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는 약속을 지켰다. 이승만과의 약속을!“대한민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 캘리포니아가 공격받은 것처럼 달려와 지켜주겠다“ 맥아더는 이 약속을 두 번이나 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 참석하여 ’안보‘를 걱정하는 73세 노대통령 이승만을 포옹했을 때, 그리고 두 달 뒤 도쿄로 날아와 ’공산침략‘ 대책을 협의하는 이승만의 손을 굳게 잡고 또 한 번 다짐을 두었다.6.25침략, 건국 1년 10개월 만에 소련과 북한이 38선을 침략하자 맥아더는 주저 없이 달려왔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 간의 안보동맹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때 맥아더와 마음으로 맺은 ‘우정 동맹‘이었다.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미군을 철수한 뒤의 일이다. 한미동맹은 3년뒤 전쟁 끝자락에 이승만이 목숨 걸고 미국과 싸워서 체결한 것으로서 인천상륙과 전혀 무관하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첫 번째는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이 ‘유엔의 힘’을 빌어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맥아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것이고, 그렇게 건국된 나라가 벼랑에 몰리자 지체 없이 달려와 미국 육군의 파견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하여 공산군을 무찌른 것이 두 번째이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세계역사상 이런 ‘우정 동맹’은 찾기 어렵다. 이런 것이 아무도 모르는 이승만 스타일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의 반려자 맥아더! 그는 그래서 대한민국이 빚진 ‘나라의 은인’이다. 이러니 공산주의자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난리친다.
◆“최악의 조건이 최선의 기회” 맥아더의 ’인천‘ 결단
작전코드 ‘Operation Chromite’ 인천상륙작전의 결정은 8월28일에야 이루어진다. 맥아더가 6월29일 한강전선 시찰에서 결심한 인천상륙계획이 군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두달이나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미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제독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도 안될 것“이라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아산만 입구 서해대교 위치)로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왜 그런가? 인천 앞바다는 상륙작전이 피해야 할 악조건의 특징을 모조리 갖추고 있다.▶세계최대급 조수간만의 차=최고 9m, 최소 7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는 ‘밀물’에서만 상륙이 가능하므로 ‘썰물’때는 좌초상태에 빠지며 다음 밀물까지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길고 넓은 갯벌=간조시 2~5㎞나 생기는 갯벌은 9시간동안 도보와 차량통행 불가능.▶높은 해벽=배타고 다가가 방파제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 원시적 육박전을 벌어야한다.▶항구와 시가지 밀접=상륙 즉시 적군과 치열한 시가전이 불가피하다.▶좁은 단일 통로=항만에 하나뿐인 수로는 만조시에도 맥주병 병목처럼 좁아서 상륙 함정들이 밀집되므로 적의 좋은 표적이 되어 단시간 내 전멸될 위험이 크다.
과연 ‘5000분의 1 확률‘이란 말이 어울리는 최악의 조건 종합세트 같다. 상식적인 군사전력가라면 누가 이곳에 상륙할 엄두를 내겠는가. 그러나 맥아더는 달랐다. 한강변 한국군 용사와의 대화 이래 ’인천상륙‘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다. ”최악의 조건이 최선의 기회이다. 적이 ’설마‘하는 인천이 최상의 상류지다“역전의 명장 맥아더다운 결단이다. 적의 허(虛)를 찌르는 병법의 기본 아닌가.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승리‘로 끝장내야 하는 맥아더는 인천상륙 준비작전 명령을 이미 7월부터 내려놓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는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50여차례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시켜 ’상륙작전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로 '아일랜드 호핑'(Islands Hopping:섬에서 섬으로 깡충 뛰어 점령)작전이 그것, 넓은 태평양 여러 섬들에 박힌 일본군 진지를 직접공격하지 않고, ‘후방 상륙—병참선 차단—일본군 고립 격파’했던 전술이다. 인천상륙을 주장하는 까닭은 충분했다. 하지만 군 수뇌의 ‘인천 반대’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해군참모총장 셔먼 대장, 해병대 대표가 도쿄로 날아와 맥아더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맥아더가 입을 열었다."적은 지금 후방을 무시하고 있다.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으니 서울에서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적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전선에 집중되어있으며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 맥아더는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인천 상륙의 다목적 이익을 강조하였다. 상륙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수도 서울, 그 탈환의 상징적 승리 효과는 다른 도시에 비할 바 아니다. 게다가 경부선, 호남선 등 철도의 요충지, 적의 보급망을 단번에 끊어버린다며 맥아더는 지도를 가리킨다. ”인천은 제8군이란 '망치'가 적군을 분쇄할때 제10군단이 '모루' 역을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였다. (맥아더 회고록 [위대한 생애 Great Lives] 일신서적출판사, 1993)귀국한 군 수뇌들은 존슨 국방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마침내 대통령이 ‘인천’을 지지하고 미 합참이 8월28일 공식 승인한다.
