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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용산에 서식하는 타조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7일의 방송 대담에선 장두노미 행태 없길

 

흔히 타조는 평야에서 사냥꾼을 만나면 모래에 머리만 파묻고서 “이건 현실이 아냐” 주문 외는 미련한 동물로 알려진다. 당연히 어이 상실한 사냥꾼으로선 훤히 드러난 타조 꼬리‧몸통을 잡고서 살포시 들어내 예쁘게 결박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타조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모르나 동아시아에는 장두노미(藏頭露尾)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세상천지가 다 아는 걸 혼자만 모른 척 현실부정한다는 뜻으로 원(元)나라의 선비 왕엽(王曄)이 지은 도화녀(桃花女) 등에 등장한다. 2010년에는 교수신문 선정 올해의 사자성어로 등극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아시아 불후(不朽)의 베스트셀러 삼국지(三國志)에도 타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가진 건 힘밖에 없었던 석두(石頭) 여포(呂布‧생몰연도 ?~서기 199)다.

 

여포는 흉노(匈奴)와 국경을 접한 변방 중의 변방인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명목상 한(漢)나라 영토였지만 흉노‧한인(漢人)이 뒤섞여 살았다. 여포도 어려서부터 흉노로부터 창술(槍術)‧도검술(刀劍術)‧궁술(弓術)‧기마술(騎馬術) 등을 익혀 무예가 매우 뛰어났다. 힘도 장사여서 따를 자가 없었다.

 

여포는 당초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휘하에서 복무했다. 189년 영제(靈帝)가 붕어(崩御)하자 정원은 십상시(十常侍) 처단을 은밀히 명 받고 조정에 소환됐다. 대군을 이끌고 수도 낙양(洛陽)으로 향한 그는 집금오(執金吾)에 봉해졌다.

 

이 때 동탁(董卓)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낙양에 당도했다. 그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십상시와 대장군 하진(何進)은 알아서 공멸했다. 그러자 동탁은 마각(馬脚) 드러내고서 창칼 앞세워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최대 위협은 단연 정원이었다. 동탁은 사람을 보내 정원의 오른팔과도 같던 여포에게 투항하라고 꾀었다. 동탁이 보낸 진귀한 보물들에 눈 돌아간 여포는 정원을 죽이고 냅다 동탁에게 가담했다.

 

동탁 휘하에서 여포는 승승장구했다. 벼슬은 도정후(都亭侯)에 이르렀으며 동탁은 그를 양아들처럼 여겼다. 자연히 대(對)정부 로비를 위한 수많은 명품 선물들도 각계에서 여포에게 전달됐다. 여포는 김영란법 따위는 상추‧깻잎‧양배추에 쌈 싸 먹은 지 오래였다. 그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뭘 이런 걸 다. 갖고 오지 마세요” 마음에도 없는 사양을 하며 명품들을 빼앗다시피 해 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동탁이 걸핏하면 사소한 걸로 화내고 자신에게 수극(手戟)까지 내던지자 여포의 불만은 쌓여갔다. 조정원로인 사도(司徒) 왕윤(王允)은 그런 여포에게 접근해 황제의 친위쿠데타에 앞장설 것을 종용했다. 여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 달려가 동탁의 우람한 뱃살에 한 창을 찔러 넣고서 삼성가노(三姓家奴) 달성 이벤트를 완료했다.

 

여포는 새로운 조정 실권자 왕윤의 누렁이가 돼 헥헥거렸다. “손” 하면 발을 얹고 “발” 하면 손을 얹는 등 재롱 피웠다. 그런데 여포는 동탁을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 명품수수 등은 일절 언급 않은 채 입 싹 닦았다. 누군가 명품의 미음자만 꺼내도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 처박고서 “아, 안 들린다” 스스로 최면 걸었다.

 

여포는 나아가 철면피를 자처하듯 분위장군(奮威將軍)‧온후(溫侯) 등 으리으리한 자리들을 덥석 받아 챙겼다. 최소한 “제 과오를 뉘우칩니다” 엎드리며 벼슬을 사양하는 척,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척이라도 해야 얼마간의 동정표라도 얻을까 말까 했는데 아무 제스처도 말도 없었다. 명품들 행방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도덕성과는 일억 광년 떨어진 여포의 작태는 필연적으로 지지율 폭락을 야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엔 여포가 된장을 된장이라 해도 믿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여포는 왕윤의 3일 천하가 끝나자 떠돌이 신세가 돼 방랑하다가 하북(河北)의 강자 원소(袁紹)의 객장(客將)이 됐다. 원소의 요구로 흑산적(黑山賊) 토벌에 투입된 여포는 용맹 뽐내며 도적들을 격퇴했다. 그러자 원소는 군사 30명을 풀어 여포를 ‘죽이려’ 했다. 원소가 아무나 막 죽여 대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간에 퍼진 여포의 악명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혼비백산해 달아난 여포는 조조(曹操)의 연주(兗州)를 뺏으려다 실패하고서 서주(徐州)의 유비(劉備)에게 의탁했다. 이 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하장수’ 학맹(郝萌)이 오밤중에 반란 일으켰다. 여포가 도주한 사이에 한 팔이 잘리면서까지 학맹을 제압한 또 다른 휘하장수 조성(曹性)은 “진궁(陳宮)이 학맹과 거사를 모의했습니다” 고발했다. 진궁은 여포 세력의 일급참모였다. 조성이 폭로하자 진궁은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다. 즉 오랫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일급참모와 지휘관급 장수가 의기투합해 여포를 베려 했던 것이다.

 

지각과 맨틀을 뚫고 외핵을 넘어 내핵까지 폭락한 지지율의 결말, 장두노미의 최후가 좋을 리 없었다. 198년 조조가 서주를 들이치자 여포 수하의 후성(侯成)‧송헌(宋憲)‧위속(魏續) 세 장수가 한꺼번에 배반해 진궁 등을 묶어다 조조에게 바쳤다. 홀로 고립되다시피 한 여포는 백문루(白門樓)에 피신했다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포박된 채 조조 앞에 등장한 여포는 “당신이 보병을 지휘하고 내가 기병을 지휘하면 천하평정은 식은 죽 먹기요. 안 그렇소? 그러니 살려주쇼” 멍멍거리며 애걸했다. 문득 욕심이 동한 조조는 말없이 유비를 쳐다봤다. 한심하다는 눈길로 여포를 내려다보던 유비는 “귀하는 정원과 동탁을 잊었습니까?” 넌지시 말했다. “저 귀 큰 아이가 제일 못 믿을 놈이다!” 적반하장식으로 발악하며 끌려 나간 여포는 산더미 같은 명품들 뒤로 한 채 밧줄에 목매달려 타조 같은 일생을 마감했다. 끝까지 제 과오는 인정‧사죄하지 않았다.

 

명품수수 의혹 당사자 배우자 A씨의 한 방송 대담이 오는 7일 방영된다고 한다. 이들은 그간 의혹에 일절 함구해 장두노미 비판을 자초했다. 때문인지 A씨 지지율은 재차 마의 30%대가 무너졌다고 한다. 정계와 각계에서는 이제라도 모래에 머리 파묻는 대신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더 이상 뻗칠 망신살도 없는 당원과 국민은 해명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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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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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극우들 사이에서는 ‘사과하면 안 된다. 사과하는 순간 끝이다’라는 논리를 펴는데 대체 이 나라가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