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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베트남 역사의 비밀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조타 같은 각자도생 만연한 집권여당

 

베트남(Vietnam‧월남)은 누구다 알다시피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의 국명(國名)은 ‘외지인’이 세운 이 나라로부터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03~기원전 111년 베트남 북부에서 존속한 남월(南越)이 그것이다. 남월을 베트남어로 읽으면 남비엣(Nam Viet)이 된다.

 

수백 년간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고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시황제‧생몰연도 기원전 259~기원전 210). 그는 그 하나의 업적만으로 만족 못하고 주변 지역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도차이나반도도 그 중 하나였다. 시황제(始皇帝)의 명을 받든 장군 도수(屠睢)는 기원전 219년 부장 조타(趙佗‧?~기원전 137)와 함께 미지의 남쪽 세계로 향했다.

 

총사령관 도수는 현지인 학살 등을 일삼다가 결국 저항에 부닥쳐 목숨을 잃었다. 적진에 고립된 조타의 구원 신호에 따라 시황제는 임오(任囂)를 새롭게 원정 책임자로 내려 보냈다. 임오‧조타는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기원전 214년 마침내 인도차이나반도 동북부를 평정했다. 진나라는 그곳에 남해군(南海郡)‧상군(象郡)‧계림군(桂林郡)을 설치했다. 조타는 남해군 용천현(龍川縣)의 현령(縣令)에 임명됐다.

 

그런데 기원전 210년 머나먼 본국(本國)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제국의 건설자 시황제가 붕어(崩御)하고 새롭게 이세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가 즉위했다는 것이었다.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조타의 귀에 있으나 마나 한 리더인 이세황제의 폭정,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반란 같은 암울한 소식이 잇달아 전해졌다.

 

기원전 208년 남해태수(南海太守) 임오가 임종을 앞두게 되자 조타가 태수 직무대행을 맡게 됐다. 임오가 사망하자 조타는 스스로 태수에 취임하고서 조정이 내려 보낸 관리들이 임지(任地)에 부임하는 걸 막았다. 사실상 진나라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초(楚)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자 조타는 상군‧계림군을 무력으로 병합하고서 기원전 203년 남월국(南越國) 건국을 선언하고 무제(武帝)를 자처했다.

 

대륙이 전쟁에 휩싸인 사이에 조타는 신속하게 세력 확장에 나섰다. 후일 남월 남쪽의 어우락(Au Lac) 토벌과 관련해선 우리나라의 낙랑공주(樂浪公主) 이야기와 흡사한 전설이 구전(口傳)된다.

 

어느 날 조타의 아들과 어우락국의 공주가 혼인했다. 사랑에 눈이 먼 공주는 부친의 비밀병기 신노(神弩)를 남편에게 보여줬다. 조타의 아들은 이 무기를 망가뜨렸고 어우락은 쳐들어온 남월의 군대를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1983년 광저우시(廣州市)에서 발굴된 능묘(陵墓)의 주인이자 조타의 손자인 문왕(文王) 조말(趙眜)이 이들 부부의 자식 아닌가 추측된다.

 

남월은 새롭게 대륙의 지배자가 된 한(漢)나라에도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명목상으론 번국(藩國)을 칭했으나 안으로는 칭제(稱帝)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를 실시했다. 남월은 기원전 111년 한무제(漢武帝)의 장수 노박덕(路博德)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독립국으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마치 2천여년 전 진나라와도 같이 컨트롤타워 부재상황인 국민의힘이 어지럽다. 소속 인사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며 우왕좌왕 각자도생(各自圖生) 중이다. 그럼에도 전당대회 준비 속도는 개미핥기보다도 느리다. 만에 하나 특정 인사에게 총선 패배 책임에서 잊힐 시간, 해당 인사 추종자들이 입당(入黨)‧세력화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의도라면 한 사람 살리자고 당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밖에 안 된다. 초가삼간(草家三間)의 왕(王) 만들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야당은 여당의 이 아수라장을 틈타 전광석화(電光石火)로 민심장악에 나서고 있다. 전대가 조속히 실시되고 얼른 이 혼란이 수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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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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