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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전위예술 아닌 이제는 ‘기본’을 잘할 때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양대 브레인 투톱은 단연 와룡봉추(伏龍鳳雛)로 일컬어진 제갈량(諸葛亮)‧방통(龐統)이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과 동시에 누상촌 돗자리파 당대표 자리를 꿰찬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능력이 철저히 성장‧입증된 후에야 관리직을 맡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융중(隆中)에서 밭 갈던 제갈량은 서기 207년 무렵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유비(劉備) 휘하로 출사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게 어찌나 기뻤던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다(수어지교‧水魚之交)”고 말했다. 유비는 의형제들보다도 제갈량을 더 가까이했기에 관우(關羽)‧장비(張飛)가 굴러들어온 돌을 고깝게 여겼다는 기록이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 등에 있다.

 

허나 유비는 제갈량에게 곧바로 곳간 열쇠나 병권(兵權)을 맡기지 않았다. 출사 이후 그는 ‘무관(無冠)’ 즉 아무런 벼슬이 없었다. 사실상 유비의 식객(食客)이자 개인비서에 가까웠다.

 

제갈량이 정식으로 임관(任官)한 건 209년으로 추정되는 시기 무렵 유비가 형주(荊州) 남부 4개 군(郡)을 차지했을 때였다. 그것도 유비 비서실장 격인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이 받은 벼슬의 전부였다. 군사중랑장은 잡호장군(雜號將軍)보다도 낮은 잡호중랑장(雜號中郞將) 중 하나다.

 

4개 군 평정 당시 장비의 지위는 잡호장군보다 훨신 높은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신정후(新亭侯)였다. 관우도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蕩寇將軍)‧한수정후(漢壽亭侯)였다. 비록 비서실장직이 실세이긴 해도 제갈량은 공식적으로는 관우‧장비에게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지시 내릴 수 없는 위치였던 셈이다.

 

유비의 입촉(入蜀) 후에도 제갈량은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2인자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받은 작위는 잡호장군 중 하나인 군사장군(軍師將軍)이었다. 심지어 오직 유비를 오랜 기간 따랐고 전 재산‧누이를 유비에게 바쳤다는 메리트만 있는 미축(麋竺)보다도 훨씬 낮았다. 입촉 후 미축은 한고조(漢高祖)에게 있어서 소하(蕭何) 격인 안한장군(安漢將軍)에 임명됐다. ‘안한장군’은 말 그대로 한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미축은 이른바 ‘간손미’에 포함돼 세트로 평가절하되는 인물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을 거쳐 황제에 즉위하기 전까지 계속 군사장군에 머물렀다. 제갈량이 누상촌 돗자리당 당대표 격인 승상(丞相) 자리에 올라 조정을 주무르기 시작한 때는 유비가 옥좌(玉座)에 앉은 221년 5월이었다. 삼고초려가 207년의 일이니 제갈량은 유비를 따른 지 약 14년 만에 비로소 국정(國政)‧당무(黨務)를 공식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0대 후반 헌헌장부(軒軒丈夫)에서 40대 초중반 동네아재가 되는 사이에 제갈량이 얼마나 많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숙 또 성숙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방통도 마찬가지다. 그도 등장과 동시에 짜잔 사령탑 자리를 꿰찬 게 아니었다. 방통은 일개 고을의 공조(功曹)로 일하다 더럽다며 때려 친 후 유비를 따랐다. 그에게 주어진 첫 직함은 뇌양현령(耒陽縣令) 즉 지금으로 치면 ‘동네 이장’이었다.

 

그것도 일개 마을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유비에 의해 면직처분됐다가 제갈량의 만류에 겨우 치중종사(治中從事) 자리를 얻었다. 방통은 심기일전(心機一轉) 끝에 제갈량과 같은 군사중랑장에 임명됐다. 방통도 214년 유비의 입촉 과정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할 때까지 줄곧 군사중랑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유비를 따르자마자 촉군태수(蜀郡太守)‧양무장군(揚武將軍)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쓴 또다른 책사 법정(法正)의 사례가 있긴 하다. 그러나 법정은 제갈량‧방통과 달리 이미 유장(劉璋)의 공당(公堂)에서, 비록 유장에게 중용되진 못했으나, 장기간 벼슬살이를 해 능력이 입증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와룡봉추와 비교하기는 무리다.

 

국민의힘 새 사령탑을 선출할 전당대회가 올해 중순 열릴 예정이다. 국민의힘은 그간 무수한 전위적 실험을 했다. 공직 경험도 사회 경험도 없고 선수도 0선인 30대 중반 당대표가 등장하는가 하면 정치경험이 전무(全無)한 법조인 출신 인사가 비상대책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말은 하나 같이 실망스러웠다. 전자(前者)는 내부총질 끝에 가출해 딴 살림 차리고서 야당과 어울리고 있고 후자(後者)는 108 번뇌만을 안겨줬음에도 방귀뀐 놈 성내는 태도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노련한 인사들이 사령부에 대거 포진하고 있다. 그게 이번 총선에서의 양당 성적 차이로 직결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임금과 함께 정치를 이끈 조선시대 정승(政丞)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서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노련한 정승들은 조선왕조 500년의 원동력이 됐다. 흔히 기본을 잘 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필자의 생각이 짧을 수도 있겠으나, 국민의힘은 이제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잘 하지도 못하고 감동도 드라마도 속시원함도 뭣도 없는 파격을 넘어 충격적 실험 대신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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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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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없습니다.
  • 恨많은靑年
    2024.04.23

    그들의 기본은 독재입니다. 이 당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양당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면 안 됩니다. 그땐 진짜 독재입니다. 저는 나라를 위해 쓴소리하는 것입니다

  • 오주한
    恨많은靑年
    2024.04.2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저들은 이미 말 안듣는 자들인데 그들을 믿나요?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말 잘 듣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일단 반문합니다

  • 오주한
    恨많은靑年
    2024.04.2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경태 이외에는 없습니다.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 의원님도 국민의힘입니다만

  • 오주한
    恨많은靑年
    2024.04.2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 의원만 국민 말 듣고 나머지는 말 안듣는 자들입니다. 당이 해체되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이게 뭔 소리요. 조 의원께서 보시면 대응 들어갈만한 소리입니다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 의원님 이름 팔아 갈라치기입니까?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더 이상한 말씀 하시면 그대로 조 의원께 제가 문의코자 합니다

  • 오주한
    恨많은靑年
    2024.04.2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생각이 짧아서 죄송합니다. 글 삭제하겠습니다.

  • 恨많은靑年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恨많은靑年 님에게 보내는 답글

    문의하겠습니다

  • 오주한
    恨많은靑年
    2024.04.2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글 쓰지 않겠습니다. 선처 부탁드립니다.

  • 오주한
    작성자
    2024.04.23

    청꿈 관리자님들.. 요즘 세상에 이해 안 되는 분들 많습니다. 윗 양반 본인 글이 어떤 경로로 칼럼으로까지 올라왔는진 모르겠습니다만. 관리 절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