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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요구한다, 그 입 다물라

오주한

실언망동 끝 지지자 소하마저 등 돌린 한신

‘재난에 尹 할 일 無’ 실언들 속출하는 용산

 

항우라는 大재난

 

한신(韓信‧생몰연도 ?~기원전 196)은 초한(楚漢)전쟁 당시 한나라 장수다. 토사구팽(兔死狗烹) 고사 유래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통일 후 필요 없어진 사냥개를 날름 삶아먹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실상 토사구팽 배경에는 해선 안 될 실언(失言) 등 한신이 제 손으로 판 무덤이 있었다.

 

진(秦)나라 말기 폭정에 대항하는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이 발발하자 항우(項羽)도 숙부 항량(項梁)을 따라 거병(擧兵)했다. 진나라는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정치로 백성을 학대하고 있었다. 가령 홍수‧지진 등 불가항력(不可抗力)적 요인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등 부역(賦役)에 조금 늦었다 해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처형해버렸다.

 

항량은 반진(反秦) 구심점 확보를 위해 초나라 왕족 후손을 찾아낸 뒤 의제(義帝)로 추대했다. 의제는 항우‧한고조 중 먼저 진나라 중심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자를 그곳 왕(王)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승자는 한고조였으나 항우는 뒤따라와 무력시위 벌이며 억지 부렸다. 홍문연(鴻門宴)에서 죽다 살아난 한고조는 한왕(漢王)에 봉해져 산간벽지(山間僻地) 촉(蜀)땅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진나라가 망하나 싶더니 이제는 항우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처하고서 전횡(專橫) 일삼았다. 그는 항복한 진병(秦兵) 수십만을 산 채로 생매장해 만백성의 원한을 사기도 했다. 통일 진제국(秦帝國)에는 진나라 토박이 외에 옛 6국 출신들도 상당수 강제징집된 상황이었다. 마땅히 이들을 다독인 뒤 귀향(歸鄕)시키거나 군문(軍門)에 남게 해야 했지만, 단지 적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우는 모조리 죽여 없앴다.

 

유배 과정에서 한고조는 한신을 얻었다. 한고조는 제장(諸將)들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서 ‘한신 지지자’ 소하(蕭何) 뜻대로 한신을 대장군에 삼았다. 이후 항우의 의제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역적타도”를 명분으로 초한전쟁을 일으켰다. 한신은 촉‧중원 사이 길목을 막고 있던 명장(名將) 장한(章邯) 등을 암도진창(暗渡陳倉) 계책으로 격파했다.

 

한고조는 수십만 제후연합군을 이끌고서 항우(不在)의 부재(不在)를 틈타 그의 근거지 팽성(彭城)을 손쉽게 함락했다. 머릿수만 믿은 한고조는 자만에 빠졌다. 한신은 제(齊)나라 반란을 토벌 중이던 항우를 경계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한고조는 듣지 않았다. 제후연합군은 무서운 기세로 회군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에게 단번에 박살났다. 이 때 항우가 이끈 병력은 3만 정병(精兵)이 전부였다.

 

한신에게 의지한 백성들

 

한고조는 미친 듯 달아나 겨우 패잔병을 수습했다. 그의 패배를 지켜본 각지 제후들은 항우에게 투항하거나 자력갱생(自力更生)에 나섰다. 한고조는 한신과 만나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한신은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를 제시했다.

 

다혈질이었던 항우는 당시 한고조를 잡아 죽이고자 혈안이 된 상태였다. 이러한 한고조가 미끼가 돼 항우 본대(本隊)를 묶어두는 사이, 대장군은 일군(一軍)을 이끌고 우회해 배신‧할거한 제후들을 평정한다는 게 한신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항우를 사방으로부터 고립시켜 사면초가(四面楚歌) 형세를 만들 수 있었다. 한고조는 오로지 한신만을 믿고서 이 위험한 계책을 승인했다. 항우를 증오하는 백성들 상당수도 한신에게 의지했을 여지가 크다.

