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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난규 주인이 vip 되기 직전 쓴 칼럼

오주한

https://m.skyedaily.com/news_view.html?ID=149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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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궤멸과 송말삼걸

 

예로부터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 해도 반드시 충신이 세 명은 있다”는 말이 있다. 고대 중국 남송(南宋) 최후의 재상이었던 문천상, 황제의 스승이었던 육수부, 금군(禁軍) 총사령관이었던 장세걸은 이 옛말에 딱 들어맞는 인물들이다.

 

송나라와 연합해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정복한 몽골족은 대륙 통일을 위해 장강을 넘어 남진을 시작했다. 남송의 강력한 수군(水軍) 앞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원나라는 항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교통 요충지인 양양성을 점령한 뒤 강남으로 진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장장 5년 동안 전개된 양양공방전이 벌어지는 등 양측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당초 남송은 압도적인 경제력과 인구를 바탕으로 몽골족의 공세를 저지했지만 원나라는 집요했다. 1267년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은 양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양양이 함락되면 나머지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항장 유정의 진언을 채택한 뒤 그에게 10만 대군을 주고 출병시켰다. 남송의 지형과 전술을 꿰뚫고 있던 유정은 1268년 양양을 포위한 뒤 남송 구원군 차단을 위해 외곽에 봉쇄망을 구축했다. 동시에 전투 현장 바로 옆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며 군선을 건조했다.

 

송군의 구원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1269년 장세걸이 원군을 이끌고 양양 동남쪽 한수 강변에서 몽골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전세가 불리해져 부득이 퇴각하기도 했다. 쿠빌라이는 나아가 몽골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인 ‘일 칸국(Ilkhanate)’으로부터 중동의 공성기술자들을 초빙해 투석기를 다량 제조했다. 1272년 유정과 아릭카야가 지휘한 몽골군은 투석기로 양양성 전진기지인 번성의 외곽 토성을 점령하고 송군 2000명을 학살했다.

 

번성은 그대로 몽골군 공세에 노출됐다. 1273년 번성의 성벽이 투석 세례 앞에 무너지고 몽골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수비대장 범천순은 “살아서 송의 신하였으니 죽어서도 송의 귀신이 되겠다”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자결했다. 전진기지를 잃은 송군의 사기는 급락했으며 아릭카야는 송군 총사령관 여문환에게 “이제는 나는 새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투항을 권유했다. 여문환이 성문을 활짝 열자 남송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게 됐다.

 

이때부터 문천상 등 송말삼걸(宋末三傑)의 처절한 드라마가 시작됐다. 문천상은 가산을 모조리 처분해 1만의 의병을 조직한 뒤 몽골군에 저항했다. 주변에서는 국운이 쇠했다며 입 모아 만류했지만 문천상은 “아비가 병에 걸려 치유 가망이 없음을 알고서도 자식들은 치료에 정성을 다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닌가”라며 끝내 검을 뽑았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그는 1276년 몽골군 총대장 바얀과의 일대일 담판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문천상이 억류된 동안 수도 임안이 함락되는 등 남송의 몰락은 가속화됐다. 육수부‧장세걸은 사망한 단종을 대신해 마지막 황제인 소제를 옹립하고 저항을 지속했다. 태조 조광윤 이래 약 300년 간 송나라에 충성한 구(舊) 황족 시 씨 가문과 백성들은 1000척의 대함대를 조직해 결사항전했다. 그러나 원나라 함대가 보급로를 차단하자 깨끗한 식수를 얻을 수 없었던 장졸들은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원나라 수군대장 장홍범은 송군의 머리 위로 화살비를 쏟아 부었으며 양측 함대가 근접해 백병전이 벌어지자 수만명의 남송 병사들이 학살됐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서도 제왕학 개론서인 대학(大學)을 황제에게 강론하던 육수부는 가망 없음을 깨닫고 어린 천자를 등에 업은 채 차디찬 바다에 몸을 던졌다.

 

7살에 불과했던 소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울부짖었다. 패잔병들과 남쪽으로 도피해 후일을 기약하려 했던 장세걸 함대는 폭풍을 만나 대부분 수장됐다. 이 모든 과정을 피눈물을 흘리며 똑똑히 지켜봐야 했던 문천상은 쿠빌라이의 간곡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죽음을 택했다. 그는 “나는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짧은 한마디만을 남겼다. 그렇게 나라는 멸망했다.

 

청나라 때 집필된 명사(明史)에 의하면 남송 최후의 애산전투에서 살아남은 몇몇 생존 장병들 중에는 이름 모를 한 사람이 있었다. 강남 지역을 떠도는 가난뱅이 농부였던 그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긴 채 외손자인 중팔에게 가끔 지나가듯 옛일을 들려줄 뿐이었다. 그런데 중팔은 다름 아닌 후일 대명(大明)제국을 건국하는 주원장이었다. 장세걸은 죽음을 앞두고서 “하늘이 대송(大宋)을 멸하려 한다면 우리 모두 물에 빠져 죽게 해 달라”고 절규했지만, 하늘은 송말삼걸의 충심에 감동이라도 한듯 기어이 한 사람을 살려 그의 후손이 강산을 수복하게 한 것이었다.

 

“보수궤멸”이라는 어느 여권 인사의 발언, 자중지란하는 국민의힘을 두고 남송의 마지막을 연상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이대로 가다간 양당정치, 나아가 다당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다만 천명(天命)이라는 게 있고 송말삼걸의 정신이 있다면 ‘기울어진 운동장’도 언젠가는 바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민심이 곧 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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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윗분에 의해 다소 손질이 가해진 글

 

제 예감이 틀리길 바랬건만

 

내달에 꼭 틀리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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