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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당정, 21세기판 도강언 구축해야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정국 해답은 천부지국(天府之國)에 있다

 

‘식위민천(食爲民天)’ 세종실록(世宗實錄) 3권 세종 1년(1419년) 2월12일 정해(丁亥)일 4번째 기사(記事)에 나오는 말이다. “백성의 하늘은 풍요로운 곳간”이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은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고통 받자 고을수령 등이 직접 민생(民生)을 살필 것을 교지(敎旨)하면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도강언(都江堰)은 오늘날에도 현존‧가동되는 고대의 관개(灌漑)시스템이다.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서쪽에 위치한 이 시설물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식위민천의 결정체 중 하나다. 도강언은 그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기원전 318년 진(秦)나라는 당시엔 파촉(巴蜀) 등으로 불린 사천성을 정복했다. 파촉은 저족(氐族) 등 이민족들이 살던 문명 밖 세계였다. 기원전 256년 진나라는 이빙(李冰‧생몰연도 기원전 302?~기원전 235?)이란 사람을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임명해 파촉에 발령했다.

 

파촉 한가운데를 흐르는 장강(長江)의 지류 민강(岷江)은 매년 홍수를 일으켰다. 때문에 많은 현지인들이 급류에 떠내려가거나 논밭을 망치는 등 고통 받고 있었다. 이빙이 살피니 홍수 원인은 근처 산에서 겨우내 녹은 눈이었다. 산에서 흘러든 설수(雪水‧눈 녹은 물)가 급류로 유입돼 유량(流量)이 넘쳐 둑을 터뜨리는 게 재난의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나라 입장에선 댐을 건설할 수도 없었다. 민강은 병력‧물자를 수송하는 핵심 교통로였다. 이에 이빙은 설수를 다른 곳으로 터줌으로써 유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대역사(大役事)를 기획했다.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이빙의 기안서를 승인하고 막대한 예산을 내줬다. 이빙은 이 돈으로 우선 인부 1만명을 고용했다. 그의 아들 이랑(李郞)도 부친을 돕기 위해 팔 걷어붙였다.

 

중장비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오로지 인력(人力)만으로 땅 파서 물길 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천분지(四川盆地)는 곳곳이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맥 투성이었다. 이빙 부자(父子)와 인부들은 망치와 정만으로 돌산을 깎느라 말도 못할 고생에 시달렸다. 그쯤 되면 포기할 법도 했으나 이빙은 꿋꿋이 백성을 위해 땀 흘리고 피 쏟았다. 바위를 깨기 위해 불로 가열한 뒤 찬물을 끼얹어 식히는 기술도 개발했다.

 

대장정(大長程)은 장장 8년가량이나 지속됐다. 마침내 민강의 물길을 여러 갈래로 분산하는 도강언이 완성되자 홍수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물살이 안정된 민강은 젖줄로 재탄생해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농지(農地)로 새롭게 탈바꿈한 땅은 약 2만 헥타르(약 200㎢)에 달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사기(史記) 하거서(河渠書)는 “이빙은 대도하(大渡河‧민강의 지류)의 수해(水害)로부터 (사람들이) 벗어나게 했고 두 강줄기를 뚫어 성도 일대에 흐르게 했다. 이들 하천에선 배들이 통행할 수 있었고 수로(水路)가 지나는 지역 사람들은 논밭으로 물줄기를 끌어왔는데 그 수는 억만에 달했다” 기록했다.

 

화양국지(華陽國志)도 “백성은 굶주림을 알지 못하고 흉년이 없기에 천하가 (파촉을) 일컫기를 하늘의 곳간(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한다”고 찬탄했다. 화양국지는 도강언 건설로부터 약 600년 뒤인 동진(東晉) 시대에 편찬된 파촉 지역 향토서(鄕土書)다.

 

현지인들은 2천여년에 걸쳐 이빙 부자 석상(石像)‧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1974년 도강언 보수공사 과정에서 후한(後漢) 대에 제작된 석상이 발견된 걸 시작으로 총 4개의 석상이 파촉 일대에서 발굴됐다. 송(宋)나라 조정은 이빙을 왕(王)으로도 추존(追尊)했다.

 

천부지국의 태평성세는 애국애당(愛國愛黨)의 원동력이 됐다. 이빙의 진나라는 시황제(始皇帝) 때까지 정복사업을 벌였으나 파촉 백성들은 불평 없이 따랐다. 한고조(漢高祖)도 초한쟁패(楚漢爭覇)에서 파촉의 막대한 인력‧물자를 차출했으나 반란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도 북벌 과정에서 익주(益州‧파촉) 장정들을 소집하고 물자를 징발했으나 백성들은 그를 무한 지지했다. 제갈량은 인부 1천여명을 동원해 도강언을 보수하고 새로운 둑을 쌓기도 했다.

 

22대 총선에 가장 높은 영향을 끼친 요인(要因)은 ‘경제’였다고 한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15~17일 전국 성인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선거 영향 요인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물가 등 민생현안’이 30%로 1위에 올랐다. ‘막말 등 후보자 자질 논란(11%)’과 ‘야당 심판(10%)’은 각각 3‧4위로 후순위였다.

 

이빙이 고혈(膏血)로써 도강언을 구축하고 세종대왕이 식위민천을 강조하신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월급쟁이인 필자도 물가‧세율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필자 집 앞 편의점 기준으로 참치캔 미니사이즈 하나가 5천원이다. 가히 미친 물가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관중(管仲)은 의식족이지예절(衣食足而知禮節) 즉 옷과 밥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곳간이 풍성하면 국민은 하지 말라고 해도 현 정부여당을 지지하게 돼 있다. 남은 3년 정부여당은 ‘곳간’에 집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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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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