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투명‧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 없어
명군(明軍)은 서기 1368~1644년 존속한 명나라의 군대다. 명군은 초창기에는 정화(鄭和)의 아프리카 항해 등 용명(勇名) 떨쳤으나 갈수록, 상태가 좋을 때도 종종 있었으나, 부패해갔다.
대표적 사례가 ‘장부조작’이었다. 부패한 장교들은 병력 숫자를 크게 부풀려 서류를 손질했다. 때문에 장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병사 또는 부패 장교들의 민간인 친인척이 이름 올렸다. 장교들은 이를 통해 예산을 허위보고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타낸 뒤 횡령했다. 병사인 척 둔갑한 친인척들은 이름 빌려준 대가로 장교로부터 수고비를 받았다.
자연히 백성들은 혈세(血稅)로 이 예산을 충당하느라 등골이 휘어졌다. 국방력 약화도 필연적이었다. 부패로 인한 두 개의 사건이 1449년의 토목의 변(土木之變), 1550년의 경술의 변(庚戌之變)이다.
명나라는 주변국들과 감합무역(勘合貿易)을 실시했다.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at)도 감합무역 대상 중 하나였다. 감합무역은 곧 조공무역이다. 조공 받는 측은 체면상 조공물의 몇 배에 달하는 재물을 조공 하는 측에 선물하는 게 관례였다. 때문에 명나라로서는 조공 받을수록 손해 보는 구조인 게 감합무역이었다.
마침내 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 시대에 이르러 명나라는 오이라트와의 무역규모 축소를 선언했다. 분노한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Esen Taishi)는 수만 군대를 이끌고 1449년 명나라를 침공했다. 조정실세였던 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의 친정(親征)을 건의했다. 정통제는 ‘장부상 수십만’인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런데 황제가 막상 군영(軍營)에 도착해보니 집결한 군사는 ‘10만’이 채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 세종실록(世宗實錄) 125권 세종 31년 8월18일 을축(乙丑) 두 번째 기사에는 요동(遼東)을 방문했다가 돌아온 통사(通事) 강문보(姜文寶)의 다음과 같은 보고내용이 실려 있다.
“7월17일 황제(정통제)가 ‘군병(軍兵) 8만’을 거느리고 친히 정벌하러 거용관(居庸關)을 출발해 행차가 장안령(長安嶺)에 이를 적에 도독(都督) 양홍(楊弘)의 삼부자(三父子)가 산속에 복병(伏兵)했다가 적을 습격해 4만여급(級)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하오나 이 사실은 전해 들었을 뿐 문서로 전달돼 상고할 만한 것은 없사옵니다. 요동 등 지방은 조용해 아무 일도 없사옵니다”
북방 기마무사들의 망구다이(mangudai) 등 전술에 걸려든 8만 안팎의 명군은 끝내 격파됐고 정통제는 에센의 포로가 됐다. 이것이 토목의 변이다.
그럼에도 명군의 장부조작 범죄는 근절되지 않았다. 11대 황제 가정제(嘉靖帝)도 몽골과의 무역규제에 착수했다. 타타르족(Tatars)의 추장 알탄 칸(Altan Khan)은 무력으로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했다. 가정제는 군대를 소집했는데 중앙 금군(禁軍)부터가 장부상 기록에 비해 턱없이 숫자가 모자랐다.
게다가 알탄 칸과 마주친 명나라 대동총병(大同摠兵) 구란(仇鸞)은 그간 장부조작 등으로 긁어모은 재물을 적에게 주면서 “왜 우리 같은 졸개들 괴롭힙니까. 저기에 황제가 있는데” 제안했다. 결국 수도 북경(北京)이 포위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으며 병부상서(兵部尙書) 정여기(丁汝夔)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됐다. 이것이 경술의 변이다.
‘엄벌’을 명시한 관련 특별법이 대단히 무서워서 이름은 밝히기 힘드나, 모 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 공개요구가 여전히 거세다. 투명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야당은 ‘오해’를 벗기 위해서라도 공개에 적극 협조하는 게 옳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무엇이든, 특히 혈세(血稅)가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투명해야 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그들이 다른 유공자들처럼 나라를 지키던 신원이 확실한 군인 신분도 아니었는데 유공자 대열에 합류된 것도 정치적 목적에서지, 그게 국민 여론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까지 명단 공개 요구에도 공개를 못하고 있는 것은 투명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