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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용산으로 간다는 한동훈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패군지장(敗軍之將)은 말이 없는 법이다

 

마속(馬謖‧생몰연도 서기 190~228)은 촉한(蜀漢)에서 제갈량(諸葛亮)의 참모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막료 시절에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허나 막상 전권(全權)을 쥐자 되도 않는 야심 드러내다가 대차게 말아먹고 촉한마저 위기로 몰아넣은 끝에 목 없는 귀신이 된 위인이다.

 

마속은 형주(荊州)의 명문가인 마 씨 집안 출신이었다. 유비(劉備)가 형주를 접수하고 파촉(巴蜀)마저 점령하자 그를 따라 입촉(入蜀)했다. 처음에는 면죽현령(緜竹縣令)으로 벼슬을 시작했다가 차차 월수태수(越嶲太守)로 높아졌다.

 

허나 유비는 “입만 살았다” 혹평하며 중앙정치에는 불러들이지 않았다. 반면 제갈량은 마속의 말솜씨에 혹해 그를 중용했다. 유비 사후(死後) 제갈량은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밤낮으로 제 곁에 두며 전략을 논의했다.

 

225년 제갈량이 친히 남벌(南伐)에 나서자 마속은 “이민족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저는 뒤에 남아 집을 지키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조언했다. 연의(演義) 기준으로 제갈량은 안 그래도 쪄죽는 날씨의 남방 밀림지대에서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풀어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개고생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째 저째 해서 반란은 진압했다.

 

드디어 대망의 227년. 1차 북벌(北伐)에 나선 제갈량은 “또 당하지 않는다”며 버둥대는 마속을 옆구리에 끼고 출정했다. 제갈량은 옹주(雍州)의 여러 군현(郡縣)을 정복하며 승승장구했다. 다급해진 위(魏)나라는 촉군(蜀軍)의 핵심 병참로인 가정(街亭)을 공략해 제갈량을 굶겨 죽이려 했다.

 

안 그래도 멸치였던 제갈량은 다이어트를 거부하며 제장(諸將) 중 하나를 보내 가정을 수비하려 했다. 가정은 촉군이 적진에 고립된 채 말라죽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최대 요충지였다. 좌우는 위연(魏延)‧오의(吳懿) 등 실전경험 많고 노련한 장수를 투입해야 한다고 입 모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전쟁경험이라곤 전무함에도 신임하던 마속에게 가정 수비를 맡겼다. 사실상 북벌 전권을 마속에게 일임한 셈이었다.

 

지휘부는 “반드시 길목에 진채를 세워 적을 막아라” 두 번 세 번 신신당부했다. 마속은 “알았다”며 왕평(王平) 등의 부장과 함께 병마(兵馬) 이끌고 위풍당당히 가정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속은 도착하자마자 마치 제갈량을 뛰어넘으려는 야심이라도 드러내듯 돌연 “거기 산이 있기에 올랐을 뿐” 외치며 길옆 돌산으로 기어오르려 했다.

 

놀란 왕평이 바짓가랑이 붙잡았으나 마속은 바지가 벗겨지든 말든 미친 듯 암벽 클라이밍을 한 끝에 기어이 정상에 도달해 기념사진 찍었다. 연의에서는 “원래 사지(死地)에 서야 이기는 법. 이게 한신(韓信)의 용병술(用兵術)” “아래에서 몰려오는 적을 위에서 공격하면 백전백승” “승상(丞相‧제갈량)이 뭘 모르고 길바닥에 신문지 깔라 한 것. 난 촉한제일검” 비웃은 것으로 각색됐다. 어이가 가출한 왕평은 전쟁을 책으로 배운 마속에게 애걸한 끝에 1천의 병력을 겨우 떼어내 산 아래에 진을 쳤다.

 

드디어 몰려온 위군(魏軍)은 산 정상을 정복한 산악인 마속을 보고 까무러쳤다. 대장 장합(張郃)은 두 눈을 부비며 “이럴 수가. 믿을 수 없군. 제갈량의 용병술이 신묘하다던데 설마 자살특공대를 투입할 줄이야” 식은땀 흘렸다. 그리곤 돌산 위의 촉군을 공격하기는커녕 그냥 포위만 한 채 북치고 먹고 마셨다. 마속은 “하하 적이 쫄아서 감히 덤비질 못하는군. 안 그런가 하하” 아전인수(我田引水)하며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붙잡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느샌가 가져온 촉군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급도(汲道)는 애진작에 위군에게 끊겼다. 돌산에 수원(水源)‧곡식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마속과 장졸들은 씻지도 못한 거지꼴로 손가락 빠는 신세가 됐다. 신체의 70%가량이 물로 이뤄진 사람은 단 3일만 담수(淡水)를 못 마셔도 생명이 위독해진다.

 

참다못한 산악인은 하산(下山) 후 싸우려 했으나 이미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촉군은 그 때마다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급기야 촉군 진영에서는 굶어죽은 시신과 탈영병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촉군은 알아서 자멸(自滅)했고 가정은 위군의 차지가 됐다. 촉한은 국군(國軍) 전 병력을 잃고서 멸국(滅國) 당할 위기를 맞았다.

 

씻을 수 없는 대역죄를 진 촉한저질검은 추정치 108명의 부하만 이끈 채 겨우 달아났다. 그것도 왕평의 1천 병사가 위군을 필사 저지했기에 가능했다. 뻔뻔히 고개 쳐들고 살아 돌아온 마속은 “배신이 아닌 용기다” “공부해서 정교하고 박력 있는 리더십을 갖추겠다” 운운하다 국법(國法)에 따라 유비를 뵈러 뒤를 따라갔다.

 

패군지장(敗軍之將)은 말이 없는 법이다. 이유여하 불문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힘의 참패로 끝난 22대 총선에서 여당을 지휘한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입에 모터라도 단 듯하다. 게다가 금일(21일) 채널A 보도에 의하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조만간 대통령실을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전 당원‧보수층을 충격으로 몰아넣고도 당당한 모습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견지자실색 문지자토설(見之者失色 聞之者吐舌)을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자중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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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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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4.21

    한 전 위원장이 용산 회동 거부했다고 하는군요. 첨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