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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얌전하면 안 해칠게. 그러니 다 내놔”

오주한

對北 저자세 태도, “조폭아 평화롭자” 하는 격

불가역적 망국 대신 ‘힘에 의한 평화’ 선택해야

 

두 날건달 이야기

 

이각(李傕‧생몰연도 ?~서기 198)은 후한(後漢) 말 군벌이다. 같은 동탁(董卓) ‘꼬붕’ 출신인 곽사(郭汜‧?~197)와 함께 흔히 세트로 묶인다. 위(魏)‧촉(蜀)‧오(吳) 다툼을 위트 있게 재해석한 작가 최훈의 웹툰 삼국전투기에선 감자튀김‧콜라 세트메뉴로 그려졌다.

 

이각은 191년 동료 화웅(華雄)이 ‘강동의 호랑이’ 손견(孫堅)에게 목숨 잃자 강화요청에 나선 사자로서 사서(史書)에 첫 등장한다.

 

이각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영향으로 잡장(雜將) 취급당하나 실은 동탁 휘하 대장 중 하나였다. 여포(呂布)의 서열도 이각보다 한참 낮았다. 극적인 묘사 없이 후한 말 난세를 드라이하게 기록한 진수(陳壽)의 정사(正史)삼국지 등에 의하면, 이각은 후한의 노장(老將) 주준(朱儁)을 격퇴하는 등 놀라운 기염들 토했다.

 

허나 성정(性情)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조폭’에 가까웠다. 주준을 물리친 이각은 곽사와 함께 진류군(陳留郡)‧영천군(潁川郡) 등지의 성인남성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끌고 갔다. ‘조조(曹操)의 장자방’ 순욱(荀彧)도 이 때 대학살 피해 고향 영천을 떠났다. 이각은 소제(少帝) 유변(劉辯)의 빈(嬪) 당희(唐姬)를 사로잡자 제 수청(守廳)을 들 것을 감히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광란(狂瀾)의 폭주 펼쳐지던 192년 동탁은 후한의 노신(老臣) 왕윤(王允)에 의해 참살됐다. 서영(徐榮)‧호진(胡軫)‧여포 등 내로라하는 동탁 졸개들도 모조리 왕윤에게 붙었다. 동탁의 사위 우보(牛輔) 등도 줄줄이 목이 떨어졌다.

 

이각은 “나 정도 사람이면 쟤들처럼 항복 받아주겠지” 여기며 백기 내걸었으나, 왕윤은 당연히 이 미친 살인귀(殺人鬼)를 거두지 않았다. 황망해진 이각은 “망했다” 외치며 군사를 내버려두고 곽사와 함께 야반도주(夜半逃走)하려 했다. 아무리 간 큰 놈이라 해도 국가공권력(公權力), 천자(天子) 타이틀 앞에선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각은 희대의 처신가 가후(賈詡)의 “네 수하들은 군병(軍兵)이 아닌 허수아비냐” 조언에 겨우 정신 차리고 이판사판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갔다. 이각은 왕윤이 보낸 여포‧서영 등을 잇달아 격파했다.

 

포위 8일만에 마침내 도성 장안(長安)에 난입한 이각은 날이 시퍼런 창칼 어루만지며 “순순히 내 말 들으면 천자씨는 살려는 드릴게” 협박했다. 물론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백성들은 집단 도륙‧유린됐다. 왕윤은 황제를 대신해 수 갈래로 찢겨져 죽었다. 여포는 장안을 탈출해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신세 됐다.

 

달라는 것 다 줬더니 “황위도 내놔”

 

소제의 후임 헌제(獻帝) 유협(劉協) 및 백관들로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 조폭무리‧도적떼를 척살해 백성‧나라를 구해야 했다. 또 다른 권신(權臣)이 나타나든 어떻게 돼든 나라는 이미 위태롭긴 마찬가지고 잘 하면 나라를 구할 수도 있으니, 마치 과거 십상시(十常侍) 처단 위해 동탁을 불러들였던 것처럼 만천하에 격문(檄文) 뿌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야 했다.