★미 해군-해병대 격감...맥아더의 고군분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7월초부터 추진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서울서 6월29일 ‘상륙결심’이후 7월22일에는 인천상륙을 감행할 목표로 ‘블루 하트’(Blue Heart)작전계획을 세웠으나, 본국 병력지원이 형편없이 지연됨으로써 낙동강 전투에 투입할 병력도 부족한 형편인지라 일단 연기, 그러나 ‘준비작전’은 계속 추진해나갔다.
이때 ”미군은 축구경기를 간신히 이기고 해산해 술 마시는 축구팀과 같은 형편“이었다.(웨드마이어 보고서). 2차대전 후의 미군은 ‘퇴역’과 ‘감군’바람에 갈팡질팡이다.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주력이었던 해병대는 35만명을 헤아렸으나 절반으로 격감하고, 하필 6.25나던 1950년초 전면개편을 단행하여 ‘명맥’만 남았다. 610척의 상륙함정도 510척을 폐품처리, 신형함정 건조는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전쟁초기 한국에 급파했던 스미스 대대가 첫 판에 참패한 것은 미육군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원폭 승리’ 이후 군부는 ”공군이 다 해줄 것“이라는 공군의존 인식만 팽배해져 있었다. 존슨 국방장관은 해군대학 졸업식에서 말했다.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 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많이 보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합참의장의 보고에 따르면 상륙작전은 구식이 되었으며 더 하지 않을 것이다. 해군이 하는 일을 공군이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호 [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NEWS WIN KOREA, 2020.9)
도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휘하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 부대 밖에 없었다. 그는 태평양함대로부터 LST등 상륙함 몇 척씩을 배속 받아 훈련단을 만들고, 57명의 해군 및 ·해병 요원들을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그 중에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 도일 제독은 태평양 전쟁시 맥아더의 지휘아래 많은 전투에 성공한 상륙전문가였다. 그는 다시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핵심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을 재조직하여 7월부터 인천상륙작전계획에 달라붙게 된다.
7월27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대구로 날아왔다. 북한군과 싸우는 한미 군사지휘관들과 인천상륙작전을 현장 점검하기 위해서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알몬드 장군, 워커 사령관, 스트레트 마이어 해군제독과 작전회의를 열고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투의 입체작전을 세밀히 논의하며 한국군의 용전을 당부하였다.“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 한 마디뿐이다. 지난 번 한강 시찰에서 이 결의를 굳히고,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알몬드에게 계획을 지시한 바 있다. 바로 인천상륙이다. 하지만 전국(戰局)이 뜻같지 않아 D-Day 7월22일 ‘블루 하트’(Blue heart, 파란 심장)작전을 늦추기로 했다.제2안 ‘크로마이트 작전’도 미본토의 2사단과 1해병여단을 동원해 결행하려 했지만, 낙동강 전선의 급박해진 방어에 또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인천상륙의 두 번째 연기다. 2사단과 해병여단, 하와이의 5연대 전투단 및 5개 전차대대가 8월 중순까지 이곳으로 올 것이다.인천상륙은 기필코 결행한다. 공산군을 깡그리 섬멸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낙동강 방어전에 특히 정일권 장군의 한국군 분투를 당부한다. 한국군은 장비나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으나 미군 GI(병사)들에겐 바랄 수 없는 반공 필승의 투지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이 신념을 갖고 있다.