 

대장군 한신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한고조에게서 항우에게로 빌붙은 위왕(魏王) 위표(魏豹)부터 쳤다. 위표는 백직(栢直)이라는 자를 대장으로 세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놈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 코웃음 친 한고조 예상대로 위군(魏軍)은 초전박살 났다. 참고로 이 때 사로잡힌 위표의 왕비 박희(薄姬)는 한고조의 후궁(後宮)이 돼 훗날 명군(明君) 한문제(漢文帝)를 낳는다.

 

힘이 난 한고조는 자신을 따르는 몇 안 되는 제후 중 한 사람이었던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및 3만 군마(軍馬)를 한신에게 더해줬다. 이 정병은 항우를 감당 못 하던 한고조에 의해 얼마 못 가 다시 회수됐다. 오합지졸(烏合之卒)만 이끌게 됐음에도 한신은 대(代)나라를 격파했다. 이어 조(趙)나라 평정 때는 그 유명한 배수진(背水陣)을 동원해 대승을 거뒀다. 연(燕)나라 군대는 한신이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바람에 휘날리듯 항복했다.

 

정병을 일껏 줬다가 다시 거둬간 것에서도 드러나듯, 이 무렵 한고조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이었다. 소하가 관중에서부터 미친 듯 신병(新兵)‧물자를 보급하고, 거야(巨野)의 도적 팽월(彭越)이 신들린 유격전(遊擊戰)으로 항우 보급로를 차단하며, 노예왕 영포(英布)마저 한고조에게 투항해 힘을 보탰지만 상대는 항우였다. 항우는 촘촘한 그물망을 급속도로 찢어버리며 한고조를 무섭게 압박했다.

 

그런데 한신은 명색이 ‘한나라 대장군’임에도 한고조를 돕지 않았다. 기록에는 불분명하지만, 분명 위험성 다분한 북벌(北伐)이 결정됐을 때 “내가 위태로우면 반드시 지원하러 오라”고 한고조가 한신에게 신신당부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대국가에서 황제(또는 왕)는 나라 그 자체였으며, 임금이 죽으면 그 세력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기(將棋)‧체스(Chess) 등 역사 깊은 게임들에서 체크메이트(Checkmate), 즉 상대 왕을 외통수에 내몰리게 하면 이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도 백성은 못 구한다”

 

한고조를 외면하는 건 곧 ‘대재앙’ 항우에게 고통 받는 ‘백성’을 외면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한신은 심지어 주군(主君)을 도우려 가는 ‘척’도 하지 않고서 꼼짝하지 않았다. 자연히 한나라 문무백관들은 배신감에 술렁였다.

 

결국 일은 터졌다. 한고조 측 계책으로 참모 범증(范曾)을 잃은 항우는 분노로 눈이 뒤집어져 한고조 진영을 총공격했다. 팽성에서의 대패 때처럼 한고조는 또다시 위기에 내몰렸다. 충신 기신(紀信)이 한고조로 분장해 항우를 유인하다가 붙잡혀 산 채로 불타 죽고, 충신 주가(周苛)가 끝까지 형양성(滎陽城)을 사수하다가 붙잡혀 산 채로 삶겨져 죽는 등 피비린내 진동 끝에 한고조는 겨우 도주에 성공했다.

 

미처 피신 못한 백성들은 단지 한고조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창칼에 무참히 도륙(屠戮)됐다. 병졸(兵卒)처럼 꾸민 채 기신과 함께 항우를 유인했던 여성 수천 명은 여자로선 결코 겪지 말아야 할 꼴을 당하고 말았다. 한신에 대한 백성의 기대는 원한(怨恨)으로 변했을 공산이 크다.

 

한신이 사정상 직접 오진 못하더라도 얼마간의 지원군만 보냈더라면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고조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고조는 하후영(夏候嬰)이 운전하는 마차에 탄 채 그 길로 쉬지 않고 달려 한신의 군영(軍營)으로 ‘돌격’했다. 이 때 한신은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주군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고뇌(苦惱)하는 대신 ‘편히 잠자고’ 있었다.