 

예를 들어 이각‧곽사에게 벼슬의 차등(差等)을 두는 식으로 둘을 반간(反間‧이간질)하거나, 장제(張濟)‧번조(樊稠) 등 이각의 다른 동료들 속내를 은근히 떠 보거나, 상술했듯 제후들을 잘 구슬려 소집할 수 있었다. 군웅(群雄)들 중엔 아직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 게다가 유우는 북방의 맹주 공손찬(公孫瓚)‧원소(袁紹) 등으로부터 두루 복종(服從) 또는 인망(人望) 얻고 있었다.

 

어떤 계책을 꾸미다 발각되든 이각‧곽사가 미치지 않는 한 입궁(入宮) 초기부터 황궁(皇宮)을 피칠갑 도배할 순 없었다. 수천년 간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한 천자란 존재는 여전히 절대적이었으며, 시해(弑害)는 곧 “나 역적이다” 만천하에 광고해 제2의 제후(諸侯)연합군 결성 명분을 주는 꼴밖에 안 됐다. 아둔한 이각 등도 그 정도 이치는 알았다.

 

하지만 조폭 문신‧흉기 등에 지레 겁먹은 헌제‧백관들은 “평화가 먼저다” 주장하며 “쟤들 요구 전부 들어주면 우릴 해치진 않겠지” 여겼다. 그 중에는 이각과 내통(內通)하면서 제 권세‧사상만 추구하는 ‘간첩’도 있었다.

 

조정(朝廷)은 생각하기를 중단하고 도적떼가 달라는 대로 다 줬다. 이각은 거기장군(車騎將軍)‧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지양후(池陽侯) 등에 봉해졌다. 거기장군은 대장군(大將軍)에 맞먹는 군직(軍職)이고, 영사례교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서울지검장‧서울경찰청장 격이다. 곽사에게도 으리으리한 명패‧명함이 주어졌다. 아는 거라곤 칼질밖에 없는 이각 졸개들에게도 갖가지 벼슬이 하사됐다.

 

이각 등이 돌연 ‘겸손모드’로 돌변해 “황공(惶恐)하옵니다” “신(臣)이 죽일 놈이옵니다” “아아 장렬히 순국(殉國)하고파” 눈물 짰을 리 만무하다. 이들은 더더욱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돼 갔다.

 

각지 공물(貢物) 중 귀한 것은 먼저 이각 등 주머니에 들어가고 별 잡다한 것들만 국고(國庫) 및 내탕(內帑‧황제 개인금고)에 채워졌다. 이각은 동탁의 모사(謀士) 출신 이유(李儒)를 헌제가 엄단하려 하자 “불쌍한 노인네 왜 괴롭히나” 대놓고 항명(抗命)하고 무시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각은 “자, 그간 내 말 잘 들었으니 이젠 국토(國土)를 내게 넘긴다는 이 문서에 옥새(玉璽) 찍으쇼” 제 옛날 주인처럼 선양(禪讓)쇼 즉 ‘찬탈(簒奪)’도 남들 안 보는 데서 꾀했다.

 

끝내 패망한 한나라

 

조정이 손 놓는 사이 백성‧나라를 구한 건 웃기지 않게도 순전히 ‘운’이었다. 194년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은 조정실세 이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다가 면박만 얻었다. 앙심 품은 마등은 한수(韓遂)와 함께 장안을 쳤다가 격퇴됐다.

 

마등‧한수의 난 후에는 익주목(益州牧) 유언(劉焉)이 군사 몰고 왔다가 마찬가지로 패했다. 동쪽에선 연합한 원소‧조조가 장안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이각 등의 용명(勇名)은 올랐으나 체력은 크게 깎여나갔다.

 

나아가 무게중심 잡으려 뇌 달고 다니는 이각‧곽사는 치국(治國)을 창칼로 해결했다. 관모(官帽) 쓴 도적떼들과 진짜 도적떼들은 번갈아가며 백성을 약탈했다. 식자재 물가는 급등했고, 길거리에는 백골(白骨)이 즐비했으며, 부모가 제 자식을 이웃 자식과 바꿔 먹는 규환지옥(叫喚地獄) 펼쳐졌다. 농사조차 못 짓는 상황에서 약탈물이 무한(無限)할 리 없으니, 음주가무나 즐기던 조폭무리 주머니는 이내 텅텅 비다시피 했다.