나는 여기 낙동강 라인에 역사적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즉 공산군을 막아낸 방어전이 아니라,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결집력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섬멸해 나가는 반공의 스타트 라인으로 역사에 장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지금 세계 적화를 노리고 있다. 그 첫 시도가 이 한국침략이며, 북한 괴뢰군은 스탈린의 용병(傭兵)일 뿐이다.”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1996). 맥아더는 이 참에 세계공산세력을 격멸하자는 ‘반공전쟁’을 성언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미군 수뇌들을 이끌고 오후 2시반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만은 맥아더로부터 다시 한번 ‘멸공작전’에 관한 설명을 듣고, ‘본토로부터 무기공급’이 8월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역정부터 냈다. “지금 당장 무기가 필요하오. 적군은 피난민들을 앞세워 방패삼이 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미군도 속수무책 아니오. 우리 국군에게 무기를 진작 지급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오” (프란체스카, 앞의 책)
★ 양동작전...X-Ray 작전 & 잭슨 작전...”팔미도 등대 불을 켜라“
드디어 인천상륙 D-Day는 9월15일로 정해졌다.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이 낸 작전계획 크로마이트(Chromite)는 인천상륙(100-B), 군산상륙(100-C), 주문진상륙(100-D) 등 3개안인데 처음부터 100-B(인천)을 결심한 맥아더는 D-Day까지 두 가지 준비작전을 빈틈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천’을 숨기기 위해 타지역을 공격하는 양동작전, 곧 연막-교란작전이고, 동시에 상륙지 인천 항만수로 조사와 주변 적군태세를 탐색하는 첩보작전이다. 크롬 철광석을 지칭하는 ‘크로마이트’를 암호명으로 정한 것 자체가 은폐전술이다. ◉양동작전=북한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이 펼쳐진 지역은 동해안 주문진 삼척, 서해안 군산 등이며, 북한의 함경남도 신포 마량도, 평양남쪽 남포 등이다. 평양의 인천 같은 남포에는 9월4일부터 14일까지 맹폭격을 가하였다.이튿날 5일에는 전북 군산 주변 50km 반경을 13일까지 폭격, 상륙작전 공습패턴을 흉내냈다. 12일 미-영 혼성기습부대가 군산에 상륙을 시도하는 체 가벼운 교전까지 감행하며 북한군에 ‘상륙 시그널’을 보여준 뒤 철수하였다.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이 월미도를 비롯, 인천시와 주변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킨다. 인천에서 군산 사이 해안선 폭격도 멈추지 않았다. 9월 13일에는 동해안 삼척시 일대에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함을 동원한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총반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선언, 대대적인 보도로 나갔다. 이를 본 북한군은 후방의 예비부대들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투입, 대구 장악에 총동원한다. ‘교란작전’ 대성공이다.
◉X-Ray작전 및 잭슨 작전=양동작전과 동시에 맥아더는 인천 상륙에 필요한 해로와 항만정보 수집을 한국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주문했다. 이에 따라 8월 17일부터 함명수 소령(뒷날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첩보부대 17명을 구성, 영흥도와 덕적도를 근거지로 X-ray 작전에 돌입한다. 북한군의 배치와 무기 조사,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을 파악하는 한편, 인천 시가지와 그 주변의 적군 상황을 염탐하는 위장밀행작업도 병행한다.그러다가 막판에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임병래 중위는 대원들을 탈출시키고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벌기 위해 북한군과 싸운다. 첩보대가 무사히 섬을 빠져나가자 임 중위와 홍 하사는 생포시 정보 누설을 걱정하다가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뒷날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들에게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수여하였고, 고속함정에 이들의 이름을 붙인다).