 

위병(衛兵)에게 “난 한왕(한고조)의 사신”이라고 둘러대고서 한신 막사로 진입한 한고조는 망설임 없이 대장군 인수(印綏)‧부절(符節) 등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인사(人事)배치를 끝내 한신 휘하 직할권(直轄權)을 제 손에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조참(曹參)‧관영(灌嬰) 등 한고조를 오래 따랐던 장수들을 부장(副將) 명목으로 붙여 한신을 감시토록 했다.

 

만약 한고조가 범부(凡夫)였다면 그 날은 곧 한신의 제삿날이 됐을 터였다. 그러나 한고조는 북방이 안정되지 못한 탓에 한신이 외지(外地)에서 고생하느라 도우러 오지 못했을 것이라 억지로 여기고서 용서했다.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못했기에 한신의 능력 또한 없어선 안 됐다.

 

하지만 한신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어느 정도 패배 후유증을 정리한 한고조는 제나라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당초 한신에게 제나라 정복을 명했던 한고조는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참모 역이기(酈食其) 제안에 그를 사자로 파견했다. 항우와 철천지원수였던 제나라도 역이기를 환대했다.

 

이 때 한신도 제나라가 역이기를 통해 투항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역이기는 제왕(齊王)에 의해 솥단지 안 끓는 물에 내던져져 어이없이 사망했다. 한고조가 폭발했을 것임은 안 봐도 뻔하다. 한신은 그 때를 틈타 제나라와 화해한 항우가 보낸 용저(龍且)의 대군마저 격파했다.

 

5개국 평정 등 영토를 확장하며 제 욕심만 차리는 듯한 태도였던 한신은 ‘해선 안 될 실언’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항우의 기세가 드세니 나를 도우러 오라”는 한고조 명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았다. 이는 곧 ‘내가 가봐야 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한신은 대신 참모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가 자신을 제나라 가왕(假王‧임시왕)에 봉해달라고 한고조에게 요구했다. 이는 백성구제에는 관심 없고, 한왕(한고조)과 같은 반열(班列)에 서는 등 제 욕망에만 충실하겠다는 적나라한 고백이었다.

 

장락궁에서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참을 수 없게 된 한고조는 “나는 포위돼서 죽을 지경인데 너는 왕이 되려 하느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사실 한고조가 그때까지 참은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신이 정말 모반(謀反)할까 우려했던 한고조는 초인(超人)적 의지로 냉정을 되찾고서 가왕이 아닌 ‘진짜 왕’에 봉했지만, 한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대초(對楚) 포위망이 완성되자 기원전 202년 한고조는 마지막 결전을 위해 한신 등을 해하(垓下)에 집결시키려 했다. 이때도 한신은 봉지(封地)를 늘려달라고 요구하면서 꼼짝도 않다가 한고조가 허락하자 마지못해 움직였다. 항우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절망하다가 우희(虞姬)와 함께 자결했다.

 

초한전쟁이 막을 내리자마자 한고조는 신속히 한신 막사로 쳐들어가 인수 등을 다시 빼앗았다. 한신은 여러 대신들에 의해 모반혐의로 탄핵(彈劾)돼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됐다. 그러자 한신은 정말로 거록태수(鉅鹿太守) 진희(秦豨)와 모의해 반란을 획책했다. 발각사실을 모르던 한신은 자신을 추천했던 ‘과거 지지자’ 소하 초대로 입궁(入宮)했다. 한고조의 황후 여후(呂后)는 한신을 포박한 뒤 장락궁(長樂宮)에서 처형했다. 한신은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린 끝에 비참히 눈감았다.