 

설상가상 이각‧곽사 등은 한정된 수탈자원, 하나뿐인 옥좌(玉座) 두고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이각은 우선 동료 번조를 “한수와 사통(私通)했다” 죄 씌우며 참살했다. 곽사의 아내는 이각 집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남편이 이각 처와 바람났다 단정 짓고 둘을 이간질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각이 준 고기에 독극물(毒劇物) 타 개에게 던져줘 “저것 봐라. 이각이 당신 죽이려 한다” 속닥거린 것으로 묘사된다. 조정백관 누구도 엄두 못 낸 반간계(反間計)를 아이러니하게도 곽사 아내 시골아낙이 해낸 것이다.

 

두 건달패거리가 장안성 시내에서 진흙탕 개싸움 벌인 삼보의 난(三輔亂)으로 도적떼 세력은 완벽히 쪼그라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안성 내 백성이란 백성도 씨가 말라버렸다. 헌제는 “천자 모시는 나야말로 충신이다. 곽사는 역적” 이죽거리는 이각의 ‘얼굴마담’ 신세 됐다가 극적으로 달아났다.

 

애초부터 “힘에 의한 평화” 입각(立脚)해 단호히 손썼더라면 큰 피해 없이 진압됐을 조폭떼거리 난동이, 돼도 않는 평화쇼 하면서 막 퍼주다가 백성 결딴나고 나라 망하기 일보직전에야 순전히 ‘운빨’로 유혈(流血)종료된 것이었다. 허나 그 후유증 때문에 도읍(都邑)은 조조 근거지 허창(許昌)으로 옮겨지고, 얼마 못가 400년 한나라는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굴종외교 결과는 불가역적 적화통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여러 사람 눈길을 끌고 있다.

 

문재인 씨는 최근의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행사 인사말에서 “평양공동선언이 더 진도(進度)를 내지 못했던 것, 실천적 성과로 불가역적(不可逆的‧되돌릴 수 없는)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며 “(남북 평화무드) 이어달리기 공백기간이 짧을수록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는 낮아질 것이고 남북은 그만큼 평화에 다가가게 될 것” 주장했다.

 

9‧19선언 등으로 남북이 ‘샤방샤방’ 화해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다. 허나 현실은 정말 그럴까. 3살 아이마저도 주지(周知)하다시피 북한은 연일 ‘서울 불바다’ 취지 공갈을 내놓고 있다. 아예 대남(對南) 선제 핵공격도 명문화(明文化)했다. 정권교체 후에는 간첩의혹 세력들이 국내에서 잇달아 적발되고 있다.

 

조폭‧건달의 논리‧습성은 다음과 같다. 처음엔 온 몸 ‘그림’ 그리고서 목표물 찾아가 무전취식(無錢取食) 하며 “내 말 안 들으면 알지?” 협박한다. 그 단계에서 피해자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과감히 맞서거나 공권력(公權力)에 의지하면 더 이상의 피해정도는 감소한다.

 

허나 “알았소” 계속 내어주면 조폭은 아예 안방에 둥지 틀게 되고, 머릿수 더 늘리면서 더 흉악한 흉구(凶具)로 무장해 공갈수위 높이다가, 끝내 “땅(집)문서 내놔. 안 주면 해친다”는 단계에까지 접어들게 된다. 그 지경까지 가면 문 씨 말마따나 ‘불가역적’ 상황이 되고 만다.

 

북한은 조폭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인도적(人道的) 지원 끝에 돌아온 건 핵무기 그리고 원색적(原色的) 협박과 “네 땅 내놔라”다.

 

필자가 20년 가까이 언론계 몸담고서 정치‧사회 취재하는 과정에서 북한 국가보위성(SSD) 등에 의한 납북(拉北)위기, 중국 국가안전부(MSS) 등에 의한 억류위기, 기타 잡범들에 의한 갖은 협박에도 지금까지 건재한 건 강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누구 말마따나 “난 평화주의자”라며 집 문 활짝 열어놓으면 강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도적떼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暴增)한다.

 

북한정권도 이처럼 ‘힘에 의한 평화’로 다스려야 한다. 박정희정부 등이 북한과 대화할 땐 대화하고, 도발할 땐 단호히 대처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아가 내부적으로는, 누구라고 콕 집어 얘기하진 않겠으나, 셀프성역(聖域)의 매국노(賣國奴)들도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 일부 국민도 장밋빛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퍼주기식 평화’ 끝에 다가오는 건 우리 국토 땅문서 즉 주권(主權)마저 내어주는 불가역적 적화(赤化)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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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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