당시 또 하나의 첩보작전이 있었다.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이다. 한국해군첩보대와 별도로 미해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e)대령이 지휘하고 한국군 계인주(桂仁珠) 대령, 연정(延禎) 대위 등과 KLO부대원으로 구성된 첩보부대가 그것이다. 이들은 9월1일 영흥도에 잠입하여 역시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KLO(Korea Liaison Office)는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북한내 활동을 위해 만든 첩보부대로서 구성원은 한국 병사들이다. 즉, 미극동사령부는 해방후 북한에 침투 암약하던 민간특공조직 정의사(正義社)와 백의사(白衣社) 등을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 후에 하나로 통합, 반도호텔 202호실에 비밀본부를 설치한 바 있는데 6.25전해 1949년 6월엔 정식 부대가 되었다. 이들이 북한의 남침후 10여개의 유격부대에 참여하여 ‘켈로부대’로 통칭, 큰 공을 세운다. 인천상륙 준비 ‘잭슨작전’에 참여한 이들은 ”9월15일 0시 팔미도 등대 불을 켜라“는 맥아더 장군의 지령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등대 점등에 성공하게 된다.
◉누가 등대 불을 켰나?=팔미도 등대점등의 공을 둘러싸고 뒷날 뜻밖의 시비가 일어난다. 지휘자 클라크 대령의 보고서엔 ”내가 등대 불을 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2003년 [월간조선]에 켈로(KLO)부대장 출신 최규봉(崔奎峰)옹의 ‘인천상륙작전 비사(秘史)’라는 인터뷰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당시 특공대는 미국인 3명과 한국인 3명, 즉 유진 클라크 해군대령, 클락 혼 육군소령, 존 포스터 육군중위, 계인주 한국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고트대(隊)대장 등 6명이었다. 80세로 유일한 생존자인 최규봉은 ”등대 불은 내가 켰다“고 주장하며 현장 작전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D-1일 14일 오후 7시30분, 최 대장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에 나섰다. 6명의 대원들은 대검, 수류탄 두 발, 권총 등 경무장만 한 채 목선(木船)을 이용해 팔미도 해안가에 잠입했다. 섬은 어찌된 일인지 북한인민군의 저항이 없었다. 등대가 있는 정상까지 60m쯤 기어올랐다. 등대지기 숙소에서 인민군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나와 벼랑 쪽으로 휙 사라졌다. 곧이어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두 명이 도망가는 것 같았다. 이때가 9월14일 23시30분, 등대를 점령하였으나 등대 불을 킬 수 없었다.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3시간 쯤 나사못을 찾다가 기진맥진 엎드렸다. 이때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선뜻한 금속이 잡혔다. 바로 나사못이었다. 환호한 특공대는 마침내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불을 밝힌 우리는 철제난간에 미국기(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최규봉의 주장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나사못을 발견했으니 특공대의 등대 점등은 “내가 붉을 켰다”는 요지이다. 따지고 보면 그 말도 맞고 클라크의 말도 맞는 셈이다. 대원을 지휘한 작전 책임자로서 ‘내가 불을 켰다’라고 기록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그날 대원 6명은 후에 미국 정부가 주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50여년 지난뒤 한국 국방부가 세운 기념비에는 ‘등대점등’ 설명문을 왜 3가지나 붙여놓았을까. 시비가 두려운 탓인가. 이래저래 수많은 KLO대원들의 치열한 투쟁과 소중한 희생과 공로는 아직도 베일 속에서 쓸쓸하기만 하다.
◆ 마침내 인천상륙작전 개시...맥아더 진두지휘
“팔미도 등대 불이 켜졌다” H-아워보다 점등이 좀 늦었지만 기다리던 때는 왔다.총지휘자는 맥아더 장군, 한국군 지휘자는 손원일 제독이다. 연합함대는 일제히 출발한다.항공모함, 구축함, 초계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 미국 225척, 대한민국 1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 등이다. 장병은 무려 7만5천명!하늘을 찢는 함대의 포격 속에 해안으로 돌진하는 유엔군 상륙정들은 한꺼번에 인천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최악의 간만의 차를 이용해야하는 작전은 하루 두 차례씩 진행, 만조(滿潮)때 상륙하고 간조(干潮)때 12시간을 대기했다가 다시 돌진을 되풀이했다. 장병들은 그날 새벽과 저녁때로 나누어 대거 상륙에 성공, 인천시가지를 이틀 만에 점령완료하는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대규모 무기와 군장비, 식량 등 보급품 상륙에는 5일이나 걸러야 했다.
