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関ヶ原) 지방에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의 패권을 놓고 20만 명에 달하는 사무라이들이 이곳에 모여 아침부터 오후까지 혈투를 벌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문이 이끄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끄는 동군이 맞붙은 이 전투의 승자는 동군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로 널리 알려진 이 싸움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다. 당시 일본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무라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사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이들은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는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다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애당초 서군과 동군, 어느 한쪽을 지원하기로 약조하고 전장에 뛰어들었으나, 세키가하라 벌판에 진영만 갖춰 놓고 칼을 빼지 않은 다이묘(大名)들이 많았다. 현장에서 어느 쪽이 우세한지 간을 본 것이다. 이때 서군 편에 섰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느닷없이 서군을 공격하면서 동군이 승기를 잡게 됐고, 판세가 점점 동군 쪽으로 기울자 관망하던 다이묘들이 뒤늦게 동군에 가세하면서 서군을 패퇴시켰다.
이 같은 양상은 일종의 전쟁으로 불리는 '선거'에서도 볼 수 있다. 유권자들은 자신이 던진 표가 '사표(死票)'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아무리 공약이 좋아도 당선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유권자에겐 후보자의 공약이나 철학보다 그의 '당선 확률'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이 얻을 게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특정 후보가 이길 것으로 예상되면 그 후보를 선택하는 유권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따라서 선거판에 나서는 후보들은 저마다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후보자들이 자신의 경쟁력을 과시하려 할 때 많이 쓰이는 방식이 바로 '여론조사'다. 평소엔 여론의 동향을 파악해 더 나은 정책 등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지만, 선거철이 다가오면 유권자들에게 특정 당과 후보자가 '대세'라는 걸 각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총선이 임박하면서 각종 여론조사가 난무하고 있다. 물론 그 의도는 전술한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특정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자신의 '밴드왜건(Band wagon)'이 더 크다고 외치는 후보들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오차범위 내에서 벌어진 표차를 두고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다" "3자 구도가 양자 대결로 바뀌었다"는 등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놓는 언론도 부지기수다.
전장(戰場)에서 장수들이 피부로 느꼈던 '기세(氣勢)'를 지금은 여론조사로 가늠해야 하는 상황. '중우정치(衆愚政治)'라고 매도하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 당장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돌리고 있다는 후보들이 많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61개가량 되는 여론조사기관들이 각 정당과 캠프의 의뢰를 받아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중 가장 많은 건 수(289건)를 기록한 곳이 바로 '여론조사꽃'이다. '여론조사꽃'의 질문 방식은 독특하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묻는 식이다.
보통은 누구에게 투표할지를 묻는데, 이 기관은 특정 세력에 대한 정성적인 판단을 묻는다. 이런 질문은 응답자로 하여금 이번 총선을 '정권심판'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론조사가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유튜브 채널 '박은주·신동흔의 라이브'에 따르면 이른바 '좌파 진영'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절대로 질 수 없는 선거였는데 진 이유는, 여론조사에 의한 국민의식 선점(先占)에 자신들이 충분히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여론조사기관을 만들기로 작심했고, 그 결과 '여론조사꽃'이라는 조사기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론조사꽃'의 대표는 방송인 김어준이다. '좌파 스피커'의 대명사로 불리는 김어준이 만든 여론조사기관에서 수많은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총선 전 공표됐다.
한 정계 인사는 "편향적 질문을 던져 수집한 여론지표를 자신이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서 재차 언급해 이를 확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사실상 유튜버 한 명이 대한민국 여론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이라고 탄식했다.
인품이나 철학, 공약보다 여론조사 결과가 더 각광받는 시대.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결과를 보고 '이길 것 같은 후보'를 찍자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들어설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보고 들은 게 사실과 다르다면 어떨까.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실제 전력은 명분(名分)을 쥔 도요토미 가문의 서군이 앞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불과 1만5000여 명에 불과한 고바야카와 군대의 변심으로 서군은 무너졌다.
수많은 행렬을 이끄는 밴드왜건을 따라가는 건 자유다. 하지만 유명 아이돌 가수 앨범을 사는 것과 정치인을 뽑는 행위는 천양지차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촛불을 들고 나섰다 문재인 정권 5년간 모두가 '생지옥'을 겪지 않았던가. 일개 유튜버가 떠드는 잡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에 후보들의 공약집을 한 자라도 더 읽어보자. '될 만한 사람'이 아닌, '돼야 하는 사람'을 뽑아야 할 때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4/06/20240406000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