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증오의 정치 대신 인간의 정치 이뤄지길
유수구(濡須口)는 소호(巢湖)의 물과 장강(長江)이 만나는 지점이다.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손권(孫權)이 자주 격돌한 장소이기도 하다. 라이벌이긴 하지만 나이로 따지면 손권은 조조의 아들뻘이다.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 오주전(吳主傳)에 의하면 서기 212년 조조는 적벽대전(赤壁大戰) 패배의 한을 씻고자 대군을 이끌고 강동(江東)으로 남하했다. 손권은 유비(劉備)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 때 유비는 파촉(巴蜀)에 머물고 있었다. 손권은 하는 수 없이 홀로 조조에게 대적했다. 조조의 군사는 호왈(號曰) 40만인 반면 손권은 수만에 그쳤다.
둘은 213년 초 유수구에서 마주쳤다. 조조는 손권의 도독(都督) 공손양(公孫陽)을 사로잡으며 첫 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문제는 뭍이 아닌 물에서의 싸움이었다. 강동 병사들은 수전(水戰)의 달인인 반면 조조의 북방 장졸들은 물 위에선 젬병이었다. 첫 수전에서 패한 조조는 ‘선빵’ 날렸다는 점이 무색하게 배들을 묶어두고서 일체 응전(應戰)하지 않았다.
기세가 오른 손권은 조조 수영(水營) 가까이로 함대를 보냈다. 혼비백산한 조조는 휘하를 시켜 어지러이 활을 쏘게 했다. 순식간에 배들 한 쪽이 고슴도치가 된 강동 수군(水軍)은 신들린 항해술로 선체(船體)를 돌려 맞은편으로 화살을 받게 했다. 조조는 “이 쇠촉들로 내일 우리를 쏘십시오” 적에게 무기를 헌납한 꼴이 됐다. 이 일화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선 제갈량(諸葛亮)이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한 것으로 각색됐다.
대치 약 한 달 뒤에는 손권이 직접 배를 타고 조조에게로 향했다. “얼마 전 바친 화살들 활시위에 얹어 돌려주려고 오나 보다” 여긴 조조는 일체 사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누선(樓船)들 사이의 위풍당당한 손권을 본 조조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감탄했다.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孫仲謀‧손권) 같은 아들을 낳아야지 유경승(劉景升‧유표)의 자식들은 개돼지와 같다!”
결국 조조는 “당신이 죽지 않는 한 나는 안심할 수 없소”라는 손권의 서신을 받고선 그대로 철수해 1차 유수구전투는 막을 내렸다.
여야 인사 간 ‘덕담’이라는 게 이상한 행위로 여겨지는 게 증오의 정치가 일상화된 지금의 풍경이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는데 말이다. 혐오의 정치 원인을 제공한 모 정당은 하루빨리 개심(改心)하길 바라며, 싸울 땐 싸우더라도 신사다움‧인간다움을 잊지 않는 정치판으로 다시금 돌아갈 날을 고대해본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