★한미 해병 등 7만 연함군 261척 함대, 세 곳으로 일제히 진격
기함 마운트 맥킨리(Mount McKinley)호에서 맥아더가 쌍안경을 들고 직접 감독하는 연합함대는 좁은 수로를 직진, 상륙정들은 세 방향으로 쏜살같이 돌진하였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미해병1사단과 미육군7사단이 상륙하고, 손원일 제독의 한국 해병연대와 육군 17보병연대가 앞장서 길을 안내하고 전투의 선봉에 섰다.
◉월미도 제압(그린 비치Green Beach)=제1목표는 북한군의 해안포와 동굴진지를 갖춘 월미도와 소월미도, 미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한국해병 1개중대와 함께 상륙정에 나눠 타고 5시 40분 월미도로 돌진한다. 굉음을 울리는 포염에 싸인 월미도 ‘녹색해안’에 선봉대가 6시 30분 도착, 예비대대까지 상륙한 것은 7시, 작전은 대성공이다. 장병들은 두 섬을 샅샅이 뒤져 적군을 일소하고 한시간만에 장악에 성공, 성조기를 계양하였다. 당시 월미도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1개중대와 1개 포대로 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굴복한 적의 포로 136명, 시체 180구가 확인되었다. 아군은 부상 17명뿐이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었다.” 환호성을 지른 장병들은 인천항과 시가지에서 날아오는 적의 포탄에 맛저며 반격 진지를 구축하고 시가지 토벌에 나섰다.
◉인천항 상륙(레드 비치 Red Beach)=상륙작전중 가장 어려운 코스가 인천항이다, 당시엔 바다로 삐쭉 나온 반도형에 높은 암벽지대 ‘적색해안’에 상륙할 미해병 제5연대가 만조를 기다린다. 새벽의 월미도 상륙 성공에 사기가 높아진 병력은 오후 5시30분에 일제히 출발, 해안에 도착하자 길고 높은 암벽과 방파벽에 알미늄과 나무로 만든 사닥다리를 서둘러 걸친다. 일본에서 긴급 제작해 공수해온 수백개의 성곽공격용 장비, 여기서도 앞장선 한국 해병들과 미해병들이 일제히 사닥다리를 기어올랐다. 현재의 북성포구 대한제분 공장일대였다.
◉인천 남동부 상륙(블루 비치 Blue Beach)=부두 남쪽에 연결된 ‘청색해안’에는 미해병 제1연대와 한국해병 제1연대가 신속하게 돌진, 이곳은 평탄한 해안인지라 수륙양용차를 타고 해안 깊숙이 진출하여 일제히 뛰어 올라 진격하였다. 해안을 정리하는 가운데 LST들이 뒤따라와 보급품을 양육한다. 그곳은 현재의 용현동 낙섬 사거리 일대다. ▶전화위복▶승리의 여신도 실수할 때가 있는가? 청색해안에는 조그만 섬들이 여기저기 있는데 통제함이 진로를 잘못 잡아 상륙정들이 예정지 원도(猿島ㆍ낙섬)의 왼쪽 염전일대(현재 낙섬 사거리)로 돌입하고 말았다. 적의 맹렬한 사격에 대항하는 제3대대를 도우려 예정보다 빨리 돌진한 것이었다. 해가 지는 어둠 속의 착오이다. 상류정들을 되돌릴 수 없는 진퇴양난, 제1대대장 호킨스 중령은 용현역 쪽으로 우회코스를 잡았다. 해안과 섬을 연결한 방파제를 3㎞나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앞에 나타난 북한군의 진지들, 해안가에 구축한 적의 배후를 포위한 것이 아닌가. “잡아라” 일제히 뒤에서 덮치는 한미해병대의 역습에 적은 풍비박산, 1개중대 북한군을 그대로 생포했다, 착오 없이 예정코스로 상륙했다면 정면승부로 여러 전사자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행운이었다.
첫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인천상륙작전은 예정대로 대성공이다. 맥아더가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초지일관(初志一貫) 밀어붙인 작전설계 그대로 빛나는 개가를 올렸다. 신속하게 인천 도심을 확보한 장병들은 목표선까지 점령을 완료함으로써 이제 수도 서울 탈환작전에 돌입한다.
