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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면피도 정도가 있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조조삼소가 오랜 시간 비웃음 사는 까닭

 

많은 이가 알다시피 조조(曹操‧생몰연도 서기 155~220)는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손유(孫劉) 연합군에 대패해 천하통일 꿈이 물거품이 됐다. 그가 일껏 얻은 형주(荆州)마저도 포기한 채 정신없이 도주했을 정도의 완패였다. 조조의 6촌 아우 조인(曹仁)이 남군(南郡)에서 1년간 악착같이 버티다 퇴각함에 따라 형주는 손유 양 측이 나눠 갖게 된다.

 

그런데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선 처절하게 박살난 조조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서 ‘정신승리’ 일삼는 것으로 각색돼 독자들 실소를 낳고 있다. 이른바 조조삼소(曹操三笑)의 고사다.

 

주유(周瑜)의 화공(火攻)에 당한 조조는 수십만 대군 중 추정치 108명의 부하만 이끈 채 정수리에 붙은 촛불 두드려 끄며 정신없이 달아났다. 한참이 지나 주유 측 추격병들 말발굽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그제야 조조는 한숨 돌렸다.

 

말(馬)에서 굴러 떨어져 널브러졌던 조조는 돌연 히히 웃기 시작했다. 얼굴에 숯검댕이 칠한 참모 정욱(程昱) 등 주변은 “패전 충격으로 미쳤나보다” 손가락질했다. 조조가 한참동안 배꼽 잡자 부하들은 정신상태 가늠을 위해 그 연유를 물었다. 적벽백서특별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최한 조조는 이렇게 답했다. 발언 내용은 필자가 다소 각색했다는 점 말씀드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권(孫權)‧유비(劉備) 두 놈이 말미잘 같아서 그럼. 나 같았으면 이곳 험지에 복병(伏兵)을 배치했을 것임. 그러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임. 허나 그러지 않았으니 우리는 이렇게 완성(宛城)에서의 패배 때보다 6명이나 더 살았음. 그러니 우리는 진 게 아님 절대 네버”

 

197년 군벌 장수(張繡)와 맞붙은 완성전투는 조조의 아들 조앙(曹昻), 조카 조안민(曹安民), 보디가드 전위(典韋)가 한꺼번에 횡사한 전투였다. 누가 봐도 그 때나 지금이나 비온 날 개꼴인 건 마찬가지인데 조조가 자기합리화를 하며 패전 책임을 면하려 하니 좌우는 그저 입만 떡 벌어졌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일군(一群)의 병마(兵馬)가 어디선가 쏟아져 나와 조조에게로 달려들었다. 앞선 장수는 장판파(長坂坡)에서 혈혈단신 아두(阿斗)를 구한 유비의 맹장 조자룡(趙子龍)이었다. 혼비백산한 조조와 108인의 패잔병은 말꼬리 붙잡은 채 내달렸다.

 

조자룡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자 조조는 다시금 말 등에서 굴러 떨어져 널브러졌다. 그리곤 다시 낄낄 웃다가 백서특위 전체회의를 주재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도저히 생각해봐도 손권‧유비는 멍게임. 나 같았으면 이 험지에 복병을 배치했을 것이고 그럼 우리는 지금쯤 현생(現生)의 번뇌에서 해방됐을 것임. 6명이나 더 살았으니 우린 패한 게 아님”

 

천하의 궤변에 정욱이 거품 물 찰나 이번엔 유비의 동생 장익덕(張益德)이 호랑이수염 곤두세운 채 뛰쳐나와 장팔사모(丈八蛇矛) 휘둘러댔다. 꼬치구이가 될 판인 조조와 108번뇌는 비명 지르면서 말 궁둥이에 매달려 달아났다.

 

장익덕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자 조조는 말 궁둥이에서 분리돼 떨어졌다. 한참을 하늘 올려다보며 ‘난 왜 사는 걸까?’ 자문자답하던 조조는 또다시 백서특위 전체회의 소집하고서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형이 하는 얘기 오해 말고 잘 들어. 아무리 도저히 절대로 생각해봐도 손권‧유비는 해삼임. 이 험난한 곳에 살수(殺手)를 숨겨뒀다면 지금쯤 우리는 썸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로 향하고 있었을 것임. 6명이나 더 챙겼으니 우린 진 게 절대 아님”

 

아니나 다를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번에도 한 무리의 도부수(刀斧手)들이 칼춤 추며 달려 나왔다. 대장은 살아서 신(神)이 된 사나이 관운장(關雲長)이었다. 관운장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겨누자 조조는 찌찔한 울음 터뜨리며 “예전에 오관참장(五關斬將) 때 고이 보내드린 거 잊으셨나와요? 까먹으셨다면 제 목을 치시와요” 애걸복걸했다. 마음이 약해진 관운장이 큰칼을 거둠에 따라 조조는 겨우 살아서 허도(許都)로 도주했다. 물론 형주의 뒷일은 집안아우 죽든 말든 조인에게 다 떠넘기고서 말이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 공천(公薦)에 깊이 관여한 핵심관계자로부터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 나왔다. 그는 선거에서 당이 마치 대승(大勝)이라도 한 것 마냥 “현명하신 주권자 국민께서 21대 총선 때보다 6석을 더 주셨다. 국민의힘을 엄중히 심판하면서도 희망의 그루터기를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면피(免避)도 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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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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