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결성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고 해도 4.11이 아닌 4.23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4.11 결성된 상해 임정이 아닌 4.23 결성된 한성 임정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헌 국회 개회사(이승만 국회의장) "이 민국(民國)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道)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大韓獨立民主國)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民主主義)에 기초를..."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己未年)에 서울에서 수립(樹立)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것은 1919년에도 1948년에도 보편 상식이었습니다.
제헌 헌법 전문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우리는 3.1운동으로 임정을 결성할 때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있을 뿐 실제 임정 조직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져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해방 이후 실제 임정 조직은 대한민국의 독립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임정의 지도자 김구 선생이 주장하던 임정 법통론은 임정을 그대로 정식 정부로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김구 선생은 그 선거에 보이콧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을 부정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의 주역은 김구 선생의 임정이 아닌 이승만, 안창호, 송진우, 장덕수, 김성수 등이 주장하던 실력 양성 운동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임정은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임정은 해방 공간에서 주역으로 활동할 수 없는 행적을 갖고 있었고 장덕수 선생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후로는 남한 땅에서 설 곳을 잃습니다.
조선은 위화도 회군을 통해 명의 제후국을 자처하며 출발해 명청 교체기에는 청에 무릎을 꿇었고 청일 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에 붙었으며 러일 전쟁 이후 일제에 병합되었습니다.
고려는 원의 지배에서 독립하고자 했으나 조선의 오랜 중화 사상은 지배를 받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는 체제를 형성했고 대한제국 역시 소중화 사상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소련이 김일성을 내세워 또 다시 괴뢰국을 세우고 지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남한만이라도 저지를 하고 독립을 해서 아픈 역사를 딛고 근대화를 이루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