(참고-인용 문헌=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013,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전투사] 1987.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1994. [맥아더 회고록], 이상호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백년동안,2014.. [정일권 회고록] 기타 다수)
★김일성은 왜 인천상륙작전을 몰랐던가
휴전후 지금까지 많은 군사전문가나 학자들이 “수수께끼‘라 부르는 사실이 있다. 바로 김일성의 ’서울 체류 3일간‘이 그것이다. 대남침략 사흘 만에 6월28일 서울을 장악하자 김일성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때의 풍경을 돌아보자.미아리 고개를 넘어 도심으로 진입한 북한 탱크들은 요지들을 점령하고 일부는 서대문 형무소로 직행한다. 철문을 부수고 죄수들을 석방, 2천여명의 남로당 죄수들은 즉시 ’반동분자‘ 색출의 사냥꾼으로 앞장선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서울에 쫓아온 김일성은 경무대를 숙소로 정하고 중앙청 지하에 전시 사령부를 설치, 수도서울 점령 축배를 들었다. 그는 축하메시지를 방송하며 ’인민봉기‘를 재촉한다.”남반부의 동조세력과 빨치산은 국방군(한국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유격전을 가일층 치열하게 전개하여 도처에서 인민폭동을 일으키고, 미군들이 이승만 정권에게 원조해주는 무기와 군수품을 우리 국토로 반입하지 못하게 하라...“ 박헌영도 서울을 장악한 그날 남한의 남로당 조직에게 총궐기를 재촉하는 방송연설을 했다.”인민군은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 왔는데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하여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 (하기와라 료(萩原燎) 지음,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발행, 1995)
박헌영의 연설은 호소가 아니라 애원, 꼼짝도 않는 남로당에 대한 분노의 채찍질이다. 얼마나 다급했을까.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장담했던 ’인민봉기의 승리‘는 어찌되는가, 김일성에게도 서울만 점령하면 20만 인민이 들고 일어날 터이므로 전쟁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큰 소리쳤거늘, 서울에만 8만 명이 있다고 자랑한 남로당원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북한 거지‘들의 서울 관광=한편, 평양에서 몰려온 북한로동당 간부들은 서울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반동 숙청‘에 나섰다. 진격을 잊은 인민군 장병들은 말로만 듣던 서울 시내를 휘젓고 다니며 관광하고 상품 사냥에 눈이 뒤집어진다. 간부들은 손목시계, 가죽 구두, 갖가지 옷들을 닥치는 대로 몰수하듯 휩쓸어갔다. ’해방‘의 기대감을 가졌던 좌파 시민들조차 ”북한 거지들이 이대로 눌러앉으면 서울이 텅비게 될 것“이라며 반감이 높아져, 가게 문을 닫고 숨기 시작했다. (박갑동 [한국전쟁과 김일성] 바람과 물결, 1990)
’남조선 해방‘을 자축하는 김일성은 ”성시백을 찾아라“ 명령한다. 해방 이듬해 남조선에 직접 밀파한 직속부하 공작원, 김구-김규식-홍명희 등을 포섭, 남북협상을 성사시켰고, 국회프락치사건을 비롯하여 경찰-국군 포섭 월북사건에다 언론-문화계 공산화의 일등공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것만 알았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부하들이 ”총살된 것 같다“고 보고하자 김일성은 ”시체라도 찾아내라“ 다그친다. 그러나 시체도 찾지 못하였다. 뒷날 패전 후 김일성은 성시백을 ’공화국 영웅 1호’를 주고 ‘애국열사릉’에 가묘를 쓰고 비석을 세운다.