 

현재 전국적 폭우(暴雨)로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해외순방(巡訪)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조기귀국 요구가 쏟아진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순방일정을 연기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은 “우크라이나 (정부) 초청으로 국익(國益)을 위해 불가피하게 연장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순방연장은 한신의 북방평정처럼 지난 정부에서 어지러워진 외교정상화 목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폭우사태는 한덕수 국무총리 등이 대신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실에서 해선 안 될 실언이 나오고 말았다. 다수 언론보도에 의하면 대통령실 관계자는 “(순방연기 이유는) 대통령이 당장 서울에 가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많은 국민은 불어나는 인적‧물적 피해 앞에 국정(國政) 컨트롤타워의 리더십을 원하고 있다. 하다못해 한고조가 한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최소 ‘책임지고 노력하는 모습’만이라도 보여줄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만찬 호화요리 등이 오가는 각 국 정상 등과의 회담 보도 빈도(頻度)에 비해, 대통령이 수해(水害)대책 온라인회의를 밤낮으로 주재(主宰)했다는 언론보도 빈도는 현저히 낮다. 그 와중에 ‘가도 할 일이 없다’는 취지인 듯한 폭언(暴言)이 나오고 만 것이다.

 

아무리 한고조처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소하처럼 믿음이 굳건한 사람이라 해도,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듯한 태도의 공무원을 용납(容納)하고 마냥 박수치며 응원할 이는 많지 않다. 이미 “호객행위 때문” 해명에 실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실언‧망동이 거듭되면 한신의 모반소문처럼 비록 가짜인 풍문(風聞)이 일부 있다 해도 진짜로 둔갑(遁甲)하고 만다. 분노‧피로는 누적 또 누적되다가 장락궁의 그것처럼 결국 터지고 만다.

 

대통령실에 묻고 싶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 모든 실언 등의 근원(根源)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단호히 요구한다. 그 입 다물 것을. 도저히 개선(改善)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필자를 포함한 상당수 국민의힘 지지자‧당원들은 오늘날의 한신을 야당에 앞서 도려냄으로써 더 이상의 민심이반(民心離叛)을 막고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팔릴 ‘쪽’도 없다. 이대로 가다간 사면초가에 내몰리는 건 야당이 아닌 여당이 될 수 있다.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의 역사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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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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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켈켈켈
    2023.07.17

    대통령이 수해 때 할게 없으면 그동안 뭣하러 재난대책회의 열고 그런거노

  • 켈켈켈
    오주한
    작성자
    2023.07.17
    @켈켈켈 님에게 보내는 답글

    수해피해 없는 대구시 책임자(홍 시장님)더러 24시간 시청에 눌러 살라고 억지부리며 재난을 정치도구화하는 야당이 더 큰 문제입니다만, 용산이 잇따른 삽질로 야당 패악을 가려주고 있는 게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 INDEX
    2023.07.17

    저는 잘한건 칭찬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인의 능력이란것을 믿지 않습니다. ㅋㅋ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해서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은 그들이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작년에 2조원의 피해를 입고 스스로 방재대책을 세우는 포스코를 보았을때 개인 민간이 해야할일은 명백합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직원은 짤립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17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지난 대선 경선 후 저를 포함해 주변 상당수 국민의힘 지지자가 절망하면서도 그래도 밤새 국민의힘 승리를 기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가 국민의힘 안방에 속함에도 유독 야당 지지자가 많은 편입니다만, 이젠 그들을 보수우파 가치로 설득하기도 지치고 그저 쪽팔릴 따름입니다.

  • 오주한
    INDEX
    2023.07.17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장마 예보가 시작되던 시점. 그때 국민들에게 장마기간에 피해가 없게 같이 대비를 해보자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도 그 누구나 지금의 대응을 문제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해야할때 모든 정치인은 양평 고속도로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놀고있었습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17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과거엔 정쟁 하더라도 할일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어쩌다 저질 진흙탕이 됐는지 기가 막힙니다.

  • 풀소유

    이미 사면초가에 몰렸다는 위기감도 못 느끼는 듯 합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원성에

    저렇게 귀를 막고 헛소리까지 해대고 있으니...

    애초에 문재인의 사냥개로 보수를 궤멸한 기회주의자에 좌파 비리 처가를 보며 진실성 있는 민생 정치를 기대도 안했습니다만 아득히 선을 넘을 때마다 욕이 절로 나옵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7.17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여야 모두 다른 나라 일이었다면 아마 매일 웃음건강이 증진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