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실패하면 반역(反逆)이 되고 성공해야만 혁명으로 평가된다.
그러면 4.19혁명과 5.16은 어떻게 성공한 혁명이 될 수 있었으며, 일견 상이해 보이는 양자 관계를 우리는 현시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이상 두 혁명이 전개되는 역사적 양상을 회고적 차원에서 검토 한다.
2. 4.19의 혁명화 과정
올해로 64년이 경과한 4.19 혁명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3.15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에 대한 항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대통령선거는 야당 후보의 선거전 병사(病死)로 이승만 대통령은 무투표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시 헌법은 미국과는 달리 정·부통령 런닝메이트 제가 아니고 부통령을 별도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는데, 1954년 제2차 헌법개정으로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 시 잔여임기를 승계하도록 되었다.(참고:초대 이시영 부통령, 2대 김성수 부통령, 3대 함태영 부통령은 승계권이 없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 후보가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에게 낙선했다. 따라서 이기붕후보가 제5대 부통령선거에서 또 낙선한다면, 당시 85세의 극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 시 정권의 주인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뀔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기붕이 중심인 집권 자유당의 최대파벌 서대문 파는 대통령 비서실을 포함한 전 각료를 장악한 가운데 고령인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부정선거를 결행했다. 큰 도시지역을 제외한 농촌 지역에서는 3인조, 4인조, 9인조로 유권자들을 묶어 조장 지휘하에 사실상의 공개투표를 감행하고 군에서는 부대별로 집단부정선거를 자행함으로써, 이기붕 후보는 820만표를 얻어 180만표를 얻은 장면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자유민주국가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갖는 최소한의 권리를 이처럼 공공연히 유린, 박탈한 불법 부정은 결코 통용되지 않았다.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구호와 더불어 정권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었다. 4월 19일을 정점으로 대학생 시위대는 수도 서울을 시위 물결로 매운 가운데,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찰은 시위진압을 위해 내무장관의 발표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향하여 총탄을 쏘아댔다.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18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뒤늦게 진상을 알게 된 대통령은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위문한 후, 부정선거를 막지 못해 수많은 생명들이 죽고 부상당한 데 책임을 지고 허정(許政) 외무장관에게 과도정부를 맡긴 후 하야했다.
과도정부는 즉시 부정선거에 관련된 각료들과 자유당의 고위간부들을 체포, 구속했다. 그러나 시국 혼란을 틈탄 북한의 남침을 우려, 군부의 선거부정에 대해서는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토록 일체 문책 하지 않았다. 70만 국군병사들의 주권행사를 짓밟은 군부의 부정선거 역시 결코 좌시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도, 그대로 넘어갔다.
결국 자유당 정권이 퇴진하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변동을 초래함으로 해서, 4.19는 혁명의 반열에 올랐다. 혁명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국체가 바뀐 것도 아니고, 대통령제가 내각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3. 5.16 군사쿠데타의 성공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는 3.15 선거에 대한 대통령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시국이 소연하다면서 선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내무부 장관과 더불어 국방부 장관 등 각료들이 누구도 진상을 말하지 않았고 허위·왜곡된 내용만 보고했다. 대통령이 사임 이외의 다른 대안을 강구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사태를 악화시킨 허위보고야말로 사실상의 반역이었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전 각료가 체포될 때, 여기에 국방장관은 포함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 등 군 장성의 어느 누구도 문책대상에 포함되지않았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젊은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의 부정선거 책임도 밝혀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군운동(整軍運動)을 벌이면서 민주당 정부의 조치를 요구했다. 유감스럽게도 민주당 정권은 4.19의 혁명과업을 승계한 정권이라면 응당히 처리해야 할 군부의 부정선거문제를 가능한 한 덮고 넘어가려는 자세를 보였다.
더욱이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혁명적 상황을 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소극적 자세 때문에, 4.19부상자들의 국회 점거사태까지 일어났다. 아무 준비 없이 졸지에 굴러 들어온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은 1960년대의 한국이 당면한 내외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제대로 된 사명감 없이 권력 놀이에만 광분했다.
당시 한국은 휴전 후 7년째를 맞는 제2차 전후복구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경제건설을 통한 빈곤 탈피만큼 긴급한 과제는 없었다. 특히 한국 등 제2차 세계 대전 후 새로 독립한 나라들에게, 1960년대는 그 시대정신이 한마디로 근대화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새 정부의 당면과제였지만, 집권 민주당은 처음에는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 싸우다가 신파가 승리한 후 신파 내에서 또다시 분파 간의 권력다툼이 첨예화하여 국민과 시대의 여망에 전혀 부응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내의 정군(整軍)파들은 부정선거를 명령한 군 장성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책임을 추궁했다. 이른바 정군운동이라는 군부 내의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이 사태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권력 싸움에만 치중하자, 마침내 군부는 독자적인 실력행사로서 민주당 정부를 뒤엎었다.
바로 여기에서 학생과 군부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진다. 학생은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신분 집단이기 때문에 혁명의 열매인 정권을 야당에 내맡겼지만, 군인들을 바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혁명공약으로,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유발하면서 쿠데타는 성공의 도정에 올랐다.
4. 맺는말
5.16쿠데타가 혁명으로 성공하면서 4.19혁명 과업 완수의 주된 책임은 5.16혁명정권으로 이관되었다. 혁명정부는 3.15부정선거를 주도했던 자유당의 원흉들과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했고, 조국 근대화라는 거창한 포부를 내세우면서 국민들의 동참을 유도, 오늘날 한국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현대사는 학생이라는 신분 집단이 감당할 수 없었던 4.19 혁명의 꿈과 과업을 5.16군사혁명정부가 사실상 대행하게 되었고, 여기에 대학 생활을 마친 4.19주역 엘리트들이 각 분야에서 동참하면서 국가발전을 함께 이룩해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4.19와 5.16은 서로 보완적이었다는 결론에 근접할 수 있다.
필자는 4.19혁명 64년을 보내고 5.16혁명 63주년을 맞는 소회의 일단을 이것으로 약술한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5/15/20240515000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