◉패전의 시작 ’서울 3일‘=김일성이 서울에 사흘이나 머물며 빈둥거린 시간은 ”군사전략도 전쟁도 모르는 무지의 오만“이 자초한 패배의 결정적 자충수였다. 소련군의 말리노프스키 원수는 1964년에 말했다. ”김일성이 공격 3일이 지나도 남진을 않는 것을 보았을때 처음부터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은 더 강해졌다. 그때 파멸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다. 전쟁 상황을 분석해보면 김일성은 이미 8월에 패배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스탈린과 김일성](이건주 옮김, 동아일보사, 1992)를 쓴 소련 작가 가브릴 코로트코프에게 한 말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언을 임인(한자 미상)에게 들어보자. 북한정권 수립에 큰 역할을 했던 소련교포 임인은 60년대초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에 쫓겨 소련으로 망명, [북조선 성립비사:김일성 정전](동경·자유사발행)이란 책을 출간하여 김일성의 허구성을 샅샅이 폭로하였다. 임인은 가명이다. ”김일성은 남조선 수도 서울만 함락하면 이승만이 백기를 들고 나올 줄 생각했다. 즉 이승만이 남한정권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요리하시오’ 내주는 나약한 늙은이로 보았다. 그리하여 서울 이남의 모든 전투는 작전계획도 없었다. 소련군이 만들어준 작전이 김일성의 장담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군은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사기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의 전략사상의 빈약성과 국제정치적 판단력의 제한성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한강 도하작전 계획서도 없고 ”한강을 넘을 생각도 않는 것 같았다“고 한다. ‘공부’가 전혀 없는 김일성은 100명이상의 부하를 거느려보지 못한 변방의 빨치산 지휘관 출신, 그것도 전투는커녕 ‘마적 떼’처럼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대를 흘러 다녔을 뿐이다. 6.25당시 인민군 작전국장이던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의 뒷날 증언도 마찬가지였다.”우리 남침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면 끝나게 되어있었다. 일단 서울을 장악하면 박헌영이 약속한 인민봉기가 일어나 더 싸우지 않고도 남한전체가 우리 손에 들어올 것으로 철석 같이 믿고 있었다.“ (유성철 [나의 증언] 한국일보,1990.11.13일자)
◉세가지 ‘오판’=머리가 굳은 원시적 게릴라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준비하면서 멋대로 철석같이 믿는 것이 3가지 있었다. 첫째, 미국은 참전 안한다. 둘째, 박헌영의 20만 인민봉기. 셋째, 소련이 도와주는 것. 그러나 이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는 서울을 점령했을 때 초장에 산산조각이 난다.서울 체류 사흘이 지나던 7월초, 파란 하늘에 검은 비행기들이 나타나 서울 시내에 무서운 폭탄을 퍼부었다. 트루먼의 신속한 참전 결정에 따라 맥아더가 출격시킨 폭격기 공습이다. 미군의 참전, 김일성은 혼비백산 멘붕...이럴 수가...스탈린-마오에게 장담했던 말 ‘미국 불참을 자신한다”했던 혀끝이 비수가 되어 온몸을 찔러댄다. 미국이 참전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빨리...제공권까지 제압하다니...철석같이 믿었던 인민봉기도 감감 무소식인지라 김일성은 심리적 광란을 일으킨다. 스탈린에게 긴급 요청을 보내지만 시간만 흘러간다. ’소련의 참전‘을 극도로 은폐하는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에게도 [프라우다] 신문기자 완장을 차게 하지 않았는가. ’3개월내 국토완정‘의 꿈도 날아갔고, 8월15일 해방기념으로 서울에서 ’남한해방‘ 승전 경축식을 세계가 보란 듯이 펼치려했더니 완전물거품...사라진 망상에 눈앞이 캄캄하다.게다가 공격주력부대 ’팔로군 출신‘ 제6사단(방호산 부대)는 기다리다 지친 듯 멋대로 이탈하여 서부해안을 따라 대전과 호남으로 진격하러 나갔다. 김일성은 이승만의 임시수도 ’대구 정복‘ 명령을 내리며 허둥지둥 날뛴다.
◉‘상륙’ 경고 무시=미군(유엔군)의 참전을 알게되자 정신 못 차리는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매달렸다. 7월 5일. 스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스탈린에게 긴급 암호전문을 보낸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원조를 간청하므로 무기보급이 필요하다“스탈린은 이때 마오에게 중공군 9개사단을 국경지대에 집결하도록 요청하였고 마오는 ‘일단 유보’로 대응한다. 그 대신 북한에게 충고를 한다. ”미군이 북한군을 묶어 놓고, 다른 지역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 같다“며 ”인천이 위험하다“는 구체적 조언도 주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직도 머리가 돌지 않는다. ”걱정 마, 나도 그쯤은 예상한다고“ 낙동강을 향해 총동원령을 내린 김일성은 생각지도 않았던 해안경비작전을 즉흥적으로 짠다.
