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국립국어원과 JTBC가 흥미로운 조사를 한 게 있다. 학교 측의 동의를 받고 관찰카메라와 소형 녹음기를 이용해 중학교 3학년들의 욕설 습관을 살펴본 것.
관찰 결과 학생들은 야외 수업을 할 때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버스 안에서도, 어른들이 옆에 있어도 거리낌 없이 욕설을 했다.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쉬는 시간 60분 동안 나온 욕설을 세봤더니 무려 43차례나 됐다. 학생들이 84초마다 욕설을 내뱉은 것이다.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평소에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한다는 학생이 10명 중 9명으로 나타났다. 스스로 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욕설은 학생들의 일상 대화에 녹아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욕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어른들의 문제다. 어른들이 평소 접미사나 접두사처럼 욕을 달고 사니, 아이들까지 욕설이 습관화된 것이다.
지난달 30일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인 김준일 뉴스톱 대표가 한 유튜브 방송에 나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측의 언론 대응 사례를 거론하며 "병X 같다"는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틀면 나오는 김준일'이라는 소개 문구가 붙을 정도로 김 대표는 지상파는 물론 종편·케이블방송, 유튜브까지 채널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유명 방송인이다.
방송을 통해 김 대표를 잘 알고 있다는 한 젊은 후배에게 욕설 발언 사실을 알려주니 '통쾌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10~20대 유저가 많은 커뮤니티 게시판에 이 내용이 올라오자, "대응이 개X신 맞음" "판을 키울려고 소신공양했구만" "꼬우면 고소해 ㅋㅋ" 같은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정치권에선 "정파성을 넘어 우리 사회를 막말과 극단으로 몰아넣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왔으나, 정작 유튜브로 해당 발언을 접한 이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글로 옮기기조차 어려운 흉흉한 욕설이 일상화된 요즘, "병X"이라는 욕이 뭐 대수냐는 식이다.
어쩌면 사람의 성기에 빗댄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시대에 '병X'이라는 단어는 욕 축에 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단어는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병X 같다'는 말은 곧 그 사람을 장애인, 불구자로 비하하는 말이다. 이를 어찌 가벼운 욕이라 할 수 있을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케이지에서 피를 흘리는 이종격투기 선수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어떤가? TV에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선수들의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과 마찬가지로 욕설도 자주 접하면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방송에 나와 욕설을 하고도 "우발적이 아니라 의도해서 나온 발언"이라고 당당하게 나오는 어른들이 도처에 깔렸는데, 아이들에게만 욕을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해 말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이러니 밥이 넘어가냐고요. 이XX가"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김 대표의 욕이 국민의힘을 향했다면, 이 대표의 육두문자는 정확히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을 가리킨 말이었다.
유튜브 방송이라 괜찮다고? 이 채널은 공중파 JTBC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구독자 수를 떠나 영향력과 전파력이 상당한 방송에서 유명 정치인이 누군가를 "이XX"라고 욕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방영됐다.
방송을 지켜본 수많은 '이준석 키즈'들에게 이러한 이 대표의 '언행'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이 방송이 지상파였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유튜브 방송이었기에 파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대표는 지금도 '틀면 나오는' 유명 방송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극단적인 갈등과 혐오의 정서는 감염성이 크다"며 "신속 엄정 대응하지 않으면 금새 퍼진다. 극단적 혐오의 언행을 하시는 분들은 우리 당에 있을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도 "욕 잘하는 정치인은 뽑지 말라"는 대국민 권고를 했다.
무게감 있는 분들의 말이니만큼 한 번 기대해 볼 수는 있겠지만, 얼마 전까지 "암컷들이 설친다" "한동훈 같은 XX" "노인네는 빨리 돌아가셔야" 같은 정치인들의 막말을 수도 없이 접한 우리들로선 영 미덥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 TBS 라디오 '아닌 밤중에 주진우입니다'에 출연한 누군가가 "쫄지마, 씨X"이라는 욕설을 두 차례 내뱉었다. 이를 심의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행정지도'에 해당하는 '권고' 결정을 내리는 데 그쳤다. 당시 여권에선 "친여 방송으로 열일하는 TBS의 향후 재승인에 영향을 주면 안 되니, 방심위가 알아서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것"이라는 쓴소리가 나왔다.
같은 '욕설 출연자'라도 정치와 무관한 사안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 현대홈쇼핑 방송 도중 욕설을 했던 유명 쇼호스트는 아직도 방송 복귀를 못 하고 있다. 해당 방송은 방심위 광고심의소위원회에서 법정제재를 받았고, 당사자는 업계에서 영구퇴출됐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수위가 높다고 알려진 욕설 중에 '빠가야로(馬鹿野郞)'라는 말이 있다. '바보'가 가장 심한 욕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웃을 일이다.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시절 무가법(武家法)에 '욕설죄'를 만들어 이를 어길 시 매로 다스린 이후부터 일본의 언어 문화가 순화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시대에 이 같은 법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송 환경만큼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증오·혐오정치를 부추기고 욕설의 문턱을 낮추는 '막말 방송인' '막말 정치인'들이 더 이상 발 붙이지 못하도록 더욱 엄격한 제재와 감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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