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정신적 지주 모욕인 두둔한 안하무인 항우
반사이익 누렸던 한나라의 전례 재현될까
초한전쟁(楚漢戰爭‧기간 기원전 206~기원전 202)에서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 몰락의 결정적 시발점이 된 건 전체 초나라의 정신적 구심점인 초의제(楚義帝) 시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의제 시살(弑殺)을 일선에서 직접 이행한 인물들에 대한 ‘감싸기’였다.
진(秦)나라를 멸하고서 명실공히 천하의 패자(霸者)가 된 항우는 명목상 상전인 의제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급기야 항우는 제 멋대로 18 제후왕을 봉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나라인 서초(西楚)의 도읍을 전체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彭城)으로 정했다.
자연히 의제는 팽성에서 쫓겨나 침성(郴城)이라는 벽지로 사실상의 유배를 갔다. 침성은 훗날 후한(後漢) 말의 형주(荊州) 계양군(桂陽郡)이 설치되는 자리에 위치한, 밀림과 수풀이 우거지고 맹수가 출몰하는 지독한 산간벽지였다.
그것도 모자랐던 항우는 후환의 싹을 자르고자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등에게 밀명을 내려 아예 의제를 암살하라고 남들 몰래 지시했다.
영포 등은 곧바로 수하들 이끌고 “매국노 황제” “불량품 황제” 외치며 의제를 뒤쫓았다. 사지(死地)에 몰린 의제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인근 백성들은 영포 등의 군사가 물러나고 한밤중이 되자 의제의 시신을 건져 장례를 치렀다. “영포 등이 감히 천자(天子)를 모욕하고 해쳤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듯 만천하에 퍼져나갔다.
영포는 군신(君臣)의 예가 무엇인지, 황제 시해가 얼마나 큰 정치적 여파를 몰고 올지 세상물정을 까마득히 몰랐다. 본시 그는 어린 시절 자자형(刺字刑‧죄명을 문신으로 얼굴에 새김)을 받고서 진시황릉(秦始皇陵) 공사장에 갇혀 노역하던 노예 출신이었다. 표면상 황제 시해라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건 영포 등이었으니 만백성은 이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침 뱉었다.
그런데 항우는 영포 등에게 ‘손절’하는 대신 보란 듯 이 ‘친항파(친 항우)’들을 계속 중용했다. 결국 서초는 내부로부터 분열되고 한고조(漢高祖)의 한(漢)나라는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서초 내분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정공(丁公)이라는 장수였다.
56만 대군을 이끌고 서초를 들이친 한고조는 기원전 205년 팽성에서의 대회전(大會戰)에서 항우에게 무참히 패했다. 3만 정예병만으로 팽성을 탈환한 항우는 “한고조의 목을 가져와라” 좌우에 명했다. 소수만 이끌고 다급히 달아나던 한고조는 그만 정공의 무리와 마주쳤다.
양 측은 곧바로 접전에 돌입했다. 한고조가 직접 검을 빼들고 싸웠을 정도로 전세(戰勢)는 위태로웠다. 2012~2013년 드라마 초한전기(楚漢傳奇)에서는 쓰러진 한고조의 목줄기에 정공이 칼날을 들이댄 것으로 각색됐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한고조는 “왜 영웅이 영웅을 힘들게 하나” 사정했다.
그러자 정공은 돌연 한고조를 살려줬다. 한고조의 목을 항우에게 가져가면 분명 천금(千金)의 보상을 받고 잘하면 왕(王)의 자리까지 주어졌을 게 자명한데 말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이 석방사건은 엄연히 사기(史記) 등에 실린 실제 역사다. 많은 사학자들은 의제를 욕보인 자들에 대한 항우의 총애가 결정적 변심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단 정공뿐만 아니라 서초의 다른 핵심인사들도 주인의 뒤를 따르는 대신 한나라에 줄투항했다.
영포는 일찌감치 한고조의 밑으로 들어갔다. 시해범 중 하나인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는 초한전쟁 내내 양 쪽 대결을 관망했다.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는 종전(終戰) 후 한나라에서 장사문왕(長沙文王)에 봉해졌다. 명장 종리매(鍾離昧)는 통일 후 한나라 장수 한신(韓信)에게 의탁했다. 계포(季布)도 한고조의 측근으로 맹활약했다. 심지어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마저도 전쟁이 끝나자 한나라로부터 국성(國姓)을 하사받고 사양후(射陽侯)에 임명됐다. 그는 전쟁 내내 사실상 한고조와 내통하다시피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친명계인 양문석 경기 안산갑 후보의 과거 기고문을 두고 내홍이 격화되고 있다. 알려지는 바에 의하면 양 후보는 2000년대 말 한 인터넷매체에 올린 칼럼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매국노’ ‘불량품’ 등으로 지칭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여전히 상당수 민주당원들이 따르는 민주당의 정신적 양대 지주(支柱)다.
그런데 최근 이재명 대표는, 물론 그가 십수년 전 노 전 대통령 비하를 지시하진 않았겠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취지로 양 후보를 두둔했다. 이에 “진심으로 사과”라는 양 후보 입장이 무색하게 그간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친노에서도 친명계 비판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동지도 모두 떠나갔던 항우와 그 반사이익을 제대로 누렸던 한나라의 전례가 재현될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