북한군 후방에는 새로운 부대 107연대가 급조된다. 8월21일 김일성의 명령은 ”해안으로부터 적의 침입을 분쇄하기 위하여 야간 이동을 서두르라”였다. 미군상륙에 대한 작전이 처음 등장한 것.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해 북한군은 7월초부터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해야 했다.미군이 압수한 북한군 작전계획서를 보면, 8월28일 인천방어지구사령부의 전투명령에 ‘미제는 인천방면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는 대목이 나타난다. 그러나 김일성의 인천 대책은 여기까지였다. 인천뿐만 아니라 군산, 삼척, 포항 등에 날마다 포탄을 퍼붓는 미군의 양동작전에 속아 넘어간 김일성은 인천을 여러 상륙후보지 가운데 하나로만 가볍게 보았던 것이다. 다부동 전투등 낙동강 전선에서 남침 중심전력을 거의 궤멸시키고, 인천방어 1개연대는 맥아더의 연합군에 전멸, 서울까지 내놓아야 했다.
◆상륙성공 경축대회...이승만 ”북진 통일‘ 첫 공개 선언
5000대 1의 확률을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칸나이 전투’라 불리기도 한다. 기원전 216년 8월에 벌어졌던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는 제2차 포에니 전쟁중 이탈리아 중부 칸나이 평원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벌인 기마전, 한니발이 진두지휘한 카르타고군은 완벽한 포위작전으로 로마군을 전멸시킨다. 유사이래의 ‘포위 섬멸전’ 성공모델이 되어, 지금도 각국 사관학교 전략교과에 빠지지 않을 정도이다.
인천서 상륙하여 수도 서울과 한반도 허리를 장악, 보급선을 끊어내자 낙동강 전선은 칸나이가 되었다.포위섬멸 지옥에서 살아남아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7만여 명 가운데 2만여명, 포로 1만2000이다. 계급장을 떼고 도망친 인민군은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타고 지리산, 회문산, 백운산으로 흩어져 게릴라로 잠복한다.
◉"북한동포 해방시켜야"=이승만 대통령은 9월 20일 부산 피난수도에서 인천상륙작전 경축대회를 열었다. 하나님과 맥아더에 감사한 이승만은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가서 철의 장막을 쳐부수자”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정일권 총장은 회고록에 이 ‘압록강-두만강 북진’ 이야기를 상세히 써놓았다.9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 D-데이를 15일이라고 보고하자 감격어린 노안으로 대통령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총반격은 언제 하게 되는가?”정일권이 16일부터라고 하자 대통령은 “어디까지 반격할 것인가?” 물었다. “38선까지”라고 답했더니 목소리가 소스라치게 커졌다. .“아닙니다” 대통령은 단호히 말했다. “미군은 그러할지 모르나, 우리 국군의 목표는 백두산이어야 합니다. 38선을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나의 이 결심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그 굳은 결심을 다시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위해 ‘상륙성공 경축대회’를 개최한 이승만이다.“소련이 한국 민주정부를 침략한 것은 민주세계를 토벌하려는 것이므로 연합군이 들어와서 공산군을 물리치며 우리와 협의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38선에 가서 정지할 리도 없고, 또 정지할 수도 없는 것이니, 지금부터는 이북 공산도배를 다 소탕하고 38선을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가서 철의 장막을 쳐부술 것이니, 원래의 우리 국경을 회복하여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할 것이오...”뜨겁고 힘찬 통일논리는 ‘38선 제한’에 묶인 미국과 유엔이 들으라는 최초의 ‘북진통일’ 공개선언이다. 원한 맺힌 38선, 숙원의 남북통일...세계를 향하여 피를 토하며 외치는 이승만의 ‘통일전쟁’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민족 생명의 길!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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